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 진리, 성경, 역사, 해석> / 앤터니 티슬턴 지음 / 박규태 옮김 / IVP 펴냄 / 698쪽 / 3만 2000원. 사진 제공 IVP

언젠가 지인이 제게 무엇을 공부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조직신학'이라 답했더니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조직을 신학적으로 공부하시는군요. 교회를 이끌어 갈 때 조직에 대해 공부하면 참 유익하겠어요." 저처럼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당연히 조직신학은 기독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신학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분 입장에서는 그분이 가진 배경에서 제가 답한 표현을 이해했던 것입니다.

당시를 돌이켜 보면, 교회 안에서 교리나 조직신학이 처한 상황이 생각 이상으로 기독교인들과 동떨어져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에서 교리나 신학을 가르친다는 게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 교리나 신학은 사람 사는 삶의 자리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아 보입니다. 교리나 신학이란 표현에는 낯설고 때론 부정적인 이미지가 배어 있습니다. 하물며 '조직신학'은 오죽할까 싶습니다.

해석학을 통해 교리와 신학에 숨을 불어넣다

앤터니 티슬턴은 골동품 취급을 당하는 교리와 신학에 해석학을 통해 역동성을 불어넣어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에 생명력을 공급하려는 시도를 신학자이자 성공회 사제로서 계속해 왔습니다. 이번에 나온 <조직신학>(IVP, 2018)은 그 연장선에서 탄생한, 티슬턴이 말년에 자신의 지난 여정을 압축하여 써낸 작품입니다.

원래 티슬턴은 조직신학보다는 해석학적 신학으로 잘 알려진 학자입니다. 신학적 해석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두 지평 - 성경 해석과 철학적 해석학>(IVP, 2017), <기독교 교리와 해석학>(새물결플러스, 2016), <앤서니 티슬턴의 성경해석학 개론>(새물결플러스, 2012)과 같은 티슬턴의 책들을 익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해석학자로서 티슬턴은 기독교 교리가 분명 공인된 이론적 진리 체계임에도 깊이 침체되어 있어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와 사역에 영향력을 주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삶과 분리되어 외면당하여 과소평가되는 교리와 신학의 무력함 속에서 교리와 신학에 다시 숨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해석학과 교리의 상호작용이라 믿었습니다.

이러한 해석학이 신학에 가져다줄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해석학적 성찰이 주는 형성적(formative) 결과, 즉 교리와 해석학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변혁과 형성입니다. 이것은 원래 교리가 가진 성격이었지만 그동안 상실되어 왔습니다. 티슬턴이 <조직신학>에서 각 주제를 다루며 자신의 방법론을 구사하는 과정 속에는 교리의 본래 성격을 되찾는 이러한 기획이 빛나고 있습니다.

책의 특징

저는 이 책을 읽으며 무엇보다 티슬턴이 독자를 배려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이 책을 쓰며 학문적으로 공헌하기보다는 교회와 사역의 현장에서 더 유용하게 쓰이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래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조직신학>은 '백과사전적'이고 '교과서적인' 책입니다. 보통 조직신학자들은 조직신학 책을 쓰더라도 자신이 가진 신학적 문제의식과 관심을 중심으로 자기만의 신학적 주제를 펼쳐 나가기에, 책 속에서 저자 색깔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모든 자료와 자료 해석은 그들의 개성을 밑받침하는 역할을 합니다. 반면, 백과사전적 조직신학 책은 저자의 뚜렷한 개성을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방대하게 제시된 다양한 신학자의 해석과 관점을 접할 수 있으며, 이로써 독자가 통전적 해석을 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티슬턴의 <조직신학>은 백과사전적 조직신학 책입니다. 해석학자가 언어학, 사회학, 성서학, 문학 이론 등 여러 해석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교리와 성서를 다루는 풍부한 해석을 보여 주고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이 책은 해석학적이면서도 전통적입니다. 티슬턴은 해석학자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가다머는 전통과 현재라는 두 지평의 해석학적 융합을 주장한 학자이며, 가다머의 영향은 티슬턴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의 제목이 <두 지평>이란 것을 보아도 느낄 수 있습니다.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 매우 충실한 영국 특유의 신학적 분위기를 티슬턴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티슬턴은 해석학자로서 전통을 과거에 가두지 않고 오늘날의 언어로 다시 해석합니다. 바로 여기서 조직신학은 역동적으로 변모합니다.

