꽤 먼 길이었습니다. 아침 7시 30분에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영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로 갈아타고 화북면 자천면에 도착하니 오후 1시였습니다. 1시간 동안 흔들리는 버스를 타고 가며 '왜 106년 전에 이 외진 골짜기에 교회를 세웠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뜻밖에 그 해답은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읽은 책에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일상적이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기꺼워하고 하나님께 충성을 표했고, 하나님도 일상적이고 실제적으로 아브라함을 기꺼워하고 그에게 신실하셨습니다. (중략) 아브라함에게 종교는 위안을 얻고자 안고 다니는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종교는 자신의 여행의 일상과도 같았습니다." (<물총새에 불이 붙듯> 유진 피터슨, 홍성사)

도탄에 빠진 농민들의 일상의 삶에 바짝 다가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다가가야 했기에 외딴 곳에 '자천교회'가 서게 된 것이지요. 산골 자천리에서 고달픈 일상을 살던 이들에게 전해진 말씀은 생명이었고 위안이었을 것입니다. 2017년 우리 크리스챤아카데미가 '지성적 신앙과 일상의 성화'란 주제로 평신도 포럼을 열었을 때, 연속 대담을 진행하신 강영안 서강대 명예교수(현 미국 칼빈신학교 교수)께서 이렇게 취지를 밝혀 주셨습니다.

"(전략)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삶과 신앙의 통합을 되찾아야 하고, 그러자면 무엇보다 반지성주의를 극복하여 성령 안에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며, 나아가 온전한 감성과 의지를 회복하여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과 성속 이원론을 극복하고 삼위 한 분이신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지성적·통합적 삶을 회복해야 한다. 이 포럼을 통해 우리는 삶의 각 영역에서 활동해 온 그리스도인들을 초청하여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죄로 인해 왜곡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회복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어떻게 그들이 동역해 왔는지, 그들의 비전이 무엇인지, 그들이 무엇으로 고통받았는지, 그들의 소망이 무엇인지, 그들을 오늘까지 붙들어 준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를 들어 볼 것이다. 그리하여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를 기점으로 새롭게 다시 개혁되는 교회, 개혁되는 그리스도인의 일상에서 기대할 수 있는 삶의 회복을 희망해 볼 것이다."

자천교회. 이근복 그림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1월 12일, 한옥 두 채를 나란히 붙여 겹집 구조인 '一자형 예배당'인 자천교회와 만났습니다. 남자 교인들만 출입했던 문에 들어서니 남녀 좌석을 나눈 나무 칸막이가 보였습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유교 가치관을 존중한 것으로 한국교회의 토착화 과정을 보여 주었습니다. 또 25평의 내부 공간 구성은 바실리카 교회 양식을 일부 채용하는 한식‧양식 절충이라고 합니다. 예배당 뒤에는 선교사들과 조사들이 묵었다는 작은 온돌방 둘이 있었습니다. 당시 경북지역 선교 지부는 대구였고 자천교회는 청송 지역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이 온돌방은 요긴한 숙소였습니다. 예배당 왼쪽에 교회 설립자인 권헌중 장로 기념비와 묘비가 지금도 교회를 지키는 듯 했습니다. 예배당과 잔디밭 마당, 정원수가 잘 가꾸어져 있어서, 예배당을 정리하던 분에게 물으니 "우리 목사님 보통 정성이 아닙니다"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고색이 창연한 종탑은 일제시대 종을 빼앗겼는데, 1947년 다시 종을 봉헌했다고 합니다.

서당 훈장 권헌중 장로는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선각자로 의병 활동 전력 때문에 이곳저곳 전전하다가, 대구제일교회와 계성학교를 세운 미국 북장로교 제임스 아담스(James.E.Adams, 안의와)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여 자천에 정착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야소교耶蘇敎를 반대하자, 권 장로는 자기 재산을 들여 마을에 필요한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지어 주는 조건으로, 1903년 초가삼간 한 채를 구입해 서당을 겸해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자천교회의 첫 출발이 되었습니다. 교인들이 늘자 1904년 현재의 목조 기와집을 완공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교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가마니 공장이 되었고, 1946년에는 대구 폭동으로 피해를 봤고,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 사무실로 사용되는 등 모진 세월의 풍상을 겪었습니다. 이 한옥 예배당은 2003년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452호로 지정돼 2005년 복원 공사를 마무리했고, 200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이 사적지 제2호로 지정했습니다.

예배당 오른쪽에 온돌방에 딸린 '낮은 굴뚝'이 있었는데, 여기에 이웃 사랑의 선한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개념 있던 양반의 기와집 중에는 대문 옆에 1미터 남짓의 낮은 굴뚝이 있습니다. 춘궁기에 연기가 멀리 밖으로 퍼지지 않게 해 가난한 사람들의 아파할 마음을 헤아린 작품이라고 합니다. 행여 높이 솟아오르는 양반집 굴뚝 연기를 보며 인근 가난한 평민들이 더 배고파하고 고통스러워하지 않을까 배려하는 조심스런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자천교회도 가난한 이웃들을 배려하는 선한 의지를 담아 복음과 전통문화를 적절하게 통합한 것이지요. 오늘날 대형 교회에 가난한 이웃에 대한 겸손과 배려심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다면, 척박한 시대에 어떻게 교회당을 그렇게 거대하게 건축할 수 있을까요.

자천교회 옆에는 안채와 사랑채, 좌우 별채, 대문채로 구성된 전형적인 전통 한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권헌중 장로가 1913년 50명의 신입생으로 시작한 2년제 근대식 남녀공학 공교육 기관(소학교) 신성학당이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교회는 문맹 퇴치 운동, 농촌 계몽 운동, 절제 운동을 통해, 민족 독립과 함께 일상의 삶을 바꾸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신성학당은 지금은 한국 기독교 역사 교육, 독서 교실 등으로 운영하고 있고, 전국 교회의 수련회와 모임 장소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날도 어느 교회에서 40명이 수련회를 하고 갔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권헌중 장로가 교회를 섬기다가 가세가 기울어 김경환 선생의 선대에 빚 대신 넘겨준 것인데, 2007년 고 김경환 선생이 교회에 기증한 것을 보수·정비한 것입니다. 자천교회는 1970년대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 분열한데다가 농촌 인구 감소로 작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권헌중 장로의 헌신의 토대에 손산문 담임목사의 정성스런 돌봄이 자천교회 역사를 지탱하는 힘입니다.

20여 년 전 민중 교회 목회자들과 터키에 있는 초대교회 유적지를 순례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요한계시록의 유명한 일곱 교회(에베소교회, 빌라델피아교회 등)를 방문하고 실망이 컸고 다 폐허여서 안타까웠습니다. 지금은 일곱 교회가 당대에 사명을 다하고 역사적 흔적을 남긴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나마 자천교회는 잘 보존되어 한국교회의 살아 있는 역사 현장이 되고 있으니 참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힘겹게 사는 이들의 일상에 다가가 진리와 평화의 통로가 되어 한국교회의 다가올 천년 역사의 나침판이 되길 바랍니다.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는 매월 2차례 업데이트됩니다.

이근복 / 목사,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쳐 현재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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