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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 아프거나 미치거나
[정신실의 신앙 사춘기] 이름을 갖지 못한 사람들
  • 정신실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8.10.19 14:58

사모님들이 아프다. 아픈 사모님들이 병원에 가지만 원인을 진단받지 못한다. 두통이 멈추지 않고, 근육에 경련이 오거나, 시시때때로 체하지만, 원인은 모른다. 기운이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밤에는 잠을 못 자고, 낮에는 만성피로와 무기력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다들 이유는 없다고 한다. 이유 없는 병이 이유가 없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 병은 엄마들의 병과도 비슷한 것 같다. 우리 엄마들은 다들 그렇게 아프다.

백소영 교수의 <엄마 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대한기독교서회)는 <엄마 되기, 아프거나 미치거나>(대한기독교서회)의 개정판이다. 나는 첫 번째 제목을 더 좋아한다. '엄마 됨, 엄마 된 상태'에 '아프거나 미치거나'로 이름을 붙여 준 책 제목 자체가 이미 치유라고 생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개정판 서문에서 책이 일으킨 반향에 놀랐다며 독자를 만난 경험에 대해 백소영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엄마들은 그녀들의 다소 부정적인 혹은 불순한 모성 경험이 개인의 불신앙이나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는 말 한마디에도 큰 자유와 위로를 얻었다."

그러니까 사모님들이 아픈 것은 마땅히 느끼고 표현해야 할 것이 풀려나지 못하고 몸 어딘가에 얼어붙거나 고여 있어 생긴 결과다. 아픈 사모님들, 당신의 이유 없는 아픔은 남편의 사역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거나, 믿음 없는 탓이거나, 당신이 잘못된 것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다.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지우고 살아온 대가, 또는 존재가 몸을 통해 보내는 SOS가 엄마들의 병이라면. '모성' 대신 '사모'라는 말을 넣으면 바로 원인 진단이 될 것이다. 사모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잃고 살아가는 영혼이 몸으로 말하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를 떠받치는 모성 신화를 살아 내느라 자기를 잃어버린 엄마들이다. 그렇다면 사모님들은 종교적 가부장제 속 엄마일까. 엄마이기나 할까.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내보지 못하는 존재감 없는 존재인데. 엄마라기보다 시집살이하는 며느리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물론 여성주의 담론 안에서 중산층 백인 여성과 흑인 하층민 여성 문제가 다른 방식으로 공존하는 것처럼 교회 내 모든 사모의 위치를 단순하게 동일화할 수는 없다.

목회자 남편 대신 교회 실권을 쥐고 흔드는 권력 뒤의 권력인 큰 사모님이 있다는 것도 안다. 목회자 아닌 목회자 부인에게 받은 상처로 교회를 떠나는 이들도 있다. 그럼에도 '누구 목사님 사모님'으로 불리며 이름을 갖지 못한 존재는 사모님들밖에는 없다. 하물며 권력자까지도 '큰 사모님'이지 이름은 없다. 정체성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닌 오직 남편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모님이 아프다. 조용히 만성적으로 아프다. 반면 급성으로 병증을 보이는 경우도 보았다. 교회 가야 하는 시간만 되면 갑자기 장이 꼬이며 데굴데굴 뒹굴었다거나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손발이 차가워지기도 한단다. 이 '알 수 없는 이유' 역시 알 수 있는 이유이다. "미치겠다, 미쳐 가고 있다"고 말하는 사모님도 만났다. 청산유수의 찬양 인도자, 잘 배치된 악기, 열정으로 노래하는 회중의 찬양 시간이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다 속이 울렁거리고, 울렁거림을 이기고 앉았다가 결국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무언가가 역겨워 결국 게워 내고 만 것이다. 역겨워 토해 낸 그 내용물이 무엇일까. 모두 한통속이 되어 찬양하고 존중하는 집단 안에서 이방인, 아니 투명 인간 같은 자기 존재를 향한 연민일까. 교인들 앞과 부교역자 대하는 태도가 너무도 다른 담임목사의 설교를 들으면 분노가 치밀어 올라 살인 본능까지 느껴진다는, 또 다른 미쳐 가는 사모님도 있었다. 이거 실화냐. 실화다.

사모였던 우리 엄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사모의 '사' 자는 '죽을 사' 자여. 그 말이 딸이었던 내게 중요한 삶의 지침으로 남았다. 무엇이 되든 목회자의 아내는 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목회자가 되고 싶은 남자를 만났다. 나와 내 결심을 수용하기 위해 목회자 꿈을 포기하겠노라 했다. 그래서 결혼했다. 결혼하고 6년, 둘째를 낳고 얼마 안 되어 남편은 숨겼던 선녀 옷을 꺼내 놓는 나무꾼처럼 목회자 꿈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내가 내 꿈을 살아야 하는 것처럼 그 또한 자기 꿈을 살아야 하겠기에 기꺼이 가라고 했다. "설령 내가 목회자가 된다고 해도 당신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지 않도록 하겠다. 당신은 목사와 결혼한 것이 아니라 나와 결혼한 것이다"고 말했다. 신대원에 가고 사역을 하면서 자신의 말을 철저하게 지켰다.

