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협상 직후의 대화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놓고 일본과 졸속 협상한 직후의 일이다. 일본인들도 이 소식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한국인 목사인 나에게 의견을 묻는 일이 늘어났다. 일본에서 살면서 위안부 문제는 솔직히 피하고 싶은 주제이다. 여러 일본인에 둘러싸여 제대로 된 답변을 못 하기 십상이고, 작심하고 대화하면 논쟁이 되기 때문이다.

위안부 협상 다음 주인 2016년 1월 초, 가깝게 지내는 일본인 목사님의 초대를 받아 그 교회로 갔다. 60대 남녀 교인과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한국인 목사를 본 60대 남성 교인은 뜬금없이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해 물어보더니 결국은 '위안부' 이야기를 꺼낸다. 두 사람은 '옳지! 잘 만났다!'는 흥분한 표정으로 만담하듯 주거니 받거니 떠든다. 그들은 위안부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았다. 10여 분 동안 '바이슌'賣春(매춘)이란 말을 30번 이상은 들었다. 그들의 대화는 이러했다.

"전쟁이 나면 매춘이 없을 수 없다."
"전투 와중에 강간은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다."
"일본만 그런 게 아닌데, 왜 우리만 사죄하라고 문제를 삼는지 모르겠다."
"이번에 최종적, 불가역적이라 결정된 것처럼, 이젠 더 이상 이 문제가 언급되지 않으면 좋겠다."

수년 전, 유신의 모임維新の会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시장이 해서 파문을 일으켰던 말들이, '박근혜-아베' 정부의 한일 협상 이후부터는 일본 대중 사이에 폭넓게 확산됐음을 피부로 느꼈다. 60대 여성 교우는, 자신도 과거에 위안부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아팠지만 이제는 그만 듣고 싶다고 말했다.

가만 듣고 있자니, 그들은 '일본군 위안부'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모르는 듯 했다. △경제활동을 위해 돈을 받고 성을 매매하는 '매춘업' 종사자로 인식하거나, △패전국의 여성들이 통제 불능 상태에서 적군에게 당하게 되는 개별적 '강간' 행위를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간혹 '종군 위안부'라는 말도 사용하였다.

한참을 듣던 나는, 우선 '종군'從軍이라는 용어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종군기자'나 '종군신부'처럼 '군을 따라가다'軍に従う라는 뜻의 '자발성'을 전제로 한 표현은 일본에서 만든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들이 수십 번 사용한 '매춘'이라는 단어로도 일반화할 수 없다고 말해 주었다. 상당수 여성들이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매춘에 자원한 것도 아니었으며 실제로 정당하게 돈이 지급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개인 범죄로서의 전시 '강간'과도 구별되는 조직적인 군내 시설에 동원된 형태가 '일본군 위안부'임을 말해 주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내 말을 쉬이 수긍하지 않는다. 나는 60대 여성 교우에게 "○○님의 따님이 그와 같은 일을 당해도 지금과 같이 말씀하실 수 있으시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쟁이 나면 어쩔 수 없다. 2~3년 그런 일 겪었어도 살아남았으면 그것으로 감사해야 하지 않겠나. 남은 인생이 훨씬 긴데, 나는 저 한국인 할머니들처럼 평생 분노하며 헛되이 살 바엔, 그 2~3년은 잊고 새 출발해서 행복하게 살라고 야단칠 것이다!"

수차례 만난 적 있던 인상 좋은 여성 교우가 내뱉은 뜻밖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문득 그 당시 박근혜 정권을 맹목적으로 지원하던 '나라사랑어머니연합'이나 '엄마부대봉사단' 등의 아주머니 회원들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부대봉사단' 대표인 주옥순 씨는 2016년 1월 5일 <뉴시스>와의 인터뷰에서 "내 딸이 위안부였어도 일본을 용서할 것"이라며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를 적극 지지했는데, 그와 똑같은 모습을 일본의 한 크리스천 여성에게서도 발견한 것이다. 필자는 속으로 "아… 이들은 전쟁이 나면, 또다시 '히노마루센수'日ノ丸扇子(일장기 부채)를 들고 나와 자기 아들딸을 전장으로 내몰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섬뜩해졌다.

