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정농회正農會는 1976년, 건강한 땅과 바른 먹거리를 고민했던 농민들이 만든 단체다. 이들은 일찍부터 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는 유기농업을 고집했다. 화학물질은 지금 당장 생산력 증대에 도움이 되지만 길게 보면 땅을 망가뜨리고 인류와 자연을 해친다고 봤다.

정농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일본에서 유기농을 시작하고 농민 단체 애농회愛農會를 조직한 고다니 준이치 선생이다. 그는 일제가 36년간 조선에 저지른 만행을 사죄하는 마음으로 한국 농민에게 유기농업을 전수했다. 1975년 고다니 준이치 선생이 처음 방한했을 때, 현 정농회 주형로 회장은 고등학생이었다. 10월 25일, 충남 홍성군 홍동마을에서 만난 그는 그날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70대 백발노인이 강단에 올라서더니 한참 땅만 쳐다봤다.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흘리던 그는 일본이 그동안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고 한탄했다. 사죄하는 심정으로 한국을 위한 조언을 드리고 싶다고 했다. 한국 농민이 비료와 농약, 제초제를 금하고 유기농을 시행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유기농'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할 때였다. 농민들은 고다니 준이치 선생의 뜻을 받아들여 정농회를 만들었다. 대다수가 개신교인이었던 이들은 정농회의 정신을 성서에서 찾았다. "하나님의 생육 번성케 하시는 일에 순응하기 위하여 바른 농사正農에 정진한다." 정농회 제1강령이다.

주형로 회장은 "우리는 기독교 농민들이 신앙을 바탕으로 만든 단체다.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말했다. 정농회는 창립 초기 신앙 공동체 성격이 강했다. 정농회 초대 회장 오재길 옹이나 풀무원 원경선 원장(1914~2013)은 모두 류영모나 함석헌에게 영향을 받은 이들이다.

주 회장은 "그때는 아주 엄격했다. 모두가 엄숙한 마음으로 농사에 임하니 막걸리 한잔도 입에 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기도와 묵상 역시 농사일 못지않게 중요시했다. 지금은 세월이 지나면서 분위기가 유연해졌다. 기독교와 관련은 없지만 유기농과 생태 농업에 관심이 있어 가입한 농민도 많아졌다.

화학 농업만 무성했던 척박한 땅에 생명·생태 농업, 유기농업이라는 씨앗을 뿌린 지 수십 년. 지금은 집 앞 가게에서도 유기농 식품을 쉽게 구할 수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 결실을 보았다. 올해 창립 42년을 맞는 정농회는 '다시 40년'을 외치고 있다.

김영남 씨(왼쪽부터), 주형로 회장, 조대성 씨. 카메라를 드니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농촌 고령화, 청년 농부 육성 고민
'토지 공유화 제도' 공부
정농영농조합 창설

과거에는 화학 농업이 과제였다면 지금은 '농촌 고령화'가 심각하다. 그나마 여건이 나은 홍동마을에서도 내년에 환갑을 앞두고 있는 주형로 회장이 농부들 사이에서는 중간 축에 속한다고 하니, 일반 농가는 30~40대 농부를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도시에 있는 청년들은 농촌에 터를 잡기도 어렵다. 농업으로 먹고살려면 적어도 수백 평을 빌려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20~30대가 그만한 자본을 구하기 어렵다. 어느 정도 땅을 개간하고 농사에 적응했어도 임대 기간이 3~4년밖에 안 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정농회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지 공유' 모델을 떠올렸다. 정농회가 토지를 대량 확보해 청년들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장기 임대하는 방식이다. 일정 토지를 공유재로 확보해 놓으면 고소득자에게 토지가 몰리는 양극화 현상도 방지할 수 있다. 토지 공유 사례는 국내에도 흔하지 않다. 대표적으로 생활협동조합 '한살림'이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에 마련한 3300평 'DMZ 평화 농장'이 있다.

정농회는 2016년부터 토지 공유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헨리조지포럼·희년함께·토지+자유연구소 전문가를 초빙해 '토지 공유화 제도' 강의를 듣고, 국내외 토지 공유 모델 사례와 공익 토지 신탁, 농지 공적 관리 등을 공부했다. 이를 바탕으로 올해 7월 정농영농조합(주형로 대표)이 탄생했다.

정농회는 풀무학교 홍순명 교장이 내놓은 8000만 원을 초기 자본금으로 삼고 충남 홍성군 홍동마을 내 1200평 땅을 매입했다. 주 회장도 집안 대대로 농사를 짓고 있는 땅에서 400평을 정농회에 기부했다.

