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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울려 퍼진 '예수 사랑하심은'
[일본 기독교 현장에서] 한일의 평화 일구는 그리스도인들
  • 홍이표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8.10.20 13:37

평양에서 들은 '예수 사랑하심은'

2016년 9월 4일 주일은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 북부 지역의 다섯 교회가 모여 '연합 음악 예배'를 하였다. 마침 그날 9월 4일은 일본에서 기념하는 '쿠라시쿠ク(9)ラシ(4)ック(classic) 음악의 날'이기도 했다. 교회마다 준비한 노래와 연주, 도시샤대학 글리클럽 학생들의 특송 등이 이어졌다. 필자가 일하던 탄고미야즈교회丹後宮津教会는 '예수 사랑하심은'主われを愛す을 불렀다. 이 찬송가는 선교사들이 일본에 소개한 최초의 서양 노래이기도 하다. 우리 교우들은 1절은 일본어로, 2절은 교토 방언으로, 3절은 한국어로 불렀다.

'예수 사랑하심은' 한일 악보. 사진 제공 홍이표

음악 연합 예배 풍경. 사진 제공 홍이표

예배가 끝나자 탄바신세교회丹波新生教会 소노베園部회당의 이마니시 노리오今西儀夫 교우(80)가 찾아와 묻는다. "방금 전 부르신 그 한글 노래 혹시 악보가 있나요?" "아, 네. 가타카나로 옮긴 게 있어요." 악보를 받아든 이마니시 상은 어색한 한국 발음으로 "예수 사란하시무 거루하신 마린세… 나 사란하신…." 이렇게 부르더니 온몸을 떨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맞아요. 바로 이 가사였어요. 아… 내가 이걸 기억하고 있네…. 기억하고 있어…."

"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왜 갑자기 우시나요?"

"아… 내가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저를 돌봐 주셨던 이덕희라는 한국인 의사 선생님이 이 노래를 늘 불러 주셨어요.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오늘 탄고미야즈 교우들이 한국말로 부르는 걸 듣고 70년 전 어린 시절로 갑자기 돌아갈 수 있었어요…. 아… 그런데 제가 이 한국말 가사를 기억하고 있네요.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맞아요. 이렇게 불렀어요!"

한동안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더니 돌아가 앉은 자리에서도 계속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친다. 일본에서도 '고향'을 잃은 사람들, 즉 실향민失鄕民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이마니시 상도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한반도로 넘어와 살았다. 그런 가족사로 인해 평양에서 태어나 소학교 2학년 때까지 자랐다. 그렇다. 이마니시 상의 고향은 평양이다.

평양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들었던 찬송가 '예수 사랑하심은'을 지금껏 몸속 뼈 어딘가에 깊이 새긴 채 살아온 것이다. 80세 노인은 한순간에 8살 소년이 되어 옛 평양의 풍경을 추억하며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돌아갈 수 없는 땅, 만날 수 없는 사람들….

패전 직후 조선과 만주에 살던 수많은 일본인은 폭력과 약탈 등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젊은 여성들은 강간을 피하기 위해 삭발한 채 마루 밑에 숨기도 하였다. 순식간에 들이닥친 소련군은 이마니시 상 가족 5명을 유자철선에 둘러싸인 수용소에 격리했다. 병사들의 총구 앞에서 모든 재산과 금품을 빼앗겼다. 하지만 "살아서 일본의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는 일념으로 가족들은 수용소를 탈출하였다. 숲속에서 노숙하며 몇 날 며칠을 걸어 38선을 극적으로 넘었고 귀향선에 오를 수 있었다.

