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인문주의에서 답을 찾다 - 헬조선과 개독교 시대에 읽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역사> / 배덕만 지음 / 대장간 펴냄 / 128쪽 / 9000원. 뉴스앤조이 강동석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이벤트가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았는가?"

책 뒤표지에 실린 이 문장은 이 책의 핵심이자,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짧지만 강력한 저자의 외침을 들을 수 있다면 '헬조선'과 '개독교'로 지칭되는 한국과 한국교회 안에서 대안을 찾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 책은 5부로 분류하여 종교개혁 시대에 일어났던 인문주의 운동을 탐색하고, 한국교회와 기독교 인문주의의 연관성을 찾아 대안을 모색한다.

헬조선과 기독교

'헬조선'이란 표현은 한국 전반에 걸친 현상을 표현하는 유행어가 되었고, 모두가 공감하는 단어가 되어 버렸다. 헬조선은 청년 실업 문제와 맞물리며, 사회 전반의 현상을 파악하는 용어로 안착했다. 더불어 생겨난 수저 시리즈는 아직도 유효하다. 금수저·은수저·동수저·흙수저는 소유와 권력에 상응하는 사람들의 삶의 형태를 지칭하는 용어다. 입에 담기 힘들지만, 종종 '똥수저'라는 단어도 사용된다. 보이지 않는 소유와 학력 등에 의해 화석화한 신분을 말한다. 부모의 능력 차이로 자녀들은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고정된다는 말이다. 최근에 일어나는 '노력의 배신'이나 아무리 노력해도 가망이 없다는 조롱 섞인 '노오오오력'이라는 단어들은 헬조선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출생과 함께 부모의 직업, 경제력 등에 따라 본인의 수저가 결정된다는 이론으로서 흙수저는 '부모의 능력이나 형편이 넉넉지 못한 어려운 상황에 경제적인 도움을 전혀 못 받고 있는 자녀를 지칭'한다." (13쪽)

인문주의란 무엇인가

이제 헬조선 이야기와 개독교를 넘어, 2·3부에서 그려 내는 인문주의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저자는 간략하게 인문주의와 관련한 사건들을 추적하면서 인문주의가 종교개혁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찾는다.

르네상스(Renaissance)와 떼어 놓고 인문주의를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문주의 자체가 르네상스 운동의 주요 성향이기 때문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이렇게 정의한다.

"르네상스 [프랑스어] Renaissance

14세기~16세기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인간성 해방을 위한 문화 혁신 운동. 도시의 발달과 상업 자본의 형성을 배경으로 하여 개성·합리성·현세적 욕구를 추구하는 반(反)중세적 정신 운동을 일으켰으며, 문학·미술·건축·자연과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유럽 문화의 근대화에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

이 정의에서 "인간성 해방을 위한 문화 혁신 운동"에 방점을 찍어 보자. 종교적 의미에서 르네상스 운동을 재정의한다면, 신학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 학문을 일구어 내려는 운동으로 정의해도 될 성싶다. 중세와 가톨릭, 교황의 권위라는 그릇된 종교적 정치형태와 결코 무관하지 않음에도, 르네상스 운동 자체는 신에게서 해방하려는 인간의 자유 갈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르네상스가 처음부터 신으로부터의 자유를 부르짖지 않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저자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대 인문주의자들이 "신실한 기독교인들"(45쪽)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세속적 르네상스 운동이 고대 헬라로 돌아갔다면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초대교회 교부 문헌으로 되돌아갔다. "고대에 찬미의 대상이었던 인간의 육체와 지성"(48쪽)이 바로 중세 교회가 억압하고 퇴보시킨 것들이었다. 르네상스 운동은 정확하게 이러한 것들을 되찾는 운동이었다. 고대의 정신을 되찾기 위해 선행할 작업은 고대의 문헌을 회복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르네상스 운동은 인문주의 운동으로 우회한다. 인문주의 운동은 부수적으로 다양한 변화와 결과를 가져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콘스탄티누스의 기부>가 8세기에 위조된 문서인 점을 밝힌 것이다.

궁극적으로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인간을 비관적으로 일관했던 중세 스콜라주의를 뛰어넘어 "하나님, 신앙,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고대의 재발견을 통하여 낙관적 인간론을 회복"(50쪽)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회복의 의미보다는 인문주의자들이 "실천적 현실적인 사람들"(51쪽)이었다는 짤막한 구절에 강조점을 두고 싶다. 조선 18세기 실학자들이 진정한 학문은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사실과 맥을 같이한다.

어쩌면 르네상스 운동과 인문주의는 현실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 버린 하나님을 되찾으려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9세기 이후 중세 교회는 과도한 신학과 신비주의에 몰입되어 현실을 평가절하한다. 인문주의는 궁극적으로 삶을 도외시한 중세 교회를 향해 '사람은 누구이며 왜 살아가야 하는가' 질문을 던진 것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답이라고 할 수 있다.

3부는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대립하기도 했던 에라스뮈스를 다룬다. 에라스뮈스 영향을 단 몇 문장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몇 가지만 추려 보자. 그는 교부 문헌을 발굴하고 교정했다. 그동안 필사자들에 의해 기록된 수많은 사본이 나돌았다. 에라스뮈스는 다양한 사본들을 비교 분석하여 비평학의 지평을 열었다. 후대에 일어난 고등비평은 이미 에라스뮈스와 그 이전의 인문주의자들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는 이러한 비평 작업을 통해 그릇된 교회의 권위를 걷어 내고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주장한다. 히에로니무스 불가타 역 성경의 오류를 지적하고 폭로하여 교회의 권위를 흔들리게 했다. 이 연구는 루터와 종교개혁자의 '오직 성경으로'라는 기치에 영향을 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인문주의와 한국교회

4부를 건너뛰고 5부로 넘어가 보자. 결론에 해당하는 5부에서 저자는 네 가지 주제로 분류하여 중요한 결론을 제시한다. △헬조선에서 인간의 가치를 선포할 것 △기독교의 근원 성경으로 돌아갈 것 △세상과 소통할 것 △신학자들은 저항하는 지식으로 발언할 것이다. 네 가지로 분류됐지만 결국은 하나다. 성경으로 돌아갈 때 인간의 가치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성경으로 돌아갈 때 세속의 가치에 휘둘리지 않고 혁명적 사유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법은 교회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교리와 관행 위에 성경을 두는 것이다. 성경 앞에서 모든 것을 상대화하여 이교적 세속적 요소를 제거하고, 교회 안에서 주인 행세하는 우상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성경에 대한 진지하고 정직한, 그리고 철저한 연구와 묵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100~101쪽)

책은 목차까지 합쳐도 110쪽 분량의 소책자다. 저자가 의도하는 핵심을 잘 짚는다면, 현대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문제를 간파할 힘과 저항하는 힘을 갖게 되리라 확신한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정현욱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에레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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