정농 청년 농부 선정
싼 값에 장기간 토지 임대
청년들 '패자부활전' 지원
농업에 필요한 지식·노하우 공유

정농회는 올해 3월 조대성 씨(42), 김영남 씨(32)를 각각 1·2호 '정농 청년 농부'로 지정했다. 이들에게 각각 600평을 10년간 빌려주기로 했다. 1년 임대료가 200평당 쌀 한 가마니 값이다. 시중에 유통되는 가격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19만 원이다. 유기농 쌀을 기준으로 하면 26만 원까지 올라간다. 주형로 회장은 일반으로 할지 유기농으로 할지는 조 씨와 김 씨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말하며 웃었다.

서울에서 명문대를 다녔던 조대성 씨는 2018년 홍동마을에 처음 발을 들였다. 2012년, 직장을 그만두고 홍성 풀무학교에서 농업을 배운 그는 그곳에서 만난 지인들과 농사를 시작했다. 현실은 쉽지 않았다. 몇 번의 실패를 경험하면서 2년간 무직으로 지낸 적도 있었다. 그러던 중 홍성에 있을 때 알게 된 주형로 회장이 그의 사정을 알고 정농 청년 농부를 권했다.

김영남 씨는 사연이 많은 청년이다. 그는 함경북도 온성군 출신이다. 북한을 이탈한 지 10년이 됐지만 그의 말투에는 아직 고향 흔적이 남아 있다. 그는 남한에서 뚜렷한 목표를 정하지 못한 채 20대 초반을 방황하며 보냈다. 큰 교통사고로 3년간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깨달았다.

이후 여명학교에서 만난 선배의 조언으로 축산을 공부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그동안 모은 2000만 원과 어머니에게 빌린 1000만 원으로 양돈장을 시작했다. 세상은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지역 유통 업체 농간으로 오히려 수천만 원 빚을 떠안은 채 사업을 접었다. 그러던 중 이전에 실습으로 나갔던 농장에서 알게 된 주형로 회장과의 인연으로 정농회 지원을 받게 됐다.

주형로 회장과 조대성 씨가 하우스 구조를 놓고 얘기하고 있다. 부자지간처럼 가까워 보였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농촌은 일확천금을 꿈꾸기 어려운 곳이다. 쌀값은 20년째 오르지 않고, 다른 농작물은 매년 가격이 유동적이라 성공과 실패를 예측하기 어렵다. 주형로 회장은 "귀농했던 젊은이들이 도시에서 벌었던 것을 생각하며 무모하게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농사에 실패하고 빚쟁이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정농회는 단순히 땅만 싼값에 빌려주는 게 아니다. 청년들이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고, 학교 강의나 책에서 배울 수 없었던 노하우를 익힐 수 있는 디딤돌이 되어 준다. 조대성 씨는 "사람들은 농사가 단순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생각보다 복잡하고 전문적인 분야다. 품종도 다양하고 토양도 지역마다 다르다. 생산부터 유통, 시장까지 공부해야 할 게 많다"고 했다.

그는 전문 기관에서도 배울 수 없던 경험을 정농회 선배들에게 얻는다고 했다. 그는 "지자체에 청년 농부 육성을 위한 제도가 없는 건 아니다. 창업 자금을 지원하거나 농업 교육을 시행하는 곳도 많다. 정농회가 특별한 건, 기관에서 배울 수 없는 지혜를 공동체에서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고 했다.

김영남 씨는 막상 귀농을 선택했을 때 가장 걱정했던 것 중 하나가 지역 텃세였다. 양돈장을 운영하면서 이미 지역 유통 업체 텃세를 경험했던 그였다. 그러나 정농회가 있는 홍동마을은 인심이 후하고 사람들이 따뜻했다. 그는 "아직 나이가 어리지만,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은 말뿐이었다. 도와주겠다고 말만 했지 행동은 없었다. 하지만 이곳 어르신들은 다들 자기 일처럼 여기고 나서 준다"고 했다.

왼쪽이 조대성 씨의 비닐하우스. 오른쪽 빈 땅에는 내년 김영남 씨가 비닐하우스를 지을 예정이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토지 공유 모델 많지 않아
외연·내연 다지는 데 집중

이제 막 '토지 공유'를 도입한 정농영농조합은 청년 농부 육성 외에도 외연을 넓히고 내연을 다지는 데 집중하고 있다. 회원들이 갹출해 기금 3000만 원을 마련했지만, 개인이 농사를 지어 먹고살 수 있는 규모로 토지를 매입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정농회는 희년함께·자연환경국민신탁 등 여러 시민단체와 함께 '토지 공유' 사업과 취지를 알리고 관련 세미나를 열어 기금을 확충할 계획이다.

정농회의 '토지 공유' 모델은 국내에도 흔한 사례가 아니다. 평생 땅만 보고 살았던 정농회 회원들이 조합을 만들어 토지 신탁사업을 진행하는 것도 처음이다. '혹시나 조합이 초심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토지 공유 모델이 부작용을 발생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이도 있다.

정농영농조합 황윤미 사무국장은 "당분간 회원들이 이 모델을 소화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계속 공부해서 토지 공유 모델을 정비하고 지역 농민 단체와 협력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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