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시대와 우리가 사는 현시대를 비교하며, 거시적 접근을 통해 선교적 교회 운동 '교회의 새로운 표현들'이 출현한 이유인 '변화'에 대해 언급하려 한다. 필자는 한동안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 마누엘 카스텔의 정보 시대 3부작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정체성의 힘>·<밀레니엄의 종언>, 다니엘 벨의 <탈산업사회의 도래>,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같은 사회 이론가, 미래학자가 쓴 글을 탐독했다. 예전에는 교회가 이 거대 담론과 상관없는 그룹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니엘 벨의 역작 <탈산업사회의 도래>가 탈산업사회 분류, '전 산업사회-산업사회-탈산업사회' 도식으로 언급한 것처럼, 교회의 시대를 '전 교회 시대-교회 시대-탈교회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런 시대 구분을 수용한다면 우리는 지금 '탈교회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 '교회의 새로운 표현들'을 이해하려면 '탈교회 시대'의 3가지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문화의 변화

첫 번째는 문화의 변화다. 수십 년간 선교 사역을 한 레슬리 뉴비긴이 영국 땅으로 돌아왔을 때, 영국은 더 이상 이전에 뉴비긴이 살던 그 영국이 아니었다. 그 중심에는 '문화의 변화'가 있었다. 변하는 세상 문화 가운데 교회 공동체가 어떤 언어적·문화적 매개체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것인가 하는 이슈가 제기됐고, 뉴비긴은 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깊이 있게 고민하게 됐다. 복음과 변화하는 문화의 긴장감을 해결하기 위한 '문화의 상황화'(contextualization)가 대두했다.

뉴비긴은 진정한 상황화를 위해 종교 혼합주의를 배격한 상황에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참여하기 위해 교회의 벽 안에만 머물지 말고 세상의 일상의 비지니스에 참여해야 한다"1)고 언급했다. 탈교회 시대에 신자들에게 더 이상 교회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선교적 마인드를 갖고 일상의 문화로 나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 뉴비긴은 복음이 문화라는 옷을 입고 전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뉴비긴은 기독교 신학을 "세상에서 그에 걸맞게 살아가려는 공동체 안에서 개발된 일종의 합리적 담론"2)이라고 말한다. 즉 타자를 떠나 사사화한 기독교 신학은 있을 수 없다.

'교회의 새로운 표현들'이 변하는 문화 안에 사는 사람들이 내는 '공공의 목소리'에 경청하는 이유도 레슬리 뉴비긴의 견해처럼 공동체성 안에서 합리적 담론과 소통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경청은 마음의 문을 열고 타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대화의 시작점이다. 뉴비긴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 소통·교제·경청하셨기에 공동체로 보냄 받은 우리도 성자 예수님의 성육신을 본받아 문화적 매개체로 지역 사람들과 깊은 만남을 가져야 한다고 언급한다.

필자가 최근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는 북미 대럴 구더(Darrell L. Guder)가 주도한 The Gospel and Our Culture Network 그룹이 시작한 '선교적 교회 운동'(the Missional Church Movement)과 영국에서 시작한 '교회의 새로운 표현들'에 대한 신학적·선교학 근거가 되는 '선교형 교회'(Mission-shaped church)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 것이냐는 질문이다. 두 가지를 비교해 놓은 표를 보라.

'선교적 교회 운동'과 '선교형 교회 운동'은 시작 시점과 시작 그룹이 다르다.3) 하지만 선교적 교회론,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삼위일체 신학을 강조하고, 특히 포스트모던 문화와 후기 기독교 사회 안에서 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향해 관심을 둔다는 공통점이 있다.

필자가 다양한 '교회의 새로운 표현들'을 연구하고자 영국을 방문했을 때, 잉글랜드 요크대성당(York Minster) 근처 이탈리아 식당에서 '교회의 새로운 표현들' 운동 파이어니어 영국 성공회 그레이엄 크레이 주교(Bishop Graham Cray)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필자는 질문을 던졌다.

"미국에서 시작한 선교적 교회 운동과 영국 선교형 운동의 관계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는 대답했다.

"선교형 교회 운동은 미국 선교적 교회 운동을 염두하고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두 운동은) 레슬리 뉴비긴이라는 신학적·선교학적 공통점, 같은 신학적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레이엄 크레이 주교가 언급한 것처럼 변화하는 문화 안에서 복음을 어떻게 전할것인가 하는 고민으로 시작한 두 선교적 운동은 긴밀한 관계가 있으며, 특히 레슬리 뉴비긴이라는 공통의 신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필자는 이런 점에서 '선교형 교회'도 '선교적 교회' 운동의 모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선교적 교회 운동 대표 주자들은 "교회는 멤버를 늘리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역사 안에서 하나님과 파트너십을 이루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해야 한다"4)는 뉴비긴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노력한다. 레슬리 뉴비긴 신학 안에서 '교회의 새로운 표현들'은 문화의 변화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있다.

사회의 변화

두 번째는 사회의 변화다. 한국 사회는 1960~1990년대에 사회경제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경제뿐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등 거의 모든 사회 문화 영역에서 급성장했다. 기독교도 예외 없이 양적 '압축 성장'을 이루었다. '압축 성장'에 따르는 부작용도 있었다. 이를 간과할 수는 없다.

