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본문: 엡 2:14-19, 고전 9:19-23, 마 18:3

이 땅 한반도가 분단되어 휴전 상태로 머문 지 어언 70년이 되었습니다. 본래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이 독일처럼 분단되어야 했음에도 지정학적 중요성 탓에 한반도가 나눠져 동족끼리 적대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참으로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세기 시작과 함께 일제에 36년을 지배당했고 70년을 분단 체제로 살았으니 민족의 고난의 역사가 참으로 길고 모집니다. 그래서 해방이 아직 해방이 될 수 없다는 말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고통에는 뜻이 있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기에 우리가 당한 고난의 뜻을 묻고 찾아야 합니다. 역사는 처음이 있어 마지막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이 있어 처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평창 올림픽과 더불어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 기운이 드리웠습니다. 70년 만에 임한 하늘의 은총이 한반도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꼭 붙잡아 다른 세상을 만드는 것이 침략과 분단을 견뎌낸 우리들 과제입니다. 지금껏 분단 체제에 길들여진 사유를 깨고 하늘이 허락한 평화의 새 술을 담을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드리는 '광복'光復절 연합 예배가 말 그대로 '빛을 다시 찾는' 은총의 시간, 통일을 앞당기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무릇 만사에는 때가 있는 것 갔습니다. 평창 동계 올림픽을 3수 끝에 성사시켰으나 우리, 특별히 평창 주민들은 두 번째 고배를 들었을 때 실상 많이 좌절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평창에서 올림픽이 열렸다면 오늘과 같은 거대한 기운을 만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평창이 강원도와 대한민국이란 지경을 넘어 세계의 평창으로 각인된 것은 바로 '때'가 만들어 준 신비이자 축복입니다. 촛불 혁명을 통해 문재인 정권이 태어났기에, 그리고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으나 트럼프란 실용주의자가 미 대통령이 되었던 탓에 평창의 기적이 가능했습니다. 3수해서 얻은 쾌거였으나 역사를 바꾸려는 하느님 계획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저는 '평창'平昌이란 말뜻을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평평할 '平'과 창성하고 번성할 '昌'이 합성된 말 '平昌'은 누구도 홀로 소외됨 없이 더불어 번성한다는 뜻을 담았습니다. 이것만큼 올림픽 정신을 잘 드러낸 말이 어디 있을까요. 하느님 계획을 이루기에 평창만큼 좋은 곳이 없었기에 이곳을 택해 평화의 기운을 펼치셨다고 믿습니다.

지역(터) 이름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 삶을 드러내는 것이겠지요. 여러분들의 삶이 곧 '平昌'이란 귀한 뜻을 만들어 냈다고 믿습니다. 하느님 평화라는 새 술을 담을 그릇으로 여러분들, 평창 주민들이 제격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큰 뜻을 품고 '平昌'의 이름으로 하느님 평화를 일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우리는 지난 70년 동안 우리들 동족이 살고 있는 북쪽을 잘 몰랐습니다. 분단 체제를 자신들 정권 유지의 도구로 만든 거짓 위정자들 때문에 그곳을 사람 사는 공간이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악의 축이란 말이 있듯이 그곳은 뿔난 악마들만 사는 곳인 줄 알았습니다. 북한 주민을 기획 탈북하게 한 우리 정부의 거짓말도 그대로 믿었습니다. 우리들 가슴속에 박힌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한 어린이 말도 날조 가능성이 있음을 최근에서야 알았습니다.

지난 정부 시절 위정자들은 '북한 붕괴론'을 공공연히 선포했습니다. 남북 상생의 길이었던 개성공단마저 폐쇄시켰고 금강산을 향한 강원도 길을 봉쇄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정작 붕괴된 것은 북한이 아니라 지난 정부가 퍼트린 '북한 붕괴론'인 것을 여실히 경험하고 있습니다. 북미 대화를 통해 최강대국 미국과 자신의 미래를 위해 당당한 협상을 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북한이 졸지에 무너지면 북한은 중국 쪽으로 더욱 기울 것이고 동북아 균형을 깨쳐 오히려 전쟁 확률을 높일 수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이 이 현실을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정말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북의 붕괴입니다. 당장 통일까지는 아닐지라도 남북 평화 체제를 만드는 일이 화급합니다. 6·25를 경험한 탓에 쉽지 않겠으나 북한을 돕고 지키는 일이 형제를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뜻이겠습니다. 하느님은 지금 평창의 기독교인들에게 원수와 더불어 먼저 화해한 후, 당신에게 예배할 것을 주문하고 계십니다. 이 마음속에 '골고루 번영하라'는 平昌의 뜻, 곧 평화의 새 술이 담길 수 있습니다.

3.

3대에 걸친 북한의 세습 체제를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주체사상에 터 잡아 '구호'에 살고 '구호'에 죽는 체제로 지난한 세월을 버텨 왔습니다. 6·25 당시 초토화한 경험을 갖고 있기에 북한은 경제보다는 핵(무기)를 갖고 체제를 지키려 했습니다. 그 와중에서 북의 백성들 희생이 너무 컸음을 다 알고 있습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햇볕 정책으로 10년 동안 매해 큰 다리 하나 지을 수 있는 돈 3000억을 지원했을 뿐인데, 백성들 먹이지 않고 핵무기 개발에 썼다고 이 땅의 보수 언론들이 과도하게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한 번도 현금을 지불한 적이 없었음에도 말입니다. 비료와 농약 그리고 자재를 지원하였을 뿐입니다. 최근 북의 변화에 대해서도 거짓과 위장이라 혹평하고 적대했습니다.

