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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과 리얼리즘 사이에서
[예배당 건축 기행] 아트교회를 통해 본 임대 예배당의 새로운 가능성
  • 주원규 (bay3135@hanmail.net)
  • 승인 2018.10.26 15:00

2011년 겨울에 시작해 2018년 오늘까지 버티고 있는,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카이캄) 소속의 아트교회는 작은 교회다. 작은 교회의 정의를 공간과 상대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볼 때, 작은 교회는 문자 그대로 인원수가 대형 교회에 비해 적은 교회를 말한다. 여기에 대형 교회나 준대형 교회와 비교했을 때 작은 교회를 말하는 기준은 자가 건축물과 임대 건축물의 구분으로 분류될 것이다.

그런 잣대로 볼 때, 아트교회는 명백히 작은 교회다. 아트교회는 2011년 겨울, 제법 큰 규모에 내실까지 갖춘 성결교회로부터 분립해 나왔다. 이후 2014년 하반기까지 고정된 교회 공간 없이 카페, 음식점, 모임 전문 공간 등을 시간당으로 빌려 가며 예배를 하다가 2014년 겨울에 서울 강남구 신사동 지하 공간을 임대해 오늘에 이르게 된다. 10명 남짓한 고정 출석 교인을 중심으로 시작한 아트교회는, 입소문만으로 찾아온 이들이 하나둘 정착하면서 현재는 서른 명 남짓한 인원의 교회 공동체가 되었다.

강남구 신사동 지하 공간을 시작으로, 2018년 현재 충무로로 임대 공간을 이전한 아트교회는 근린생활시설 건축물에 40평 남짓한 공간을 보증금 얼마, 월세 얼마의 형식으로 계약해 사용하는 임대 교회다. 이러한 조건은 리얼리즘 측면에서 한국교회 절대다수가 실감하는 교회 형태와 유사하다. 유사하다는 것은 한국교회 대부분이 공유하는 비슷한 고민이 담겨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임대로 예배당을 사용하는 다수의 교회가 품은 고민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비전에 대한 고민이다. 이때 언급된 비전은 자연스럽게 교회다움을 향한 고민과 직결된다.

비전을 수립하고 교회다움을 고민할 때 그 뿌리가 규모와 조직에 대한 염두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게 솔직한 현실이다. 이면을 들여다보면 '비전'이란 키워드는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현실적 목표가 아니라 팍팍한 현실을 잠시 잊게 해 주는 마취제로 작동되는 게 대부분이다. 아울러 그 비전을 교회다움의 기준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가 스며들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교회 비전은 겉으로 '하나님', '사랑' 등을 말하지만 그 실체는 리얼리즘의 견고한 바탕을 향한 도전 내지는 타협이란 올가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이렇듯 다분히 비현실적 선동으로 윤색되어 가는 비전과 그 비전의 성취 여부를 진단하게 해 주는 리얼리즘 사이에서 그럭저럭 임대 교회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교회로서 아트교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18년 현재 아트교회는 충무로에서 40평 남짓한 공간을 임대해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진 제공 아트교회

노마디즘1)

아트교회는 공동체 구성원의 진화를 거듭해 왔다. '아트교회'란 교회 이름만 봐도 유추 가능하듯, 초기 아트교회 구성원은 클래식 아티스트 등 예술인 위주였다. 이른바 특성화 교회 형식을 갖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트교회는 눈에 보이는 예술 행위와 상관없어 보이는 이들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직업, 나이, 주거지, 취미, 관심사, 심지어 정치 성향, 종교적 신념의 스펙트럼까지 상이한 이들이 모여든 것이다.