교회 대형화는 다양한 사회적·종교적 부작용을 낳았다. 필자는 이번 글에서 그 부작용을 다루고 싶지는 않다. 다만 첫 번째 글에서 언급했듯이, 변화하는 문화 안에서 교회는 소품종 대량생산과 표준화를 강조하면서 모던 문화를 따랐던 기존의 맥도날드화 교회를 극복하고, 포스트모던 시대에 걸맞는 다품종 소량 생산(강소 교회)과 다양성에 초점을 맞추는 탈맥도날드화 교회가 되기 위해 도전적 시도를 해야 한다. 필자는 이 도전적 시도를 '선교적 상상력'(missional imagination)이라고 정의한다.

1990년대 후반 이후 한국교회는 한국 경제 상황처럼 '압축 쇠퇴'를 경험하고 있다. 필자가 한국에 귀국한 후,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는 "서양에서 배워 온 학문과 실천을 한국교회와 사회 안에 잘 적용할 수 있겠는가"였다. 문화적 차이가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이다. 문화적 차이는 분명이 있다. 그러나 거시적 차원에서 필자는 공통점을 발견했고, '교회의 새로운 표현들'의 필요성에 주목한다. 필자는 한국교회의 압축 성장, 압축 쇠퇴 시대와 서양의 기독교 국가 시대(Christendom), 후기 기독교 시대(Post-Christendom) 분류와 공통점을 언급하고자 한다. 아래 표는 서양 사회와 한국 사회의 변화를 비교한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는 서양 기독교 국가 시대와 유사한 특징이 있는 '압축 성장' 시대를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교회 압축 쇠퇴' 시대에 살고 있다. 압축 쇠퇴 시대에 교회는 사회에서 문화적으로 주변부지만 더 심각한 것은 도덕적으로 뛰어나지 않아 도덕적으로도 주변부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압축 쇠퇴 시대에 우리에게는 수직적이고 경직된 압축 성장 시대 세계관과 실천을 버리고 마음을 열고 경청하며 소통하는 선교적 사역의 실천이 요구된다. 대형화와 동원적 선교를 압축 쇠퇴 시대에 적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지역사회와 공동체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 성육신적 겸손함으로 종교성 없는 사람들과 교회에 실망한 가나안 교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대상의 변화

탈교회 시대, 압축 쇠퇴 시대에는 기독교에 관심이 없거나 교회·목회자·교인에게 실망해 교회를 떠난 많은 가나안 교인을 목격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학자가 언급한 바 있다. '교회의 새로운 표현들'의 관심 대상은 교회당에서 기다리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도 없고 교회에 올 가능성이 없는 사람(unchurched people)과의 만남에 흥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믿음은 있는데 다양한 이유로 기독교에 실망해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가나안 교인(de-churched people)에게 다가가고자 노력한다.

압축 쇠퇴 시대에는 더 이상 믿는 것(believing)과 교회 출석하는 것(belonging)은 함께 가는 것이 아니다. 가나안 교인의 폭발적 성장은 압축 쇠퇴 시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 이 특징은 한국 사회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이 아니며, '교회의 새로운 표현들'이 시작한 영국 교회들도 가나안 교인의 성장을 주목하며 그들을 다시 교회로 이끌 실천 방법을 찾고 있다. 영국의 처치아미(Church Army)에서 '교회의 새로운 표현들'을 연구하고, 영국 더럼대학(Durham University) 세인트존스칼리지(St John's College)에서 가르치는 조지 링스 박사(Dr. George Lings)는 '후기 기독교 시대'의 전도 대상을 네 가지로 분리하고 있다.

'주변인'과 '열린 가나안 교인'은 한국교회 압축 성장 시대에 많이 있는 그룹이었다. 주변인은 이미 교회에 긍정적 관심이 있기 때문에 예배에 초대하면 됐고, 열린 가나안 교인은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대화를 통해 교회에 초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압축 쇠퇴 시기를 보내면서, '교회에 올 가능성이 없는 사람'과 '닫힌 가나안 교인'이 크게 성장하게 됐다. 기존의 전통적 교회 전도 방식으로는 이들에게 다가가기 어렵게 됐다. 그래서 '교회의 새로운 표현들'은 압축 쇠퇴 시기에 3~4번 그룹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이 그룹이 사는 공동체로 직접 다가가 선교적·성육신적 교회로서 경청·사랑을 통해 신뢰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교회의 새로운 표현들'은 위의 언급처럼 세 가지 변화를 고려한다. 문화·사회·대상의 변화다. 세 가지 변화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긴밀한 상호 관계를 맺고 있다. 문화는 '모던 문화'에서 '포스트모던 문화'로 흘러가고 있으며, 사회는 압축 성장 시대에서 압축 쇠퇴 시대로 변하고 있다. 이 변화의 시대에 '교회에 나올 가능성이 없는 사람'(unchurched people)과 '닫힌 가나안 교인'(closed dechurched people)이 크게 증가하는 중이다. 그들에게 나아가기 위한 대안적 교회 모델 '교회의 새로운 표현들'이 성장하고 있다.

1) Lesslie Newbigin. 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9), 205.

2)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홍병룡 역 (서울: IVP, 2007), 284.
3) 선교적 교회 운동은 The Gospel and Our Culture Network라는 그룹에서 시작됐지만, 선교형 교회는 잉글랜드 교단 성공회 사회와선교위원회에서 시작되어 교회 생태계 안에서 교단과 '교회 새로운 표현들'의 공생 및 협력 관계에 주목하는 '혼합 경제'(mixed economy)를 강조한다.
4) Edited Darrell L. Guder. Missional Church: A Vision for the Sending of the Church in North America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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