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전략의 접근 방법론은 원리로부터 접근해야 하는가 아니면 방법론부터 접근해야 하는가, 현실 문제로부터인가 아니면 영적인 문제로부터인가, 성경(텍스트)으로부터인가 아니면 상황(콘텍스트)으로부터인가. 이 문제는 간단치 않지만 총체적인 시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교회 개념의 혼란에 따른 건축 프로젝트

어떤 선교사는 “선교는 목회다. 교회를 개척하고 모금도 많이 해서 교회를 짓고 책임성 있게 목회와 부흥의 모델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 개척도 안 해보고 목회도 안 해본 선교사들이 어설프게 선교의 물을 흐리게 한다”고 비판하였다. 아프리카에 사역하는 또 다른 선교사는 정부로부터 교육 사업을 목적으로 땅을 받았는데 어느 날 현지 교회 지도자 한 분이 찾아와 “교회당을 지을 거냐?”고 퉁명스럽게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 도시에 큰 교회당을 세운 한국인 선교사를 지목하며 자기네 교인들을 다 빼앗아갔다며 분통을 터뜨렸고 했다. 여러 선교지를 여행한 어떤 친구는 한국인 선교사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와 현지 상황을 무시하고 어딜 가나 한결같이 교회당을 짓고 선교원을 운영하는 것이 사역의 대부분이라고 평하였다. 200여 교회를 개척하고 많은 학교를 세웠다고 간증하는 선교사를 보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교회란 결코 건물이 아니고 사람이다(고전 3:16). 건물은 단지 수단이요, 부차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교회 건축 프로젝트에 목을 맨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학교 순회 복음 전도를 몇 년간 하는 동안 “정 선교사는 교회 개척도 안하고 선교를 안 한다”고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국내 교회는 다분히 선교사에게 건축 프로젝트를 기대하고 ‘우리 교회가 어디에 이런 교회를 세웠다’고 내세우며 성도들에게 도전과 기도 제목을 준다.

선교사 입장에서 건축 프로젝트를 해야 방문하는 손님들에게나 후원 교회에 뭔가 보여줄 것도 있기 때문에 이 같은 느낌과 유혹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파송 및 후원단체는 선교사의 일반적인 사역은 물론 건축 프로젝트에 대해 실질 심사, 필요한 모금 절차, 모금액의 투명한 공금처리, 집행과정에 대한 감사를 할 필요가 있다. 현지 상황을 고려하여 사역에 따른 장기 사역을 위한 건축 프로젝트가 필요한 경우도 적지 않지만 교회는 빌딩이 아니라는 아주 평범한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요즘 가정 교회나 셀 교회 운동은 선교지에 창의적으로 적용할 만한 좋은 대안으로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서구 교회 선교와 한국교회 선교

서구권 선교사들의 상당수는 제3세계의 선교를 인정하는 척 떠벌리면서도 마치 엄청난 기득권을 쥐고 ‘역시 선교는 그래도 서구(미국)가 주도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제3세계 선교사들을 선교의 ABC도 모른다며 무시하고 좀처럼 잘 평가해주려 하지 않는다(<Mission Frontiers>, 제20호). 아프간 사태에 대해 어떤 언론은 “한국교회는 현재 미국 주류 교계에서 거의 쓰지 않는 19세기 방식으로 공격적인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고 비꼬았다. 직접 선교를 담대하게 잘하는 한국교회의 선교를 현지 상황을 무시한 공격 선교라하는 것은 상당 부분 그들의 내면에 있는 질투심(jealousy)과 우월의식의 발로라 말할 수 있다.

미국은 자신의 패권주의로 인해 미국 교회가 얼마나 세계 선교에 위축되어 있고 그 출혈이 얼마나 심각한지 잘 모르는 것 같다. 전 세계 곳곳에서 반미 감정이 고조되어 사실상 미국 선교사의 설 땅은 점점 잃고 있다. 이에 따른 선교의 돌파구가 주로 간접 선교 행태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심지어 프레토리아에서 열렸던 ‘GCOWE 97 국제 선교 대회장’에서 흑인 목사들은 “아프리카 땅에서 백인 선교사들은 다 돌아가라”고 성토를 하였고 백인 교회 지도자들은 “Please forgive my people!”(우리 민족을 용서하십시오) 하며 무릎을 꿇고 울먹였다. 이런 살벌한 상황에 교회를 개척하거나 직접 전도를 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전쟁을 하고 있는 모슬렘권에서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직접 선교 대신 자연히 복음을 감춘 다양한 NGO 형태의 사역이 개발되었고 국제 선교 단체의 리더십도 어쩔 수 없이 하나 둘 넘기기 시작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한국의 국제 위상이 높아지고 그 바탕 위에 한국교회의 선교 열정은 가히 서구 교회가 흉내 내기 어려울 정도로 폭발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평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다. 선한 경쟁이라는 측면에서 파송 숫자로 보면 미국 다음이지만 실제 사역의 규모 면이나 복음 전도의 열정·용기·희생·헌신 등을 보면 거의 최고다. 최근 유력 일간지인 프랑스의 <르피가로>는 전 세계 개신교도 중에서 한국인 개신교도가 가장 열렬한 복음 전도자들이라고 격찬한 것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미국 교회의 선교전략을 일방적으로 무비판적으로 수용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선교정책과 노하우를 배울 것은 배우고 비판할 것은 과감하게 비판 수렴해야 한다. 