귀국 후 우체국원이 된 그는, 정년까지 40년 이상 근무하였고 10년 전 우체국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평범한 공무원이자 시골교회를 섬기는 신앙인이었던 그는, 2년 전부터 의미 있는 사업을 시작했다. 지역신문인 <京都民報>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평양 근처에서 태어난 저는 종전 시에 8살이었습니다. 전쟁만은 절대로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절박하게 생각합니다. 전쟁 체험자들의 고령화로 그 기억들이 사라져 가는 가운데, 젊은 세대에게 그 참상을 전해 주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작년(2015)부터 '전쟁체험을전하는 모임'戦争体験を語り合う会을 시작하여 올해 8월 6일에는 교토 시내에서 행사를 개최합니다. 이렇게 세상에 나서서 정치적 발언을 하는 일은 처음입니다만, 안보 법안이나 개헌 문제 등 전쟁의 길로 다시 들어서는 게 아닌가 하는 위기감이 엄습해 옵니다. 헌법 전문과 제9조의 평화주의는 절대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참의원 선거에서는 '평화를 지키라!'平和を守れ는 시민의 소리에 응답해 야당들도 합심하여 투쟁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憲法の平和主義守ろう, 郵便局長·今西儀夫さん," 『京都民報』, 2016年7月9日.)

전국적인 <아사히신문朝日新聞>도 그가 지역 고령자들의 전쟁 체험을 모아 자비로 책자를 출판하고, 증언 집회를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한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8月4日に京都で「戦争体験を語る会」開催", 『朝日新聞』, 2015. 7. 3. 등) 패전 직후 한국의 평안도에서 생명을 잃을 뻔한 8살 소년은, 일본에 돌아와 80세 노구로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저렇게 분투하고 있다. 일본의 그리스도인이 얼마 없다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이 한 명의 의인 앞에서 겸허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처럼 일본의 선교 현장에서는 한국과 인연을 맺은 수많은 신앙인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저 하늘 본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며 살지만, 동시에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한반도의 고향 땅도 늘 그리워한다. 그리고 불귀不歸의 고향 땅에도 평화가 깃들길 기도하며 산다. 같은 고향, 같은 신앙을 지닌 소수의 일본 그리스도인들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이마니시 노리오今西儀夫 씨(80). 그는 필자의 교환 강단 설교 때 사회를 봤다(오른쪽). 사진 제공 홍이표

한일의 징검다리 땅,
후쿠치야마福知山와 미야즈宮津

이마니시 상이 살아가는 교토 북부의 중심 도시는 후쿠치야마시福知山市이다. 필자가 현재 거주하는 아이치현愛知縣을 향해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지역'으로 풀이하곤 한다. 후쿠이야마福知山는 '복음福音을 깨닫는 산',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이 깃든 땅이라고 자의적인 풀이를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지역은 고대로부터 한반도의 문화가 일본의 수도 교토에 전파되는 통로였다. 후쿠치야마성의 성주였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1528~1582)는 전국시대의 대표적 무장이다.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탄바丹波 지역을 할당받은 그는 탄고丹後의 호소카와 후지타카 등을 지휘하며 간사이關西 지역의 맹주로서 자리매김했다.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그였지만, 여러 불협화음 속에 1582년에 결국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을 일으켰고, 이때의 충격으로 노부나가는 자결한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급부상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7~1598)는 아케치와 대립하였고, 유명한 교토 야마자키전투山崎の戦い(1582)에서 격돌하지만 결국 아케치가 패하고 만다. 그렇게 도요토미가 일본을 지배하게 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조선 및 중국과의 화친을 추구했던 아케치가 일본을 통치했다면 임진왜란도 안 일어났을 것이며, 이후의 한일 관계도 전혀 달라졌을지 모른다는 주장도 있다. 결국 후쿠치야마는 몰락한 지방 도시로 남게 되었지만, 한일 관계는 물론 일본 역사에서도 중요한 공간임에 틀림없다.

후쿠치야마성. 성 뒤쪽으로 일장기를 내건 육상자위대 부대 모습이 보인다. 사진 제공 홍이표

아케치 미츠히데는 일본 최초의 그리스도인(기리시탄) 중 한 명이라는 설도 있다. 그의 가신 중에는 2017년에 교황청으로부터 복자福者(Beatus)로 시성된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1552~1615)도 포함돼 있다. 미츠히데가 '혼노지의 변'을 일으키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다치바나 교코立花京子가 쓴 <노부나가와 십자가>는 가톨릭 예수회의 배후 조종설을 언급한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오다 노부나가가 "예수회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고 묘사한다. 그런데 이후 예수회 및 스페인, 포르투갈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게 되었고, 노부나가의 일본 통일도 곧 실현될 기미가 보이자 일본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한 예수회가 기리시탄이었던 아케치 미츠히데를 이용해 난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하나의 설이지만, 후쿠치야마는 분명 일본의 초기 기독교 역사와도 적잖은 관계가 있어 보인다.