남편이 목회자여서가 아니라, 덩달아 사모가 되어서가 아니라 깊은 기도에 대한 갈망이 컸다. 깊은 사귐의 기도를 하고 싶고 배우고 싶었다. 그 깊은 갈망과 상관없이 사모니까, 아이들이 어려도 무조건 새벽 기도 나오라는 요구는 견딜 수 없었다. 나가고 싶은 날 나가고, 일어나지 못하면 나가지 않았다. 아이가 깨서 "엄마 무서워. 가지 마" 하고 울면 아이를 안고 있다 다시 잠들기도 했다. 남편이 나 대신 받는 눈총과 압력이 있음을 알기에 마음은 늘 불편했다.

어느 날 새벽,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갈등 속에 앉아 있는 내게 남편이 말했다. "여보, 정말 당신이 기도하고 싶으면 가." 부당한 사모 역할 강요로부터 지켜 주려는 남편, 그 눈물겨운 노력에도 나는 사모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글 쓰는 여자,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위의 아프거나 미치는 사모님들의 경험은 모두 내 것처럼, 내가 겪었던 일처럼 공감이 된다.

소리 없이 아프거나 미쳐가는 이 땅의 사모님들을 어찌할 것인가. 5000년 이어 온 가부장 사회에서 남자 아닌 여자 사람, 그중에서도 교회 안의 형제 아닌 자매, 그중에서도 목회자의 아내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종교의 이름으로 더욱 정당성을 얻는 곳이 교회이다. 그 교회 여성 중에서도 피라미드 맨 아래 칸, '설국 열차'의 꼬리 칸이 사모님들 자리이다. 누구누구의 아내(라고 쓰고 역할 보조자라고 읽는다)인 타자일 뿐인 여자들. 정체성의 근거 자체가 자기 자신, 제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여자들. 아프고 미쳐 가는 사모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죄가 있다면 목회자와 결혼한 것이다.

강의하러 다니며 나를 소개해야 할 때가 종종 있다. 나를 소개하는 문구가 인쇄된 것을 보는 일도 있다. 내 이름 뒤 괄호 안에 붙는 호칭이 '사모'일 때가 있다. 내 전공이 있고, 내가 써 온 글이 있어서 작가나 음악치료사여도 되는데, 굳이 남편으로 생긴 호칭이 붙는다. 아프고 미쳐 가는 사모들이 가엾고 안타까워 돕고 싶다면 사모 아닌 사람으로 보아 주는 것이다. 사모라는 호칭이 무용지물 되게 하는 것이다. '사모'는 이미 타자화되어 주체적 생명력이 사라진 호칭이기 때문이다.

'사모 세미나'란 이름으로 교육과 쉼과 위로를 제공하는 시도들이 있는데 사실 그게 더 슬프다. 사모님들의 실질적인 필요를 채우는 면이 있다는 것을 안다. 지친 사모님들이 교회 일상에서 빠져나와 남이 해 주는 밥 먹고 잘 쉬는 며칠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좋다. 그럼에도 마치 사모가 갖춰야 할 어떤 덕이 따로 있는 것처럼, 그것을 가르치겠다는 그 시도 자체가 억압이고 폭력이다.

따로 배워야 할 사모의 덕이란 무엇일까. 기도 많이 하고 아이들 잘 키우는 것은 기본. 적은 사례비에도 불평 없이 살림을 살아 내야 내는 것? 피아노 반주? 성격으로 치면 밝고 싹싹해야 하지만 과묵하기도 해야 하고, 멋을 너무 부려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꾸미지 않으면 안 된단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가. 춤추지 말아야 한다. 아니 출 수가 없는 춤이다. 이쪽 스피커에선 왈츠 리듬을, 저쪽에선 탱고를, 또 다른 곳에서는 삼바 리듬을 준다면 춤을 출 수가 없다. 아픈 사모님들을 돕고 싶다면 사모 되라 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자신이 되도록 두는 것이다.

나는 '사모님'이라 불리는 것 자체가 싫지는 않다. 가끔 아주 따뜻하게 들리기도 한다. 문제는 관계이다. 어떤 관계성 안에서 부르고 불리느냐이다. 강사로 갔을 때 굳이 힘주어 '작가'라 칭해 주는 분들이 있다. '사모'라는 말에 달라붙은 전적인 타자성, 온갖 불합리·비합리를 인지하시는 분들이다. 배려심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사모'라고 소개되는 것이 늘 불편한 것은 아니다. 어떤 보수적인 교회에선 그 어떤 호칭보다 예우를 담은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호칭이 아니라 관계성이다.

