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새문안교회

새문안교회는 대한민국 최초의 조직 교회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1887년 9월 27일 화요일 저녁, 서울 정동에 있는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 사랑채에서 언더우드 목사 주재하에 서상륜 등 한국인 신자 14인과 존 로스 목사가 참석한 가운데 첫 예배가 열렸다. 이는 새문안교회의 첫 예배이자 한국교회 전체 역사에서 기념할 만한 교회사적 사건이다. 이날 한 명의 교인이 세례를 받고 두 명의 장로가 선출되었는데, 이를 두고 한국의 최초 조직 교회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새문안교회는 일제강점기, 해방, 육이오전쟁, 박정희 군사독재라는 한반도 역사 흐름에서 대체로 안정적인 가운데 약간의 불안한 행보를 보여 오며 오늘에 이르렀다.

새문안교회 첫 예배당인 언더우드 목사 사랑채.

불안함이란, 일제강점기란 식민지 체제에 대응하는 새문안교회의 태도였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상황에서 새문안교회는 193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교회다움의 사명을 잘 감당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 이후로 차재명 담임목사가 전국 순회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일제의 침략 전쟁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해 8월 1일 당회에서는 이를 지지하는 내용을 결의했고, 1938년에는 교회 내에서 일본어 교육을 실시하고 내선일체 현판을 걸기도 했다. 물론 이 역시 새문안교회만의 모습으로 보긴 어렵다.

그 이후, 새문안교회는 안팎의 부침, 그 역사 가운데 때론 강경하고 때론 탈속적인 입장을 견지해 오며 오늘에 이르렀다. 김영주 목사가 1944년 3대 담임목사로 부임했고, 새문안교회는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교회를 개혁하고 정비하는 데 주력했다. 1948년부터는 농촌 계몽 운동과 의료봉사를 실시해 오다 이후, 육이오전쟁을 맞이해 커다란 고난을 겪어야 했다. 김영주 담임목사, 김규식 장로가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어 북한 땅에서 별세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1968년 창립된 새문안교회 대학생회는 군부 독재에 맞서 1970~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대학생회 목소리와 또 다른 불안의 흐름도 없진 않았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국장에서 새문안교회 찬양대가 '내 목자는 사랑의 왕'이란 찬송을 불렀으며, 4대 담임목사 강신명 목사는 기도문을 낭독하기도 했다.

이렇듯 새문안교회는 한국교회 역사의 중심에서 모체와 같은 역할을 감당했다. 비록 역사의 부침을 겪으며 탈속과 속욕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반대로 새문안교회는 도산 안창호 선생과 김규식 선생 등의 독립투사를 배출하고, 유신 시절에는 민주화 운동 집회지가 되면서 한국 사회의 아픔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이는 새문안교회가 한국 사회와 이념적·정서적 열망을 같이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새문안교회는 정교의 조화와 무게를 함께 감당해 온 것이며, 그러한 조화의 흐름엔 예배당 변천사가 그 궤를 같이한다.

근대화를 향해

새문안교회는 모두 여섯 번 예배당 변화를 맞이했다. 그 첫 번째 예배당은 1972년 예배당으로 개축되기까지 신문로에 자리 잡아 뿌리내린 곳으로 염정동의 이른바 '벽돌 예배당'이다.

1907년 신문로 새문안교회 자리에 일화 4000여 원을 들여 1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건축을 시작한 염정동 '벽돌 예배당'은 1910년 5월 22일 완공되었다. 당시 교인 300명을 헤아리는 새문안교회에서는 나름의 도전이었다고 볼 수 있는 '벽돌 예배당'은 한국교회가 서양식 문명을 적극 받아들여 근대화의 틀을 일궈 내는 데 지향점을 두고 있다. 고전적 한국미를 고집하기보단 이질감을 무릅쓰고도 새로움의 편입을 열망한 것이다.