셋째, 이 책은 실용적이고 목회적입니다. 티슬턴에게 교리가 발생하고 해석되는 곳은 바로 '삶의 자리'입니다. 티슬턴은 조직신학의 딱딱한 여러 주제를 다루면서도 오늘날 우리 삶에서 나타나는 여러 이슈, 예를 들면 페미니즘, 혼인, 죄와 소외, 정치 공동체, 정의 등의 문제를 놓치지 않습니다. 책이 교회와 사역 현장에서 유용하게 쓰이도록 그 목차와 구성을 배려한 것입니다.

티슬턴의 해석학적 방법론

전체 15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티슬턴은 조직신학의 주요 주제인 신론, 인간론, 기독론, 성령론, 교회론, 종말론을 다룹니다. 그런데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 주목한 부분은 바로 그의 신학 방법론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해석학자가 쓴 조직신학 책이라는 점에서 분명 그의 신학 방법론을 주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신학 체계를 모르고 이 책을 보면 그가 쓴 내용이 교리의 역사를 나열하거나 그저 교리를 길게 설명하는 정도로 읽힐 수 있습니다. 그의 조직신학에는 분명 방법론적 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론이 조직신학에 숨을 불어넣습니다. 따라서 티슬턴의 해석학적 신학 방법론을 주목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티슬턴은 <조직신학> 1장에서 방법론을 다룹니다. 1장 제목은 '방법과 진리'입니다. 가다머가 떠오르는 표현입니다.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 - 철학적 해석학의 기본 특징들>(문학동네, 2012)을 통해서 진리와 그 진리를 찾기 위한 방법이 역설적 대립 관계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가다머가 보기에 데카르트적 합리론의 '방법'은 진리에 이르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방법을 배제할 때 진리가 드러난다고 보았습니다.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가다머에게 이해란 인간의 존재 방식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이라는 표현이 티슬턴에게는 '방법과 진리'로 바뀝니다. 티슬턴은 오히려 해석학적 방법이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그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티슬턴은 조직신학에 적용될 수 있는 해석학적 이론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그것은 화행 이론(speech-act theory), 해석학, 사회학, 문학 이론입니다. 이 해석학적 이론들이 1장 이후 이 책에서 다루는 여러 주제를 구성하는 틀이 됩니다. 하나씩 설명해 보겠습니다.

첫째, 화행 이론을 간단히 말하면, 무엇을 말한다는 것은 그것을 말하는 가운데 말의 내용이 담은 행위를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약속이 그렇습니다. 약속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에게 참이 되도록 하는 약속과 의무를 부여합니다. 발화에는 수행이 뒤따릅니다. 이 화행 이론은 신론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품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드러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화행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특히 언약은 단순히 어떤 추상적 사유나 공허하게 사라져 버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화행입니다. 비슷한 경우로, 케빈 밴후저 같은 학자도 화행 이론에 근거해서 성경과 교리를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 설명합니다. 아무튼, 티슬턴에게 이러한 화행 이론에 따른 해석은 하나님을 그분의 말씀과 약속에 그분을 스스로 제한하고 구속하시는 분으로 볼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반드시 수행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분이 하신 말씀에 신실하십니다. 그리고 그 신실하심의 기초는 하나님의 자기 제한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제한하시면서 그분의 사랑과 은혜와 구원과 용서를 변함없이, 인간의 조건과 상황에 얽매이지 않고 일관되게 지키십니다. 티슬턴은 화행 이론에 기초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따른 약속을 하실 때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이 약속하신 일에 헌신하시며, 당신의 약속을 무르실 수도 없고 무르시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 화행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을 제약하지지 않으면서도 당신 자신의 화행으로 말미암아 '제한받거나' 제약받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47쪽)

"하나님은 당신이 약속하신 것을 행하시겠다고 맹세하시고 그것을 행하는 데 헌신하신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이 지금도 행하실 수 있는 일들의 선택 범위를 제약하신다." (135쪽)