평화의 소녀상. 뉴스앤조이 경소영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장면.

본심本音와 민낯素顔

할 말 잃은 나에게 두 사람은, 일본 오키나와에는 지금도 미군 기지 옆에 집장촌이 있으며 미군들의 강간 사건이 많지만, 그런 일들을 모두 저 한국인 '위안부'들처럼 난리 쳐 가며 문제로 만들어야 하냐며 목청을 높인다. 이내 나의 반론이 이어졌다.

"매년 8월이 되면 일본은 왜 저토록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을 강조하는 겁니까. 그건 핵무기로 인해 희생당한 유일한 나라라는 피해 의식 때문이겠지요? 인류가 다시는 그와 같은 희생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 때문에 잿더미로 변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모습을 그렇게 아침저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네… 물론 그렇지요."

"두 분께서 계속 '일본군 위안부'를 매춘이나 강간 범죄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신다면, 저도 이제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네? 어떻게 말하실 건데요?"

"일본은 전쟁 나면 당연히 발생하는 폭격 가지고 왜 저리들 호들갑인가. 한국전쟁 때도 공습으로 수백만이 희생당했는데, 히로시마, 나가사키가 뭐 대단하다고 저렇게 전 세계를 상대로 선전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주장하고 다니겠습니다."

두 분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지만, 나는 말을 이어 갔다.

"원자폭탄도 그냥 폭탄이지요. 도쿄 대공습 때 15만이 죽었어요. 고베 공습, 오사카 공습하고 히로시마, 나가사키가 대체 뭐가 다릅니까? 왜 도쿄, 고베 공습 등을 차별합니까. 이라크 전쟁, 팔레스타인… 지금도 계속되는 다 똑같은 폭탄 투하 아닙니까. 히로시마, 나가사키만 뭐가 그리 대단합니까?"

"에이… 그건 아니지요! 전혀 다르지요."

"네, 다르지요. 맞아요. 다릅니다. 일본군 위안부가 바로 그런 겁니다. 핵무기(원폭)가 기존의 폭탄과 달리 인류사 가운데서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너무나 끔찍한 일인 것처럼, '일본군 위안부'도 그렇다는 겁니다. 먼저 문명화한, 근대화한 국가라고 자부하던 일본 정부와 군이, 영내에 시설을 설치해서 성 노예를 집단적·조직적으로 관리하던 야만성을 직시하자는 겁니다. 그런 일이 인류사에서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고 법에 근거한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조치를 요구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일은 한일 간에 해결되는 문제도 아닙니다. 북한, 중국, 대만, 홍콩, 필리핀, 싱가포르, 네덜란드, 호주, 뉴질랜드 등 세계 각국 여성들이 피해를 입은 인류사적 문제입니다."

그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사망자 가운데 조선인 강제 징용 노동자들이 10%(히로시마 3만 명, 나가사키 1만 명)란 것도 모르고 있었고, 생존 피폭자들(히로시마 5만, 나가사키 2만)도 일본인 피폭자들과는 달리 치료와 피해 보상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던 사실도 처음 듣는 눈치였다. 히로시마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도 히로시마시의 거부로 1970년 평화공원 바깥에 세워져 차별과 설움을 겪어 오다 1999년이 되어서야 공원 안에 옮겨졌다. 한국 정부와 민단이 세우려는 나가사키의 조선인 위령비는 '강제 노동'이란 비문을 문제 삼아 현재까지도 공식적으로 세워지지 못하고 있는데, 다만 공원 내 구석의 화장실 입구 옆에 일본 시민들('나가사키재일조선인인권을지키는모임')의 모금으로 1979년에 세워진 조그만 추도비가 아쉬움을 달래고 있을 뿐이다.