1910년 완공된 새문안교회 벽돌 예배당. 새문안교회 홈페이지 갈무리

'벽돌 예배당'은 지금의 종교교회와 세브란스병원을 설계한 캐나다 건축가 헨리 볼드 고든의 작품이다. 그가 보여 준 분명한 특징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돌 예배당을 한국교회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점이다. 당시 이러한 로마네스크 양식 예배당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교회 양식으로는 명동성당 정도가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새문안교회 예배당은 1949년 '종탑'을 좌우에 세우고, 1957년 예배당 전면 하단에 '굴다리형 계단'을 증축하는 등 몇 번의 개축 과정을 거쳤다.

굴다리형 계단 증축을 비롯해 새문안교회 예배당 리모델링에 참여한 건축가는 한국 건축계 거장 김중업 씨다. 김중업 건축가 설계로 예배당 입구는 세 개의 붉은 벽돌 조적의 아치 구조로 변형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본래 벽돌 예배당의 건축 미학 변경으로 연결되기보단 본당 내부의 모더니즘적 성격 강화로 봐야 한다. 새문안교회가 견인하고자 하는 지향 축이 근대화였음을 더욱 견고히 하는 대목이다.

이러한 조화의 출발점에서 새문안교회 예배당은 또 다른 혁신을 맞이하게 된다.

동서양 문화의 조화

이후, 새문안교회 예배당은 새로운 예배당으로 거듭난다. 완전히 새로 탄생했다. 교회 건축의 새로운 화두를 던진 것으로도 유명한 새문안교회 예배당의 해체와 신생은 1972년 완공되는 새예배당 출범으로 본격화한다. 이 예배당은 유학파 황손으로도 잘 알려진 건축가 이구李玖가 설계했다. 모더니즘 배경에 한국 전통의 정신적 은유를 얹힌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24개 십자 기둥이 24장로를 표현하는 등 기독교적 상징을 극대화했으며, 예배당 안으로 극미하게 스며드는 최소 채광은 카타콤의 환경적 억압과 신비를 의도했다. 또한 전면으로 구성된 창은 전통 아 자 창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것인데, 전통 서양 건축 양식에 한국적 전통미를 가미한 옛것과 새것의 조화를 도모했다는 점이 돋보인다. 지난 시간, 한국교회는 서구 양식의 무분별한 도입이 곧 근대화라는 공식을 일종의 금과옥조로 받아들여 왔다. 그러한 측면에서 1972년 완공된 새문안교회 예배당은 새로운 근대성을 향한 진일보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서구 양식 바탕에 한국적 미를 부가해 옛것과 새것의 조화를 구현해 또 하나의 모더니티를 창출한 것이다.

1972년 완공된 새문안교회 예배당 전경. 새문안교회 홈페이지 갈무리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亞 자형 창이 전면에 보인다. 1972년 완공된 예배당의 특징적 요소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또 한 번의 신생을 향해
– 새로운 예배당은 현재 진행 중

새문안교회는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라는 상징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교회 및 세상 역사와 큰 보폭을 함께하는 균형추 역할을 감당해 왔다. 그 조화의 표현력은 예배당 변천사를 통해서도 적실히 확인된 듯 하다. 의도하든 않든 새문안교회는 '근대화'란 화두가 한국 종교 시설에 어떤 의미로 자리매김해야 하는지를 선도해 온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새문안교회가 한국교회에서 차지하는 종교사적 무게감, 그 영적 지분을 쉽게 외면할 순 없을 것이다.

근대화 흐름을 또 다른 전통의 고루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움을 향한 갱신 가능성으로 선도해 온 새문안교회는 이제 또 한 번의 변화를 진행하고 있다. 1972년 완공되어 85주년을 기념해 세운 예배당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새 예배당 건축을 결의한 것이다.