그런데 이 화행 이론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말씀과 성례입니다. 화행 이론에 따르면 약속은 곧 수행입니다. 그러기에 칼뱅의 주장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말씀과 성례를 통해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확신한 보증이 됩니다. 성찬이야말로 확실한 하나님의 화행입니다. 티슬턴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찬이 예수의 수난 사건과 갈보리 사건을 반영하는 한 (중략) 성찬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사물로 행하는 화행이자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확실한 보증을 제공하고자 제정되었다는 양면을 지닌다." (516쪽)

둘째, 해석학은 슐라이어마허 이후 큰 전환을 이루는데, 이전의 해석학은 텍스트에 기초한 문법적이고 언어적인 해석에 중심을 두었다면, 슐라이어마허 이후 해석학은 문법적 해석에 기초하지만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해석학에 더 무게를 둡니다. 해석자의 '전이해'(사전 이해 혹은 선이해)가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해석학에서는 해석자의 자리가 더욱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렇게 신학에 있어서도 해방신학과 페미니즘 해석처럼 해석자의 삶의 정황과 관점을 기초로 하는 흐름들이 큰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티슬턴은 이러한 해석자의 전이해를 강조하는 일이 텍스트 자체의 권위를 침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해석은 '타자'에 민감해야 하며, 그 타자에는 해석을 듣는 청자는 물론 텍스트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타자에 대한 민감함은 어떤 공감을 지향하고, 그것은 해석학적 접근법이 자신만의 독백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대화를 전제로 함과 동시에 인간의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교리나 성서 해석 역시 삶과 연관되어 있으며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가진 믿음이 삶과 연관되어 있음을 인정한다면 인간 삶의 공동체적 구성인 사회를 설명하는 사회학 역시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로 사회 비평적 해석이 이에 해당합니다. 사회학은 교리나 성서를 해석할 때 유용하고 필요한 도구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교리를 도출하거나 신학적 작업을 할 때 사회학이 '주는' 역할을 주로 인정하지 반대로 사회학이 기독교 신학에서 '받는' 영향을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티슬턴은 페미니즘을 다룰 때 새라 코클리를 인용하며 이렇게 서술합니다.

"코클리는 우리에겐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실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방법에는 특히 기도와 묵상,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개인의 분노와 증오라는 덫과 함께 자아에 빠진 채 자기 내면만 들여다보는 태도를 포기하는 것이 포함된다. 우리에겐 깊은 묵상을 통한 지움(contemplative 'effacement')이 필요하다. 이런 지움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 이런 신성한 참여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 것은 변화를 포용하는 것이자 (중략) 새 언어를 말하는 방법을 (중략) 배우는 것이다." (215쪽)

티슬턴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해석학적으로 신학과 사회과학이 맺는 관계란 창조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상호'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티슬턴은 사회과학이 여성과 소외된 계층의 권리를 옹호하고 주목한 것은 높이 평가하지만 오늘날 자유주의 형태의 신학들이 지나치게 사회과학을 신뢰하고 치중한 나머지 분노에 갇혀서 진정한 해방을 이루지 못한다고 보기에 신학이 사회과학에 가져다줄 수 있는 어떤 역할을 기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티슬턴이 제기한 해석학에 있어서 신학과 사회과학(혹은 사회 이론)의 창조적이고 비판적인 관계는 오늘날 조직신학이 경험하는 무력감을 생각하게 합니다.

