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지도자 사무엘은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미스바에 모여 기도했다. 사사 시대에도 위기극복을 위한 성회를 미스바에서 드렸다. 오늘날도 그 전통을 이어받아 미스바대회를 이 민족의 위기라는 시점에서 성대히 치른 이들이 있다.

지난 7월 31일부터 8월 2일까지 서울올림픽 펜싱경기장에서 열린 미스바구국기도성회는 교계에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다. 여기에서 발표된 성명서에는 햇볕정책과 언론사 세무조사가 북한 김정일 정권의 적화통일 야욕을 성취시켜 주기 위한 현 정권의 음모이며 김대중 대통령은 적화통일 음모를 꿈꾸고 있다는 주장을 담았다.    

사사기에는 베냐민 지파의 불량배들이 레위인의 첩을 윤간하여 죽임으로 그 남편이 그녀의 시체를 12토막 내어 전 이스라엘에 호소한 사건이 있다. 이들은 미스바에 모여 하나님께 서약한다. 우리의 딸을 절대 베냐민에게는 주지 않겠다고. 그리고 열 한 지파의 연합군이 베냐민을 쳐 무찔렀다. 그들은 미스바에 모였다. 그리고 축배를 들어야 할 시간에 통곡을 한다. 전쟁 때는 형제를 응징한데 급급하였지만 전쟁에 이기고 한숨을 돌리고 보니 자기들이 큰 실수를 범한 것을 알게 된다. 한 지파가 없어지면 하나님 앞에 온전한 공동체가 아님을 발견한 것이다. 불구의 몸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그들은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래서 미스바 성회에서 그들은 통곡하고 지도부는 베냐민을 회복할 방도를 궁리한다. 림몬바위에 숨은 600명의 베냐민 남정네들에게 처녀를 공급하기 위해 대회에 참석치 않은 길르앗 야벳 사람들을 살육하는가 하면 그래도 모자라는 수를 채우기 위해 실로에서 자기들의 딸들이 춤 출 때에 처녀들을 업어 가라고 한다. 만일 방해꾼이 있거든 우리가 막아주겠다고. 이것이 성경의 지도자들이며 미스바대회의 정신이다. 그러니까 민족의 위기 상황에서 자기 희생을 통해 민족공동체를 회복하려는 절절한 소원함을 담아 과감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들이 지도자들이었다.

우리의 미스바대회는 그러나 편가르기와 줄서기와 비호하기를 통해 미래지향적 예언자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포기한 교계 지도자들로 그득했다. 그들을 향해 오히려 장송곡을 선물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들은 신앙을 빙자하여 더러운 재벌언론과 결탁하고 또 음모와 술수로 집권야욕에 불탄 정치권에 줄서기를 하고 말았다. 이승만 정권 때부터 편들기에 능숙한 습성은 최근 모 재벌 구명운동에 줄줄이 이름을 나열함으로 자기들이 더러운 이권족임을 스스로 천명한 바 있다.

개혁과 민족화합으로 가야 할 참 중요한 이 시기에 지역 감정에 편승하거나 편가르기로 불의한 세력에 힘을 실어주는 작태는 자기들이 길들인 신앙인들이 아직도 한참은 자기들의 논리에 먹혀들 것이라는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아니 갖은 부정한 방법으로 탈세를 하고, 불의한 권력을 비호하고, 약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해 온 신문을 비호하며 나서는 이 어리석음에서 우리는 엘리 제사장의 우둔한 판단력을 발견한다.

특히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 개혁정치와 인권운동, 민족자주 운동 등 오늘날 우리 민족의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해 투쟁하고 희생해 온 모든 세력을 싸잡아 사탄의 제자, 친김정일 세력으로 못박고 있는 그들을 보면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그들은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사람들 모두가 친북세력, 곧 사탄의 무리라는 단순논리로 치닫고 있지 않는가. 언론개혁을 북의 김정일 위원장과 단합하는 '빨갱이'로 몰아세우는 저 매카시적 흑백논리로 개혁과 통일의 기류를 역류해 보려는 몸부림 앞에서 우리는 주님의 신음을 듣는다.
전두환의 광주사태를 손들어 축복해주던 것만큼이나 절대 실패할 것임에 틀림 없을 몸부림이 아닌가.

오늘은 과거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시대정신의 흐름을 잘못 지도했던 교계의 소위 지도자들이 반공의 이름으로 군사독재에 시녀 노릇만 해오던 버릇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우리는 언제나 어용 예언자들이 득세했음을 역사 속에서 목격한다. 예레미야 시대가 그랬고, 아모스나 미가의 시대에도 그랬다. 예수를 죽이라고 아우성치는 군중들의 소리가 오히려 자기들의 입가에 미소를 만들었던 종교 지도자들도 그들이었다.

그러나 곧 밝아올 부활의 아침에 그 부끄러움을 어찌 할 것인가. 무지하고, 하나님의 계시가 떠났음에도 이런 저런 눈치만 살피며 이름 끼워넣기에만 몰두하는 지도자들이여, 부디 조용히 있으라. 여러분의 후진들이 여러분의 관을 둘러메고 행진할 때 혐오스러워하지 않도록. 아니 분노의 돌팔매가 당신들을 향하지 않도록.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내 백성의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너희에게 벌하시는 날에와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누구에게로 도망하여 도움을 구하겠으며 너희 영화를 어느 곳에 두려느냐. 포로된 자의 아래에 구푸리며 죽임을 당한 자의 아래에 엎드러질 따름이니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이사야 10장의 말씀이다. 나는 1974년 대통령 긴급조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을 때 육군중장이며 모 교회 집사인 재판장 앞에서 최후진술을 대신히 이 말씀을 읽었다. 유신헌법 철폐하라, 대통령 긴급조치 해제하라, 민주주의를 이루라는 내용이 담긴 성명서 한 장을 읽고 나서 나는 곧바로 15년형을 언도 받았다. 그때 언론인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오늘날 소위 이 땅의 원로라 불리는 양반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아 청컨대 들으라. 공의는 너희의 알 것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남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의 악하던 대로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우시리라.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흑암을 만나리니 점 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미가 선지자의 예언이다. 부디 두렵게 읽고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이다.

글/이해학 목사(성남주민교회)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