나는 함께 희생당한 조선인들을 지금도 차별하고 있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과연 전 세계를 향해 평화를 호소할 수 있겠느냐고 반론했다. 그리고 위안부를 '매춘'이라고 부른다면, 나는 전시하에 다들 겪는 것처럼 폭탄 좀 맞았다고 저렇게 선전하는 일본의 행태를 비판할 것이라고 했다. 흥분하던 두 사람은 침묵하기 시작했고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일본 말로 '본심'本心을 '혼네'本音라 하고 '민낯'을 '스가오'素顔라고 한다. 일본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선한 미소와 깍듯한 예의로 개인 인격과 윤리에 있어서는 참으로 모범적으로 보인다. 소수의 크리스천에게는 그 신뢰와 기대감이 더 큰 게 사실이다. 하지만 종종 이런 '혼네'와 '스가오'가 잔잔한 호수에 떨어진 돌 하나의 파동처럼 크게 다가온다.

공식 위령비 건립이 어렵자, 나가카의 시민들이 돈을 모아 세운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평화공원이나 원폭자료관 시설 내에도 못 세워 근처의 공중화장실 옆에 세워져 있다. 사진 제공 홍이표

우리 안에도 있는 무지와 반성 부재

문제는 이러한 무지無知가 상대방의 일이기만 한가이다. 우리는 과연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참사의 희생자들 가운데 10%가 우리 동포였다는 사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또한 한국인 피폭자들 중에서 여전히 치료나 피해 보상을 받지 못한 채 차별받아 온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알까.

필자도 어린 시절, 하나님께서 죄 많은 일본을 향해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심판하셨다는 설교를 자주 들었다. 당시 반일 의식에 충만했던 필자도 그 이야기를 듣고 통쾌해했지만 그 안에서 죽어 간 3~4만의 조선인 희생자와, 이후에도 고통에 시달린 수만 명의 피폭자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몰랐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절대다수가 일제에 협력하며 신사참배에 적극 참여한 한국교회에는 어째서 하나님은 원자폭탄을 통한 불의 심판을 하시지 않았던 걸까. 아니,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죄는 5년 뒤 발발한 한국전쟁을 통해 심판된 것인가. 한국전쟁 당시 많은 도시가 잿더미로 변한 것은, 사실 북한군의 공격 때문보다는 미군의 폭격에 의한 경우가 많았다. 대전大田의 심각한 파괴 소식을 접한 재미 동포들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태뎐太田을 됴샹弔喪 - 한밧아 한밧아 웬일이냐? 또닷이 불을 질리엇구나. 또닷이 잿덤이가 되엇구나. 너의 잿덤이를 통곡한다. 너의 빈터를 됴샹한다. 오늘 젼정戰爭에 누가 올코 누가 글른 것을 말하지 말자. 인생人生의 지식이 그에까지 발달이 되지 못한 모양이다. 온 셰샹이 쟝일 말라는 것과 가치 가는 줄만 알고 언대로 가는 것을 몰으는 것이 울이의 인생이오. 특별히 오늘의 인생이다. 잊지 말자. (중략) 지금 미군이 그곳을 내어노코 나아가면서 불을 질러서 잿덤이를 만들엇다." ('태뎐을 됴샹', <國民報>, 1950년 7월 26일 자.)

1945년에 일본에 원폭을 떨어뜨린 것도 미국이었고, 5년 뒤 서울과 대전, 평양 등을 잿더미로 만든 것도 미국이었다. 하나님께서 미국을 통해 일본을 심판하셨던 거라면 한국도 그렇게 심판받은 것일까. 혹여 일제에 부역했던 대다수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이었다고 말해 보자. 하지만 역사상 그들 교권주의자들은 자리를 보전한 채 70년간 기득권을 이어 왔고, 지금도 강단에서 일본에 큰 지진 재해 등이 발생하면 하나님의 심판 운운하며 남의 일처럼 말한다. 그리고 그 똑같은 입으로 세월호 아이들의 희생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 유명 교회 목사는, 최근 교회 세습에 눈감아 준 교단 재판국의 판단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였다. 심판과 형벌은 꼭 이름 없는 백성과 민중의 몫이 감당해야 할 몫인 걸까.