기독교 신학, 특히 조직신학은 마치 다른 사회 이론으로부터 해독을 받아야 할, 구체적인 삶에는 실제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는 무익하고 열등한 학문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주목할 만한 현상은 알랭 바디우나 슬라보예 지젝, 자크 데리다 같은 현대 철학자들이 기독교 신학(특히 바울)을 향해 눈을 돌리고 그것을 전복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 기독교인들이 보지 못하는, 그리고 어쩌면 사회 이론가들이 경험하는 한계를 돌파할 대안으로 기독교 신학이 가진 어떤 참신하고 긍정적이며 전복적인 차원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만약 해석학에 있어서 신학과 사회학이 창조적이고 비판적인 '상호' 관계를 갖는다면 티슬턴이 의도한 신학의 새로운 이해와 수행성이 드러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언어학과 문학 이론의 영향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은유와 내러티브입니다. 내러티브에 동원되는 수많은 장치를 이해할 때, 성서 해석에서 창조적인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티슬턴은 마가복음을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마가의 내러티브에서 베드로의 고백 전까지는 '즉시, 곧'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마지막 십자가 수난으로 갈수록 내러티브가 진행되는 속도가 느려집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이 주목받게 되는데, 이것은 마가 내러티브의 전체적인 의미를 예수의 십자가와 수난에 두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은유와 상징 역시 그러합니다. 예컨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종말론에서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을 해석하는 부분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이렇게 티슬턴은 언어학과 문학 이론을 통한 성서 해석으로 그 의미의 깊은 차원들을 드러내는데, <조직신학> 전체에 걸쳐 제시되는 참신하고 풍부한 해석은 이 책이 조직신학 책임에도 읽는 이가 따분해하지 않게 합니다.

지금까지 제시한 화행 이론(speech-act theory), 해석학, 사회학, 문학 이론이, 즉 티슬턴의 조직신학을 집필하며 활용하는 여러 해석학적 방법론이 추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입니다. 티슬턴은 책 전체에 걸쳐 이를 고수합니다. 티슬턴은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일관성과 체계, 철학 탐구, 우연과 맥락 속에 자리한 성경의 내용, 개념 해명, 해석학, 사회학, 문학적 신학을 살펴보았다. 오늘날의 조직신학에는 이 모든 영역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우리의 신학 탐구와 진리 탐구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이 모든 영역을 활용해야 한다. 아울러 이 모든 영역은 그리스도인의 제자도가 추구하는 목표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성찰과 기도, 성령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하고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을 나누도록 도와줄 수 있다." (59쪽)

조직신학이 해석학을 만날 때

교리가 역동성과 생명력을 찾으려면 해석학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 티슬턴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오늘날, 교리 혹은 그것을 다루는 조직신학은 매우 고리타분하고 구체적인 삶과는 연관이 없는 관심 밖 주제가 되고, 혹 다루어진다 하더라도 단지 교회 내에서 교리 내용을 아는지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필요한 내용에 불과한 것이 대부분 교회의 상황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은 두 가지 반응을 가져옵니다. 하나는, 기독교 교리를 공식화해서 그것을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변화하는 삶과 세계를 향한 관심도 없고 반성하는 자세도 없이 고정된 교리만을 반복해서 읊으며 안전감을 느끼는 폐쇄적 태도입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근본주의적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극단적 자유주의입니다. 과거의 전통을 무조건 비판하고 이를 해체하기를 주장하는 입장, 과거와 현재의 간격을 다루는 문제에서 쉽사리 과거를 적대하는 입장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 교리나 조직신학은 해체해야 할 과거의 유물일 뿐입니다. 어쩌면 역사성을 지나치게 고수하기에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보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진리 자체가 성립될 수 없고, 그래서 그 끝은 허무주의로 귀결됩니다. 이러한 교리적 근본주의와 극단적 자유주의가 도달하는 지점은 같습니다. 바로 생명력을 잃은 신학, 수행성을 망각한 신학, 역동성을 포기한 신학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게으름이 발생하는 것은 신학이란 자신의 삶을 담아낸 고백적인 것임을, 시대에 답할 책임을 가진 변증적인 것임을, 무엇보다 해석학적인 것임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티슬턴이 수행하는 조직신학의 중요성이 드러납니다. 그의 조직신학은 교리의 보편성과 역사성의 간격을 해석학을 통해 풀어내는 신학입니다. 티슬턴은 조직신학의 해석학적 방법론을 이 한마디에 담아냅니다. "일관성과 체계가 역사와 우연을 배제하지는 않았다."(36쪽) 조직신학이 해석학을 만날 때, 그 신학은 새롭고 살아 있어 삶의 현장과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에 생명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이것이 신학이 침체한 시대에 티슬턴의 조직신학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신학의 새로운 가능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규식 /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연구원,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조직문화신학 박사과정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