한편 아케치의 딸 호소카와 가라샤細川ガラシャ도 일본을 대표하는 최초의 여성 그리스도인으로 유명하다. 아케치는 셋째 딸 다마코玉子를 당시 미야즈성宮津城의 성주였던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의 정실부인으로 혼인을 시켜 보낸다. 그리스도인이 된 다마코는 라틴어의 '은총'恩寵인 '그라시아'(Gracia)의 음역을 딴 세례명을 얻게 되었고 지금까지 '가라샤'ガラシャ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도 혼란한 전국시대에 인질극의 희생양이 되었다. 옛 미야즈성 바로 옆에는 1896년에 세워진 미야즈가톨릭성당이 있는데, 지금도 미사를 거행하는 현역 성당 건물로서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다. 뒤뜰에는 이 땅이 배출한 최초의 여성 그리스도인 가라샤의 동상을 세워 그 신앙을 기념하고 있다.

이 동상의 뒤쪽을 보면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煕(1938~) 전 일본 총리의 이름이 보인다. 그는 미야즈 성주였던 호소카와 가문의 직계 후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문의 역사 때문일까. 호소카와 전 총리는 예수회 학교인 조치대학上智大学을 나왔고, 패전 이후 자민당 이외의 정당 출신(일본신당)으로서는 처음으로 총리에 선출되었다.

미야즈가톨릭성당 내부의 다다미 바닥. 사진 제공 홍이표

성당 뒤뜰에 있는 호소카와 가라샤 동상. 사진 제공 홍이표

그가 그리스도교적 양심에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겠으나, 한일의 화해와 우호를 위한 의미 있는 발언을 자주 남겼다. 예를 들어 "태평양전쟁은 침략 전쟁이며, 잘못된 전쟁이었다"며 과거 침략에 대한 적극적 반성의 자세를 보였고, 1993년 11월 한국을 방문해 김영삼 대통령과 회담을 했을 때는, 일본이 "참기 힘든 고통을 끼쳤다. 우리의 행위를 깊이 반성하며 마음으로부터 사과드린다"고 발언했다.

1994년 5월 30일, 도쿄 신주쿠에 열린 일본신당 총회 직후에는 그러한 참회 발언에 불만을 품은 우익 인사에 의해 저격 위협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는 "한일 병합은 강제된 것"이라는 소신 발언을 이어 갔다. 이처럼 필자가 활동한 후쿠치야마와 미야즈는 일본 최초의 그리스도인들과도 인연이 깊으며, 한일의 우호 역사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땅이 아닐 수 없다.

한일의 우정과 교류,
유교에서 기독교로?

한국과의 인연은 이뿐만이 아니다. 후쿠치야마 인근에는 2014년 NHK 대하드라마 '군사 칸베에'軍師·官兵衛로 더욱 유명해진 다케다성竹田城이 있다. 전국시대 말기 기리시탄(크리스찬) 장군으로 유명했던 '구로다 칸베에'黒田官兵衛를 주인공으로 한 이 드라마의 배경으로 '일본의 마추픽추'라 불리는 이 성이 등장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이곳은 1597년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싸우다 포로가 되어 잡혀 온 유학자 강항姜沆과의 인연이 깃들어 있다. 포로로 끌려온 강항은 교토京都의 후시미성伏見城에 머물면서 일본 유학儒學의 시조始祖 후지와라 세이카藤原醒窩와 다케다성竹田城 성주인 아카마츠 히로미치赤松廣通 등과 친분을 쌓았고, 그들에게 조선의 발전된 유학 사상을 전하였다.