선교 개념의 혼란과 햇볕 선교정책

에큐메니칼 운동은 성경적 선교 개념을 거추장스럽게 여기고 대신 사회학적, 정치학적, 문화인류학적, 심리학적인 옷, 즉 교회가 아닌 세상,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화, 인간 중심, 회개가 아닌 화해 등등으로 바꾸었다. 그런 영향인지 최근 교회의 선교 핵심과 본질이 많이 약화되고 다분히 사회복지(social welfare)나 사회 관심사를 나타내는 프로젝트 쪽으로 더 많이 기울어지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한 때 복음과 떡의 우선순위를 논란하다가 요즘은 떡과 복음, 복음과 사회적 책임, 영육 구원의 동시성에 의한 총체적 선교(Holistic Mission, 전인선교)가 출현하였다. 종교다원주의(pluralism)의 출현으로 예수를 믿지 않고서도 선교사 명찰을 달 수 있고, 성경적인 구원의 복음은 빼고 선교를 논할 수 있는 시대에 처해 있다. 이와 같이 선교 개념의 혼란은 결국 선교지를 교란시키고 세계 복음화를 무력화 시키려는 어두운 세력의 고도의 책략일수 있다는 사실에 경계와 함께 분별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총체적인(전인) 선교를 지향하는 것이 선교사의 꿈이다. 총체적인 선교의 이론은 그럴 듯한데 여러 가지 한계 상황 속에 있는 선교사에게 선교지의 끝없는 다양한 필요와 멈출 줄 모르는 현지 필드의 욕구에 얼마나 실현 가능할까? 한번은 선교지의 한 도시 지도자들의 모임에서 선교사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얼마나 많은 컨테이너를 쏟아 부어야 되느냐고 되물으면서 해답은 하나님 말씀에 있고 말씀을 통해 여러분이 변화되는 것이 바로 그 해답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답하였다. 그 이후 이들과 함께 제자 훈련을 하며 “우리는 통째로 먹을 수 있는 생선을 요구했는데 당신은 싱싱한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방법을 깨우쳐 주었다”며 고마워했다.

꼭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필요를 채워줘야만 총체적인 선교인가. 물질이 없어도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수준 높은 선교가 아닐까. 그렇다면 총체적인 전인 선교는 성령의 권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해답이 나온다. 아무튼 따스한 햇볕 전략에 의한 어떤 선교의 프로젝트이든, 달란트이든, 영혼 구원과 복음 증거의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일방 선교와 양방향 선교

기독교 인구가 70%인 남아공에 가 처음 약 2년간 “이곳이 과연 성령께서 나에게 요청하시는 마게도냐인가”라는 문제로 남다른 고민을 하였다. 물론 나름대로 선교 소명에 대한 검증도 받았고 그에 따른 확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지에 대한 소명의 불확실성에 따른 그 땅에서 선교사 자신의 존재 이유, 즉 정당성 내지는 정체성(Identity)의 갈등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응답주심을 체험한 후 갈등이 멈췄다.

미전도 종족 선교에 집착하는 분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복음이 가장 필요한 곳에서 진짜 선교 사역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그렇지 않은 선교사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재단을 해버린다. 하워드 브란트(Dr. Howard Brant, SIM 국제 부총재)는 “이 시대의 선교는 어디서든지 와서 어디로든지 가는 추세로, 말하자면 캐나다에서 이디오피아로, 이디오피아에서 캐나다로 선교사가 오가는 등 양방향 선교 시대”라고 하였다.

선교지를 피터 와그너는 이론에 대입한다면 이해단계(개척자, as a pioneer), 부양단계(보호자, as a parent), 계발전략단계(동반자, as a partner), 확장단계(조력자, as a participant), 재생산단계(촉진자,Reproducing as a prompter)로 볼 때 전 세계의 그 어떤 나라든지 이문화 선교(Cross-Cultural Mission)라는 측면에서 복음이 필요한 그 누구든지 땅끝이요, 10/40 윈도우요, 미전도 종족이라 할 만하다. 비자가 잘 나오고 교육환경이 좋은 살기 좋은 선진국이든, 그 반대의 후진국이든, 복음이 필요한 5대양 6대주가 원색적인 복음으로 무장한 더 많은 양질의 한국인 선교사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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