인류 최초로 일본이 겪은 참혹한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폭 경험을 통쾌해하면서도, 그 안에 생명 말살의 비극과 우리 동포들의 억울한 아픔과 설움이 뿌리 깊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눈 귀 막힌 한국인이 많다. 그와 함께 인류사 가운데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일본군 '위안부'의 참혹한 경험을, 일상적 매춘과 전시하의 불가피한 강간 범죄로 등치해 퉁 쳐 보려는 비겁한 일본인도 많다. 이런 '무지'의 원인은 진정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참회와 반성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개인도, 단체(교회)도, 국가도 완전한 존재일 수는 없다.

일본기독교단 쥬부교구中部敎區는 1974년부터 44년째 재일 한국-조선인 원폭 피폭자의 생활을 지원해 오고 있다. 2018년 7월 첫째 주일 교회 주보에는 8월 평화 성일을 준비하며 성금 기탁을 호소하는 문서가 끼워져 있었다. '평화 성일 헌금'의 부탁 말씀, 재일 한국인-조선인 피폭자를 위하여, 2018년 목표액 900만 원, 2017년 56교회 성금 참가, 피폭자의 감사 인사 등의 내용이 적혀 있다. 한국교회 가운데 지금도 고통받는 피폭자 동포를 위해 이런 지속적 관심을 가져온 교회를 거의 보지 못했다. 사진 제공 홍이표

탄고미야즈교회 치바 목사의 유언과 계승자들

일본기독교단은 매년 8월 첫째 주일을 '평화 성일'平和聖日로 지키고 있다. 필자가 탄고미야즈교회에서 일할 때, 사카네 교우는 오래된 LP판을 보여 줬다. 1970년부터 1999년까지 만 29년 동안 교회를 맡았던 치바 마사쿠니千葉昌邦 목사의 노래가 담긴 앨범이었다. 전쟁을 직접 체험한 치바 목사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로부터 30년이 지난 1974년 8월 8일에 '원폭의 노래'原爆の詩를, 이듬해(1975년) 8월 17일에는 '전쟁을 모르는 아이들에게'戦争を知らない子どもたちに라는 노래를 지어서 직접 불러 녹음했다.

치바 마사쿠니 목사. 사진 제공 홍이표
치바 마사쿠니 목사가 남긴 유작 앨범. 사진 제공 홍이표

'원폭의 노래'는 이 땅이 '한 줌 재'로 변해 버린 것은 인간의 죄 때문임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시편의 기자처럼 "주여 들으소서! 마음의 외침을!"이라며 절규하면서, 3절에서는 치바 목사는 '원한을 떨치고 신뢰를 통해 인류가 함께 나아가자'며 호소한다.

원폭의 노래原爆の詩

1

하늘이 갈라져 흰 빛白光이 번쩍하니
30만의 생령生靈 스러져 가고
대지大地는 한 줌 재로 변하고
인류의 오욕汚辱을 여기에 각인하다
사람들아 울어라! 인류의 죄를!
사람들아 울어라! 인류의 죄를!

2

백열白熱 비추니 만상萬象이 녹아내려
만골萬骨 마르니 혼은 타 버렸다
통곡慟哭 소리는 하늘을 뒤덮고
오읍嗚泣 눈물은 땅에 가득하다
주여 들으소서! 마음의 외침을!
주여 들으소서! 마음의 외침을!

3

인간들이여, 일어서라!
인류여, 분기하라!
원한과 적개심을 떨쳐 버리고
사랑과 정의와 신뢰의 불꽃
가슴 깊이 품고서
함께 나아가자 이상理想의 길로
함께 나아가자 이상理想의 길로 (1974.8.8.)

앨범 표지의 아마노하시타테天橋立 앞바다와 '원폭의 노래' 가사. 사진 제공 홍이표
이 노래가 자신의 유언임을 밝힌 발간 '엽서'와 악보. 사진 제공 홍이표

수십만의 동포는 물론 수만의 한국인이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 간 원자폭탄의 비극이 또다시 반복되지 말아야 함을 치바 목사는 통렬하게 외치고 있다. 치바 목사는 앨범의 기념엽서에서 "이것은 내 마음의 외침이요, 동포를 향한 유언"これは私の心の叫び、同胞への遺言이라고 적고 있다. 1년 뒤 작사 작곡한 '전쟁을 모르는 아이들에게'에는 치바 목사의 회개하는 심정이 절절히 담겨 있다.

