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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설득이지, 자기표현이 아니다
[서평] 마크 릴라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필로소픽)
  • 최경환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8.12.18 16:10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던 날, 많은 사람이 충격과 비통함에 빠져 한국 정치의 미래를 걱정했다. 짐작건대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던 날, 미국에서도 비슷한 충격이 있었을 것이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트럼프가 당선되자 진보 진영은 저마다 패배 원인이 무엇인지 분석하기 시작했다. 마크 릴라는 그 원인이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에 있다고 지적한다.

'정체성 정치'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라는 슬로건이 미국 진보 세력에 영향을 주면서 진행된 공동체의 가치나 연대, 공적 의무보다는 인종, 성별, 성적 지향 등 개인의 특정 정체성을 강조하는 정치다. 가장 진보적인 정치철학자 중 한 명인 마크 릴라가 진보 정치 실패 원인을 정체성 정치로 지목하니 살짝 당혹스럽기도 하다. 실제 이 책은 상당히 논쟁적이다. 진보 꼰대의 잔소리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그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현대 페미니즘 운동의 폐부를 날카롭게 찌르기 때문이다. 그의 진단을 들어 보자.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 정체성 정치를 넘어> / 마크 릴라 지음 / 전대호 옮김 / 필로소픽 펴냄 / 160쪽 / 1만 4500원

마크 릴라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진보 세력이 노동자 계층을 대변하는 정치를 펼쳤다고 한다. 오늘날 진보 정치가들은 이들을 외면하고 대부분 대학교 세미나실이나 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있다.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며 촉발한 정치적 낭만주의와 신좌파 운동이 대학 내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서 학생들은 자기 정체성을 탐구하도록 훈련받았다. 부모 세대는 사회 억압과 장애물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면, 새로운 세대는 도대체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이 돼야 하는지 몰라서 고통을 받는다고 한다. 사회 진보와 해방에 자기 삶을 쏟아부은 구세대가 보기에 신세대는 일종의 잡탕이다.

"오전에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에서 행진하고 오후에 식품 조합에서 일하고 저녁에 여성주의 워크숍에 참석하고 밤에 야외에서 캠핑하며 내 영혼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것은 완벽하게 일관된 행태였다." (78쪽)

이들에게는 개인의 취향이나 정체성이 정치와 전혀 무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런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반면, 기존 진보 세력은 전선을 분명히 하면서 계급투쟁에 헌신하느라 개인 정체성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 사이 사회 이슈와 관심사는 정체성 중심 운동으로, 공통성에 대한 감수성은 차이에 대한 인정으로 전이됐다. 그리고 정치적 공간은 점차 텅 비어 가기 시작했다.

정치 본연의 임무는 권력을 잡아 자기 이상과 비전을 성취하는 것인데, 이런 진보 정치는 나와 너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자신이 타인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차별성을 추구하는 소수파 사이비 정치로 전락했다는 게 릴라의 지적이다. 본래 이들이 내세웠던 정치적 이상은 소수자를 돕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선거에서 이기고 법령을 바꾸고 현실적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이들은 대학에서 개별적으로 관심사에 맞는 세미나에 참석한다든가, 퍼포먼스 위주의 운동에 몰두하기 때문에 사이비 정치라는 것이다.

정치 토론은 자기 논리를 뒷받침할 근거와 주장을 통해 타인에게 설득하는 과정이다. 자연스럽게 그 과정에서 조정과 조율이 일어나야 정상이다. 그런데 오늘날 캠퍼스 진보주의자들은 자기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워 아예 토론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과거라면 '나는 A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 근거는 이러이러해'라는 식으로 시작되었을 학급 토론이 지금은 'X로서 말하는데, 네가 B라고 주장하는 것은 나를 모욕하는 거야'라는 형태를 띤다." (94쪽)

뭔가 익숙한 수사법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몇 가지 카드를 전면에 내세워 자기만의 완고한 성을 쌓는 느낌이다. 이런 편 가르기로는 정치적 비전을 만들 수도 없고, 실제로 진보가 원하는 목적도 달성할 수 없다.

40대 중산층 노동자가 이렇게 정치로부터 소외당하자 그들은 트럼프를 선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트럼프 당선은 진보주의자들에게 절호의 찬스를 제공했다. 트럼프가 내뱉는 온갖 원색적이고 폭력적인 수사는 그나마 남아 있던 통상적인 공화당의 정신과 원칙 있는 보수주의 가치마저 완전히 파괴했다. 한마디로 진보주의는 적이 없어졌다.

정체성 정치가 트럼프의 당선을 불러왔지만, 동시에 트럼프의 등장으로 진보는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남아 있는 유일한 적수는 우리 자신이다."(106쪽) 마크 릴라는 이 기회를 잘 활용한다면 진보적인 미국이 탄생할 수 있다고 예상한다. 그러려면 진보주의 역시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해야 한다. 의미 있는 운동이 정치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시스템이 필요하고, 이를 관철할 정치가가 필요하다.

"현실을 직시하라! 운동 정치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진 참가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더 많은 시장市長들이 필요하다. 더 많은 주지사들, 주의원들, 연방의원들이 필요하다." (114쪽)

이쯤 되면 마크 릴라의 진단과 처방이 상당히 불편한 이들이 있을 것이다. 개인의 취향과 정체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더 많은 운동이 필요하고, 더 많은 인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대화와 타협도 미숙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문화조차 취약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중의 과제를 풀어 나가기 위해서라도 책임 있는 시민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결국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자들이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민주주의의 시민 의식은 자기만의 설교단에서 내려와 다른 이의 말을 경청하고 함께 상상하는 법을 배울 때 가능해진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페미니즘 정치인, 페미니즘 시장, 페미니즘 대통령이 필요하다. 그래서 더욱 설득과 타협에 능해야 한다.

최경환 /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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