현재 새문안교회 예배당은 공사 중에 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교회 부지 바로 옆에 있는 언더우드교육관. 현재 새문안교회는 이곳에서 매주 예배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새문안교회는 예배당의 직능적 한계를 고민해 오다 보존이 아닌 해체와 신생이란 또 한 번의 선택을 긍정했다. 본래 2017년 완공 예정이지만 아직까지 공사가 진행 중인 현재의 새문안교회 예배당은 지상 13층 지하 5층 규모로 적지 않은 위용을 과시한다. 이러한 교회 건축 결심 배경은 교인 수의 절대 팽창이라는 불가피한 이유가 아니다. 미래 가치를 선도해야 한다는, 한국교회를 선도하겠다는 새문안교회다운 의지에서 발화한 비전으로 읽힌다. 또한 그 미래 가치 견인의 중심엔 한국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새문안교회가 차지하는 조화와 무게의 지분이 강하게 작동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긴다. 과연 새문안교회가 이번 예배당 건축을 통해 또 한 번의 신생 가치를 선도할 수 있을까.

2018년 11월 초 새문안교회 예배당 공사 현장. 지하 5층 지상 13층 규모로 완공될 예정이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의문과 두려움이 지워지길 기도하며

한국 사회에서 나름 일가를 이룬 건축가들이 새문안교회 새 예배당 설계에 참여했다. 이들은 규모보다는 상징과 은유, 공공성에 초점을 맞췄다고 밝혔다. 새 예배당이 지닌 상징과 은유의 궁극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분명히 한다. 부드러운 곡선 형태 벽면은 마치 어머니가 양팔을 벌린 느낌으로 하나님의 따뜻한 품을 상징하며, 빛의 향연으로 가득한 벽면은 태곳적 하나님의 빛을 연상케 하며 새문안교회가 앞으로도 세상과 교회에 빛의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의지를 담아낸다. 그 빛은 66.3m 위 건물 꼭대기에서 외벽을 타고 내려와 내부 본당 강단에까지 이어질 계획이다.

물론 멋지다. 아니, 멋질 것이다. 프랑스의 현대적 상업 지구 '라 데팡스' 외관같이 새문안교회의 새 예배당 역시 광화문에 자리 잡은 오피스 빌딩들과 스카이라인을 같이하는 세련된 자태를 뽐낼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과시가 지금까지 새문안교회가 보여 준 교회와 세상, 교회와 역사 사이에서의 조화와 무게를 선도하는 또 하나의 포석으로 보긴 어렵다는 우려가 생긴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주도한다는 명제에 대한 재고가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 교회는 이제 세상을 선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세상이 말하는 상식과 보폭을 맞추며 지금까지 학대받아 온 낮은 자들의 신음 소리를 듣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낮은 자들이 양산된 비극 바탕에는 한국 사회의 고속 성장, 맘몬의 창궐로 자행된 영혼 학살극에 교회가 가담해 온 착취의 가해성이 있음을 결코 외면해선 안 되는 것이다.

공사가 진행 중인 새문안교회 새 예배당 앞면(위)과 뒷면(아래). 뉴스앤조이 최승현

지금도 여전히 한국교회에서 새문안교회가 차지하는 영적 지분은 심대하다.

혹시라도 그 영적 지분을 유지하려는 강박 내지는 권력화하려는 의도로 새 예배당 건축을 결심했다면 향후 초래하게 될 시대착오적이란 비난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심히 의문이다.

빛의 역할을 선도하겠다며 나선 새문안교회의 새로운 시도, 현대성의 첨단을 포용하면서도 새로운 공공재로 거듭나 서울 중심가에 잊지 못할 랜드 마크로 우뚝 서겠다는 야심이 자칫 잘못해 그저 그런 물신주의의 산물로 전락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떨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필자는 기도한다. 정말이지 이러한 두려움은 우매한 필자만이 갖는 기우이길 말이다.

소설가 주원규 목사가 '예배당 건축 기행'을 격주 간격으로 연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기사(바로 가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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