전쟁을 모르는 아이들에게戦争を知らない子どもたちに

1

전쟁을 모르는 아이들아! 너희가 태어나기 전에 전쟁은 일어났다
일본은 졌고 300만 명의 동포가 죽었다
그 안에는 너희의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형제들이 있었다

2

일본에선 8000만의 동포가 좁은 땅에서 북적거리며 살았다
사할린, 조선, 대만의 자원을 삼켜 먹어도 여전히 성에 안 찼다
더 갖고 싶다 더 뺏고 싶다
우리는 가진 게 없는 나라니,
가진 나라는 땅을 넘겨주고 자원을 내놓아라! 라고…

3

정의와 우애와 협조와 봉사 대신에
총과 검으로 이웃을 위협했다
만주를 침략하고 중국 대륙을 짓밟았으며
1000만 명을 죽였고 약탈하고 불태웠다
세계로부터 비난받자
국제연맹을 탈퇴하여 독일, 이탈리아와 손잡고
전 세계를 상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4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일본을 버리셨다
진주만眞珠灣의 일격을 시작으로
원자폭탄에 이르기까지의 길은 오직 하나뿐
순식간에 백만의 필리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너희들의 동포와 2/3의 국토가
우리의 속죄 번제燔祭로 드려졌다

5

검으로 선 자는 검으로 망하리라(마 26:52)
총과 검으로 이웃을 협박한 우리는
통렬한 응보를 받았다
우리의 속죄를 위한 변상辨償
그럼에도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6

전쟁을 모르는 아이들이여!
너희들에게 우리의 어리석은 죄악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는 건 아니다
너희들은 우리가 걸어가지 못했던
정의와 우애와 협조와 봉사의 길을
한결같이 걸어가기 바란다
너희에게 주어진 자유와 능력은,
오직 그것을 위한 것이다
어제는 전 세계가 우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은 전 세계가 너희를 보며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뢰하게 되기를…

7

그것만이 일본인의 오명汚名을 씻고
너희가 태어나기 전에 죽어져 간
너희의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형제들의
죽음과 삶을
영광으로 바꾸는 길이다
영광으로 바꾸는 길이다 (1975.8.17.)

'전쟁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가사. 사진 제공 홍이표

과연 일본 제국주의의 욕망에 적극 협력했던 우리 교계의 원로들 가운데, 저 시골의 치바 목사만큼이나 치열하게 통회 자복하며 기도한 사람이 있을까. 과거의 잘못을 처절히 반성하고 후손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주문하는 모습. 그 목소리를 어떻게든 남기려 몸부림쳤다는 것을 보고 후임 목회자로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에는 또 한 명의 치바 목사가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치바 마사쿠니千葉昌邦 목사의 조카로서 교토부의 '야와타포도나무'八幡ぶどうの木교회의 주임목사인 치바 노부요시千葉宣義 목사이다. 숙부의 정신은 이제 고령 목회자가 된 조카를 통해서 현해탄을 잇는 더욱 구체적인 실천으로 계승되고 있다.

2013년 6월 12일, 일본기독교단의 '전후보상을요구하는6위원회'는 한국을 직접 방문하여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 정기 시위"(1078차)에 참여하였고,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건설 지원을 위해 모금한 성금 100만 엔(약 1200만 원)을 전달한 바 있다.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 정부에 사죄와 전후 배상을 요구한 것을 계기로, 일본기독교단의 공식 조직인 6개 위원회(사회위원회, 야스쿠니천황제문제정보센터, 재일·일·한연대특별위원회, 성차별문제특별위원회, 부락해방센터, 교육위원회)는 1995년 '전후배상을요구하는6위원회'를 발족했다.