특성화된 전문 예술인들의 모임으로 시작한 교회가 초대교회 당시 안디옥교회처럼 진화할 수 있었던 저변엔 역설적으로 노마디즘이 교회다움의 바탕으로 자리 잡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철학적 함의를 넘어서서 삶의 자리를 말해 주는 의미로서 노마디즘은 정착 프레임을 넘어 떠돌이 상태의 지속을 강조한다. 유랑, 나그네 정신에 뒤따르는 필연적 결과는 내부 공간을 구성한 정서에 적실히 반영된다. 아트교회의 내부 공간은 고정된 전통을 넘어서려는 플럭서스2) 미학으로 채워져 있다. 이는 단지 정신세계에만 머무르지 않고 점유하는 공간에 그대로 발현되는데, 그 특징은 최소주의와 가변성으로 대표된다.

최소주의와 가변성

아트교회 내부 공간은 당장 내일이라도 철수할 것처럼 미니멀하다. 한마디로 교회로 볼만한 게 없다는 뜻이다.

아트교회는 흔히 기본적으로 생각할 법한 종교 시설다운 쓰임새가 보이지 않는다. 강대상, 십자가, 의자, 기타 예전禮典과 관련한 시설이 그 흔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비단 종교 시설다움의 소거를 넘어서서 공간 전체의 비움으로 확장된다. 공간 전체가 여백과 비움의 여지로 충만한 것이다. 이는 단지 작은 공간을 실효성 있게 사용하려는 공간 정리와는 그 개념이 다르다. 점유하는 공간 자체를 여백이란 의미로 받아들이고, 그 여백의 진공상태 자체를 정신적 예전의 한 형식으로 받아들이는 최소주의가 표현된 것이다.

아울러 아트교회의 내부 공간은 상황과 콘셉트, 그 공간의 쓰임새에 따라 언제든 수월하게 대치 가능한 가변성을 갖추고 있다. 아트교회는 그 초창기부터 공간을 전시회, 미니 음악회, 미니 콘서트, 각종 인문학 모임으로 활용해 왔다. 이는 공간을 사용하는 구성원들의 사용 범위를 최대한으로 확장하고 공동체의 유휴시간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편에서 시작된 가변성의 극치다.

아트교회는 종교적 포교 목적을 최대한 배제한 채 탈종교화한 문화 예술 행사를 쉼 없이 계속해 왔다. 이로써 공간의 가변성이 언제든 가능할 수 있는 유연한 공간 구성에 집중되는 효과를 이끌어 냈다. 이때의 가변성 역시 공간을 단지 효율적으로 사용하자는 의도 차원을 넘어선다. 아트교회의 가변성은 공간, 그 공간을 점유한 사용자, 그곳을 통해 흐르는 다양한 미학적 직관에 경도되는 향유자들이 자연 발생적으로 일궈 내는 찰나의 표현에 방점을 찍는 표현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아트교회는 노마디즘에서 비롯된 최소주의와 가변성의 변주를 창조적으로 변주해 가며 교회로서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교회다움의 지속 가능성을 노마디즘에 근거한 것인데, 이 경우 아트교회는 노마디즘 안팎에 대한 사유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낸다.

외면적 노마디즘은 사실상 리얼리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아트교회는 내면의 의도와는 별개로 적은 인원이 모이는 작은 교회다. 그런 작은 규모의 이들이 이끌어 내는 찰나적 표현들의 중첩, 그 어우러짐으로 태동한 노마디즘이 곧 교회다움으로 발전된 것이다.

이 경우 다시 '비전'이 떠오른다. 과연 비전과 노마디즘은 어울릴 법한 조합인가.