세이카와 히로미치, 그리고 강항은 에도 유학을 탄생시킨 3인방이라고 불린다. 도요토미가 몰락하고 에도시대 270년이 열렸을 때, 도쿠가와막부는 '충효'를 강조하는 유교를 새로운 통치 이념으로 채택하였고, 이들이 길러 낸 후학들이 그 일익을 담당하였다. 처음에는 '적'으로 만났지만 나중에는 '벗'이 되었다. 겸허한 자세로 선진 사상을 배우려 한 일본의 장수들은 조선의 선비와 깊은 우정을 쌓아 새로운 한일 관계의 씨앗을 뿌렸다.

강항과 그에게서 유학을 배운 일본 무사들의 우정이 깃든 다케다성 풍경. 사진 제공 홍이표

전시실에 게시된 강항에 대한 설명. 사진 제공 홍이표

포로가 된 후 3년 만인 1600년에는 세이카와 히로미치의 노력으로 강항은 무사히 조선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일본에서의 경험을 기록한 <간양록看羊錄>은 피상적이던 일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도록 이끌었다. 조선이 '소중화'小中華 사상의 아집을 넘어서 일본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할 수 있게 만든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에도막부도 '조선통신사'를 초청하여 조선과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애썼다.

성벽만 남아 있는 다케다성에 오르면, 과연 지금의 한국과 일본이 과거 에도시대만큼 평화로운지 묻게 된다. 이곳 후쿠치야마 주변에서 뿌려진 한일 평화의 씨앗…. 과거에는 '유교'를 통하였지만 지금은 '기독교'가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한일 간의 특별한 역사가 깃든 땅에, 130여 년 전인 1890년 10월 12일에 세워진 일본기독교단 후쿠치야마교회福知山敎會가 있다. 도시샤와 조합교회를 설립한 니지마 조新島襄의 제자 토메오카 코우스케留岡幸助(1864~1934)가 교토 북부 지역 전도를 전개하면서 개척한 교회이다. 1952년에 새로 건축한 예배당은, 삐거덕거리는 마루 소리와 은은한 향나무 내음이 옛 성읍에 세워진 교회의 운치를 더하여 준다.

그런데 이 교회에 2014년부터 한국인 주임목사가 부임해 와 있다. 윤동주가 공부한 도시샤同志社대학 신학부에서 유학한 이상경 목사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한국인으로서 교토교구 3역(의장, 부의장, 서기) 중 한 명인 서기로서 일본인 목회자들 틈 속에서 묵묵히 봉사하고 있다. 같은 일본기독교단 교역자인 아내 정부경 목사도 교토교구의 순회 목사로서 목회자가 없는 무목無牧교회들을 돌보고 있다.

이 교회들만이 아니라 필자가 섬겼던 탄고미야즈교회에도 여전히 한국인 목회자(한형모 박사)가 부임해 있으며, 후쿠치야마의 또 다른 단립교회에도 한국인 목사가 시무 중이다. 교토교구 안에는 그 밖에도 가스펠하우스 교회의 김도형 목사와 박시내 선교사, 나가오카쿄교회의 한수신 목사 등 여러 한국 목회자가 일본의 그리스도인과 함께 호흡하며 교회를 섬기고 있다. 성공회의 경우는 일본 전체에 20여 명의 한국인 사제가 건너와 협력하고 있다. 수백 년 전 불행한 역사 가운데서도 조선의 선비와 일본의 무사들이 신뢰와 우정을 쌓아간 것처럼, 지금은 한일 복음의 사도들이 그 맞잡은 손을 이어 가고 있는 셈이다.

과연 한국교회는 라오스나 캄보디아의 목회자를 담임목사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으로 베트남인이나 예멘인을 영입한다고 하면 환영할까. 한국으로 귀화한 인도네시아계 사람을 시의회의원이나 국회의원으로 선택할까. 아마 백인이라면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말할지 모른다. 아직 우리의 의식 수준은 거기에 머물고 있다. 그와 비교할 때, 일본 교회의 신앙인들은 그러한 차별과 편견의 벽을 허물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본다. 예전에 '난민' 문제와 함께 소개한 타츠 목사의 말이 공허한 외침이 아님을 실천으로 증명하고 있다.