청년 시절부터 다니던 교회에서 남편이 첫 목회 사역을 시작했다. 정 선생님, 지휘자님, 언니, 누나, 신실이. 여러 호칭이 혼재할 수밖에 없었다. 청년 시절부터 20여 년 지기인 여자 후배가 있었는데 이런저런 입장, 특히 교회에 대한 생각이 달라 서로 마음이 좀 불편하게 되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표명하는 과정에서 그 친구가 20년 언니였던 내게 정색하고 '정신실 사모'라 칭했단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교인 vs 사모 구도를 통해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겠다는 것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그런 사모라면 평생 불리고 싶지 않다. SNS에 내게 사모님이란 호칭을 붙여 글을 쓴 분이 있었나 보다. 그 글에 "이분은 자기 이름으로 책도 냈는데 왜 사모로 불려야 하느냐"는 댓글이 달렸단다. 나를 사모님이라 칭한 분은 개인적인 관계로 만났고, 그 관계에서 시작된 호칭이어서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사모라는 호칭에 나를 가두려던 후배의 태도나 사모라 부르지 않는 것으로 나를 규정하는 것이나 탈관계성에서 비롯한 일이다. 정작 불리는 '나', '사모인 나'는 없다. 어떤 주장에 힘을 싣거나 주장하는 자를 돋보이려는 목적으로 불리거나 불리지 않는 사모 호칭이라니. 오래전 어느 날, 청년 여럿과 카페에 앉아 놀고 있었다. 무르익는 수다 속에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목소리들이 커졌다. "사모님", "사모님" 큰 소리로 부르는데 영 싫었다. 작은 소리로 어금니 딱 붙이고 "야, 바께스는 은니라고 블러라" 하고 함께 웃었다. 그때 분위기를 떠올리며 한마디 하고 싶다.

"므라고 블릴찌는 내그 결쯩흔드!"

사모를 '집사'라 부르는 교회에도 있어 봤다. 잠시 신선했고,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지만 그리 불러 놓고 고상하여 교묘한 방식으로 남편 목사의 사역에 종속시킨다면 더 숨이 막히는 일이다. 사모라는 호칭이 문제인가. 문제다. 이름 붙이는 것은 규정하는 것이니까. 호칭이 없어지면 좋겠다. 아니 호칭이 아니라 종속된 존재가 없어지고 주체가 살아나면 좋겠다.

목회자 남편을 둔 이상 목회자 아내임을 부인할 수 없다. 내게 주어진 여러 사회적 역할 중 하나로 생각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사회적 얼굴, 페르소나 중 하나이다. 페르소나는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쓰고 벗을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페르소나와 나를 동일시할 일도 아니다.

사모라는 페르소나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담임목사나 교인들의 모든 기대에 맞춰 사는 사람, 그리하여 일말의 존재적 버성김도 느끼지 않는 사람이 가장 문제적 사모일지 모른다. 역할이야 멋지게 수행해 낼지 몰라도 진실한 자아는 점점 숨 막혀 죽어 갈지 모른다. 진실한 나와 사모라는 페르소나, 부당한 기대 사이에서 부대끼며 아프거나, 미치는 사람에게 차라리 희망이 있는지 모른다.

어느 교회에 강의하러 가서 청년 시절 함께했던 제자를 만난 적이 있다. 반가운 마음에 그 시절 부르던 별명이 툭 튀어나온다. 야, 쏭알! 툭 불러 놓고 난 이름이 어쩐지 어색한 것은 시간이 흘러서일까, 공간의 낯섦 때문일까. "엄마, 엄마" 부르며 쏭알 주변을 오가는 아이들 때문일까. 아, 엄마가 되었구나. 조금 지쳐 보이는 것은 육아의 고단함 때문일까. 어, 그런데 왜 혼자서 아이를 보고 있지? 아, 남편이 그 교회 교역자였다. 그렇구나. '사모'로구나! 이 싱그러운 이름 쏭알은 물론 제 이름 석 자로도 불리지 않겠구나.

강사 의전을 하겠다고 청년 몇이 다가왔다. 한때 쏭알은 저런 청년이었다. 청년들을 붙들고 그들은 모르는 쏭알, 사모님 이전의 이 사람을 말해 주고 싶었다. 쏭알이 중고등부 때부터 얼마나 인기가 좋았었는지. '**교회 이영애'로 불렸다는 것도. 고등부 때는 선생님에게 반항하며 예배 시간에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는 것도. 찬양팀 교사를 할 때 아이들에게 어떻게 감동을 줬는지. 강수지의 '보랏빛 향기'를 부르며 똑같이 춤을 출 수 있다는 것도. 무색무취의 사모님이 아니라 단맛·신맛·쓴맛 다 가진, 고유의 빛깔을 가진 한 사람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정신실 작가가 '신앙 사춘기'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연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기사(바로 가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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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 문종규 2018-10-20 06:43:00

    심도있는 목사 부인들의 애한의 글이다. 글 내용에 대해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교인들이 목사 부인을 사모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나 목사가 부인을 사모라 호칭하고, 더욱 목사 부인이 스스로를 사모라고 부르는 것은 한국교회의 이상한 모습이다. 사모란 스승, 윗사람의 부인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사모라는 것이 하나의 직분처럼 인식되고 불려지고 있다(실제 목사 부인들이 사모는 직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 목사 부인이 직분이면, 목사 아들, 딸, 목사 아버지 어머니, 장모 장인 모두 교회 직분자라고 하지 왜 목사 부인만 직분자라고 하는가? 그리고 부인이 목사인 경우 남편은 무슨 직분인가?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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