아트교회는 공간을 전시회, 미니 음악회, 각종 인문학 모임 등으로 활용해 왔다. 사진 제공 아트교회

탈종교성을 통해 종교성 발견하기

비전은 꿈, 환상을 대표한다. 마인드 컨트롤의 주요한 작동 기제로 작동되기도 한다. 한국교회 성장 과정에서도 비전은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비록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별로 상관없다 하더라도 비전은 교회를 다닌 이들에게 종교의 신성이 헌사해 주는 전리품을 대신한다. 꿈과 희망, 거기에 죄책의 면죄부까지. 비전은 한국교회를 성장케 하고 더불어 지속 가능하게 하는 엔진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교회 작동 기제가 되어 버린 비전의 모토에 노마디즘을 접합해 보면 상황이 특이해진다. 그 나름의 철학적 거창함과는 별도로 노마디즘은 리얼리즘 관점에서 보면 교회 존립에 두 가지 심각한 근심거리를 낳는다. 노마디즘을 지속할 경우 과연 교회 운영이 가능할지에 대한 대단히 현실적인 근심이다. 그 근심거리는 소용돌이와 같이 그다음 근심을 이끌어 낸다. 과연 교회다움으로 노마디즘을 말하는 게 가당키나 한 걸가. 교회다움 자체를 훼손하는 비종교성, 세속화의 굴레로 연결되지는 않을까 하는 근심에서 그렇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가진 공간이 처한 딜레마는 바로 이 지점에 뿌리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전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목표는 또렷해진다. 그 목표는 어떤 종류라 해도 결국 공간 점유의 필연성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거기에 공간에 대한 장엄성과 성스러움까지 들먹거리면 가히 점입가경이다. 공간이 교회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품어야 하는 최후의 보루를 갖춰야만 한다고 단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노마디즘이 비전의 자리에 비교적 강고히 파고들면 국면이 달라진다. 욕구 성취의 수단인 목표를 뒷받침하는 비전의 틈새에 '아무것도 아닌 그 모든 것'이란 수식어로 표현 가능한 유랑의 정신으로 대표되는 여백의 극대화가 제시될 경우 교회는 그 스스로 '최후의 보루'로 간주해 오던 교회다움을 담은 공간 점유에 대한 무위 역시 교회다움의 하나로 수용할 용의에 눈뜨게 된다. 아트교회가 보여 준 탈종교성과 종교성 사이에서의 모호한 줄타기,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는 상태를 비전과 리얼리즘 사이에서 벌어지는 또 하나의 교회 양식으로 볼 여지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트교회는 클래식 아티스트 등 전문 예술인들 모임으로 시작했다. 사진 제공 아트교회

비전과 리얼리즘 사이에서

'예배당 건축 기행' 칼럼을 시작할 때,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이 떠올랐다. 이 칼럼이 어느 정도 사람이 모이고 전통도 그럴듯하게 쌓인 대형이나 준대형 교회 건축물, 소위 부르주아 미학만을 다루는 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다. 하지만 서두에서도 밝힌 것처럼 오늘의 한국교회 대다수는 임대 시설에 예배당을 꾸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건축미학에 대한 고민은 먼 나라 얘기처럼 자리 잡은 게 현실이다.

아트교회는 오늘의 교회 현실에 대한 적절한 화두를 제시하고 있다. 막연한 비현실의 선동으로 전락한 비전을 넘어서서 냉엄한 리얼리즘을 힘 빼고 바라보는 무심함, 동시에 비전과 리얼리즘의 경계를 허물 법한 무위의 여백을 통해 고정된 틀의 한계를 비켜서는 노마디즘이 교회다움이 될 수도 있다는 한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 아트교회의 정체성이라고 읽혔다.

그런 맥락에서 아트교회는 특정 교회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이기보단 수많은 한국 임대 교회 예배당의 보통명사로 읽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비전과 리얼리즘 사이에서 어찌하든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1) 유목민의 삶과 같이 특정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사회현상을 표현하는 철학적 명제.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저작 <천개의 고원>에서 다룬 유목론에 주목한 한국의 철학자 이진경이 제시한 명제이다.
2) 1962년 독일에서 결성되어 1970년대 초까지 활동한 극단적으로 반예술적이고 실험적이었던 미술 운동 및 그 예술가들의 무리. 라틴어로 '흐름', '변화'를 뜻하며, 모든 예술적 의도는 인위적 성격을 가진다고 보고 기존의 예술과 문화를 거부하는 실험적인 작품을 시도했다.

소설가 주원규 목사가 '예배당 건축 기행'을 격주 간격으로 연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기사(바로 가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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