그리고 이듬해 비공식으로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정대협), 한국여성연합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와 회담을 갖고 정대협의 위안부 피해자들을 돕는 일에 지원금을 전달하기로 합의했다. 그 후 이들은 일본 전국의 교회로부터 모금 활동을 전개해 10년 동안(1996~2005) 총액 1760만 엔을 송금하였고, 이후에도 6년 동안(2006~2012년) 총액 500만 엔을 송금하는 등, 총 2260만 엔(약 2억 7100만 원)으로 정대협 활동과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건립을 지원했다.

이 활동의 중심에 바로 치바 노부요시千葉宣義 목사가 늘 있었다. 그는 2013년에도 마지막 성금을 전달하는 방문단의 대표자로 내한하였고, 같은 교회 교우로서 함께 위원으로 활동 중이던 다니구치 히토미谷口ひとみ 씨가 후원금 100만 엔이 든 봉투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에게 전달했다. 다니구치 씨는 "우리는 태평양전쟁의 가해국인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기독교 내 성차별을 없애기 위해 만들어진 모임이며, 아베 총리가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혈안이 돼 있는데, 최근 심각한 일본의 정치 상황에 맞서 우리는 온몸을 다해 싸울 것"이라고 다짐했다.

2013년 일본기독교단 대표자로 내한한 치바 목사(오른쪽 검은색 정장). 사진 제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김복동 할머니에게 성금을 전달한 다니구치 씨. 뒤에 검은색 정장을 입은 치바 목사가 보인다. 사진 제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2016년 5월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 총회에서 '전후보상을구하는연락회' 보고를 담당한 치바 목사는 몇 달 전 맺어진 위안부 협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낭독했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외무장관은 서울에서 그동안 현안이 돼 왔던 한일 관계(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당 위원회는 이하의 점들 때문에 이 '합의'를 인정할 수 없다. (하략)" 사진 제공 홍이표

치바 노부요시 목사는 교회의 이러한 참회 활동뿐 아니라, '전쟁을막는1000인위원회'戦争をさせない1000人委員会의 구즈하공동대표八幡共同代表로 활동하며 기독교 목사로 일본의 평화주의를 수호하고 있다. 안병무선생기념사업회는 2017년 10월 15일 향린교회에 치바 노부요시 목사를 강사로 초청해 '평화를 위한 한·일 그리스도인의 연대와 민중신학 -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회귀하는 일본과 폐쇄적인 선교론'이라는 행사를 열기도 했다. 치바 목사는 강연에서 일본의 군사화를 비판하고 그리스도인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일본의 조그만 시골 교회 탄고미야즈교회에서 발견한 치바 마사쿠니千葉昌邦 목사의 두 노래는, 이미 고령이 된 조카의 목회 활동 속에서도 여전히 그 빛을 발하고 있으며, 새로운 계승자 출현을 요청하고 있다.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8월 9일 아침. 서울에 있는 동생 홍승표 목사가 평화의 소녀상을 찍어 보내 주었다. 소녀의 발 아래 풍경을 보고 혼자 탄성을 질렀다. '잿더미'를 주제로 글을 완성하고 있었는데, 소녀 발 아래에 하얀 연탄재가 놓여 있고 시든 꽃 한 송이가 꽂혀 있는 게 아닌가. "뜨거울 때 꽃이 핀다"라는 말과 함께….

소녀는 그렇게 2018년 8월 초에, 자신의 회한과 아픔만이 아니라, 전쟁의 화마火魔에 스러져 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엾은 영혼들을 함께 기억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만 같다. 잿더미로 변한 황폐해진 터 위에 새로운 생명의 꽃을 피워 내 달라고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비록 소수이지만 한국과 일본에 정의로운 시민과 양심적인 신앙인들이 있다. 그래서 꽃은 반드시 필 것이라 믿는다.

소녀상 발 아래의 연탄과 마른 꽃. 누가 잿더미 위에 꽃을 피우는 일을 이어 갈 텐가. 사진 제공 홍이표
홍이표 목사가 '일본 기독교 현장에서'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연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기사(바로 가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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