"기독교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나라나 인종의 구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주 안에서 형제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타츠 츠네토요 목사, 반세기 전 탄고미야즈교회 주임목사)

후쿠치야마교회. 사진 제공 홍이표

후쿠치야마교회 한국인 목회자의 설교 간판. 사진 제공 홍이표

일본기독교단 교구 총회의 흔한 풍경

2015년 5월 5일, 이틀간의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 총회가 끝나는 날이었다. 일본기독교단의 '교구'는 장로교회의 '노회'나 감리교회의 '연회'와 비슷하다. 이날 신임 교구 총회 의장으로 선출된 이리 하루히코入治彦 목사(교토교회)와 신임 부의장 모리시타 코우森下耕 목사(라쿠요교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회원들이 모두 빠져나간 총회 회의장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책상을 옮기는 등 뒷정리에 분주했다. 자리를 옮겨 식사와 다과를 준비해 뒀던 친교실에 가 보았다. 그곳에선 의장 임기를 막 마친 이노우에 유이치井上勇一 목사(라쿠난교회)가 교구 총무 야나이 목사와 함께 묵묵히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한국의 노회나 연회의 풍경을 떠올리며 작은 충격에 휩싸인다. 전후임 노회장이나 감독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런 봉사로 귀감이 되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일본의 교회는 물량적으로는 분명히 작다. 하지만 저런 지도자들의 모습으로 인해 결코 작은 교회가 아님을 느낀다.

그들의 모습을 뒤로하고 교회 로비에 나오자, 일본기독교단의 상당수 교회 현관에 꽂혀 있는 시각장애인용 점자 성경책과 찬미가가 그날따라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일본의 그리스도교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를 확인시켜 주는 상징적 풍경이다. 권력과 돈을 움켜쥔 강자들을 먼저 바라보는 한국교회의 모습이 과연 이곳 일본의 교회보다 크다고 할 수 있을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눅 9:48, 새번역)."

총회가 끝나자 신임 교구의장이 된 이리 하루히코入治彦 목사와 신임 부의장 모리시타 코우森下耕 목사가 마지막까지 남아 책상을 옮기고 뒷정리를 하는 모습. 사진 제공 홍이표

마루타마치교회 현관에 꽂혀 있는 시각장애인용 점자 성경과 찬미가. 사진 제공 홍이표

시각장애인용 점자 성경 내부. 사진 제공 홍이표

교토타워 이야기
'안과 밖' 구별이 사라진 신앙인의 모습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이끌고 교토를 안내할 때, 교토역은 매력적인 장소 중 하나이다. 웅장한 교토역 꼭대기에는 교토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무료 전망대가 있다. 그런데 그 정면 바로 앞에는 서울타워처럼 우뚝 솟은 교토타워가 보인다. 필자는 '교토역 무료 전망대 때문에 교토타워는 망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에 대해 30년간 일본에서 활동한 후쿠치야마교회의 이상경 목사는 이렇게 답하였다.

"교토역 무료 전망대가 생긴 이후에도 교토타워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아요. 그 이유가 뭔지 알아요? 그건 사람들이 교토타워가 보이지 않는 교토 시내를 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최첨단 시설로 세워진 교토타워는, 헤이안시대와 에도시대의 교토를 느끼는 데 장해가 된다는 이유로 건설 당시 시민들로부터 큰 반대에 부딪혔다. 그래서 많은 일본인은 교토타워가 보이지 않는 옛 수도 교토의 풍경을 보기 위해 지금도 교토타워에 오른다는 것이다.

이 설명을 듣고 많은 생각에 잠긴다. 우리는 보기 싫은 사람들, 피하고 싶은 일들, 혐오하는 나라나 민족 등을 마음에 품고 산다. 하지만 예수의 말씀은 늘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막 12:31),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 5:44) 하지만 우리는 이 교훈들을 애써 회피하며 살아간다. "저 교토타워만 없으면 정말 고풍스러운 교토의 원래 모습을 볼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많은 일본인의 마음을 우리도 품고 사는지 모른다. 눈앞에 거슬리고 방해되는 존재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강퍅剛愎한 마음 말이다.

"저 노숙인들만 없으면 거리가 깨끗할 텐데…."

"저 문제아만 없으면 이 교실이 조용할 텐데…."

"저 외국인들과 동성애자들만 없으면 안전할 텐데…."

"북한만 없어지면 세상이 평화로울 텐데…."

하지만 우문현답과 같은 교토타워 이야기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발견해 본다. 교토타워를 부수고 없애는 대신, 교토타워에 올라가면 교토타워가 보이지 않는 교토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제자 빌립은 예수께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요 14:8)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예수는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요14:9)라고 대답한다.

예수는 왜 이토록 빌립을 강하게 야단치셨을까. 그것은 빌립이 여전히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의 존재를 물리적 개념으로 분리하여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빌립은 교토타워 때문에 교토가 제대로 안 보인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교토의 옛 모습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의 눈은 아버지 하나님을 보기에는 너무도 많은 물질적 세계의 장애물들로 어지러운 상태였다. 바로 '안과 밖'을 철저히 구분하는 우리의 모습처럼 말이다. 이어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히가시야마東山에서 바라본 교토역과 교토타워. 사진 제공 홍이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 14:10-11)."

아버지 하나님을 보고 싶다면, 예수는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보라고 요청한다. 빌립과 그 밖의 제자들은 그저 눈앞에 보이는 스승 예수를 통해 그 안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한 집단 밖의 사람이든, 안의 사람이든 모두가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다. 이는 '남과 북', '남과 여', '어린이와 어른', '서양인과 동양인', '일본인과 한국인'이라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수많은 경계와 벽을 허물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어서 예수는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요 14:12)고 말한다. 예수는 우리가 그러한 안과 밖의 구분을 부수고 완전히 하나가 된 세상을 만들 때, 예수가 이 땅에 와서 하였던 일보다도 더 큰 일을 할 수도 있다고 용기를 주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용기가 없어 보인다. 나와 내 가정, 우리나라(남한)만의 이기적 행복을 조금씩 포기하며, '밖의 사람들'과 나누는 일에 참으로 인색하다.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는 '다른 보혜사', '진리의 영'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한다(요 14:16).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다"(요 14:17)고 한탄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끊임없이 '안과 밖'을 구별하며 자신이 살아가는 이 세상 '안'에만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안다. 그것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며 삼위일체 가운데 한 분인 성령을 우리가 직접 체험하고 알아볼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 안에 성령이 함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그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요 14:20)며, 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 어떠한 안과 밖의 경계와 벽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14:26)을 통해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요14:27)고 약속한다.

우리는 내 안, 우리 집, 우리 회사, 우리나라 안에는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 가득 채우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밖에 있는 존재들, 타인, 타 지역, 외국에 대해서는 무관심과 함께 배타할 뿐이다. 하지만 예수는 우리 안에 하나님이 보내 주신 '성령'으로 늘 새로워질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도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고후 4:16),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후 4:18)라고 힘주어 말한 게 아닐까.

일본은 '이웃' 혹은 '원수'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세를 되돌아보도록 이끄는 귀한 선교 현장이다. 가장 거슬리는 존재처럼 보이는 교토타워에 오르면 비로소 교토의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노숙인,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난민과 같은 불편한 이웃의 몸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눈을 통해 우리가 만드는 사회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북한, 일본, 중국 등 거슬리는 형제와 이웃들의 눈을 통해 볼 때 우리 자신을 겸허히 성찰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기에 더 잘할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빌 3:20)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모두 한 형제 자매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물을 보는 눈을 통해 하느님은 나를 바라보신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 고진하. 『프란체스코의 새들』, 문학과지성사, 1993.에서 재인용)

중세 독일의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ehart, 1260~1328)가 남긴 말이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계신다. 그래서 우리의 눈으로 다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고 말한다. "저 사람들, 그리고 저 나라들은 없어지면 더 좋겠다"는 마음, 그 중심에 혹시 일본이 있지 않은가? 혹시 일본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 미움과 혐오, 불신과 편견을 또 다른 이웃, 심지어 우리 동포들에게까지 확대해 가고 있지는 않는가? 그럴수록 예수와 사도들의 권면을 다시 경청하여야 한다. 일본이라는 척박한 땅에서 여전히 복음을 전하고 있는 신앙의 형제 자매들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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