정작 미국 언론은 달랐습니다. 자기 민족과 체제를 지키기 위한 북한의 정책, 최근 김정은의 급선회를 현명한 처사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1인 독재 체제 강화를 위한 탐욕스런 정책이 아니라 국가를 지키려는 고육지책이라 여겨 준 것입니다. 여전히 미흡하나 적국인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 주었습니다. 미국을 위협할 만한 핵 탑재 미사일을 개발했으나 북의 김정은은 주린 창자를 움켜쥐며 만들었던 무기를 버리고 백성을 위해 경제를 살리겠다고 나섰습니다. 성서의 말씀처럼 칼과 창을 낫과 쟁기로 바꾸려고 그들로서는 정말 어려운 모험을 시도한 것입니다.

진보적 정치 평론가 유시민은 2·3세 기업 총수들이 김정은만큼 혁신적 사유를 해 본 적이 있었는가를 묻기도 했습니다. 북쪽으로서는 사활을 건 모험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지금처럼 대북 제재가 지속되면 북한 체제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동북아 평화를 깨며 한반도를 위협에 처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북을 믿고 그들 스스로 서도록 지켜 주어야 옳습니다. 스스로를 '주체'라 여기며 외세에 당당했던 이들을 믿고 그들 입장에서 생각하는 평창의 기독교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4.

지금 세상은 출구가 없다고 아우성입니다. 자본주의가 그 본질을 잃어 平昌, 즉 평등하게 번영하지 않고 극소수만을 부자로 만들고 있는 까닭입니다. 세계 도처에서 극심한 빈부 차로 전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자본에 약탈당한 자연이 인간에게 그 폐해를 고스란히 돌려주고 있습니다. 금번 여름 경험한 이상 고온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절대다수를 빈곤층으로 만들었고 자연을 고갈시켰으니 지구의 미래가 위태롭습니다. 그렇기에 공산주의를 이겼다는 자본주의 운명도 풍전등화입니다. 이로부터 학자들은 자본주의의 종말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 석학들이—정작 신학자들이 아니라—바울을 오늘 이 시대를 구할 구원자로 불러내고 있습니다. 신약성서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바울서신에서 세상을 구할 메시지를 찾았던 까닭입니다. 바로 그 말씀이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9장의 내용입니다. 다메섹 체험 이후 바울은 '마치 ~가 아닌 듯이'(As if not) 살았습니다. 율법을 가졌으나 없는 자처럼 살았고, 자유로웠으나 종처럼 살았으며, 믿음이 컸으나 믿음 없는 자가 되어 살았습니다. 오로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삶이 바울에게 곧 복음이었고 부활의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더없이 율법을 내세웠고, 믿음을 자랑했으며 그리스도인 된 것을 떠벌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이가 우리가 주는 물에 목말라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들이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대형 교회들이 거짓 뉴스를 생산·유통하는 본거지가 되었으니 기막힌 노릇입니다. 시대의 구원을 위해 석학들이 소환한 바울의 말씀을 우리가 따라 지켜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남쪽이 아니라 마치 북쪽의 사람이 된 것처럼 여기며 우리들 미래를 염려하십시다.

무기를 버리고 살길(경제)를 취하려는 그들 절박감을 마치 우리 일처럼 여겨 보십시다. 핵은 그 자체로 반신학적이고 반생명적이나 핵을 갖고 자신들 미래를 흥정하는 북의 현실을 지금 우리들 일처럼 상상할 일입니다. 오로지 북쪽을 구원할 목적을 갖고서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아직 배부른 사람들입니다. 굶주린 사람들 형편이 잘 헤아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전쟁을 피해 이 땅을 찾은 이슬람 난민들이 여전히 거추장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성서는 역지사지易地思之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도 고향을 등졌던 아픈 경험이 적지 않습니다. 해방 후 첫 정부가 남의 땅, 상하이에서 탄생했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 가족들 중에서 미국에 이주하여 사는 이들 숫자도 적지 않지요.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 몸을 입고 인간적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서야 하느님 그분은 인간의 고통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성육신 신앙이 지금 바울에게서 'As if not'의 가르침으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평창 올림픽과 4·27 판문점 선언 이후以後를 사는 우리에게 남쪽 사람이 아니라 북의 사람처럼 생각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 존재를 '그리스도 안의 존재(Sein in Christo)'라 일컬으면서 말입니다.

5.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인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압니다. 분단 체제에 기생하며 자신들의 정치 생명을 이어 온 남북의 군부들, 정치가들이 있음을 잘 아는 까닭입니다. 6·25 전쟁의 아픈 경험 탓에, 공산주의로부터 내몰렸던 과거사로 인해 기독교인 우리들 마음이 잘 열리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곧 반공주의자이고 공산당은 무신론자란 도식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대역 죄인인 친일파들이 반공주의 옷을 입고 득세하는 기막힌 정치 판도가 생겨났습니다. 하여 이 땅에는 진정한 보수는 없고 종북/좌빨 프레임에 생명줄 거는 비겁한 정치인들만이 존재했습니다.

이 와중에서도 분단의 비극을 넘어설 목적으로 자신들 삶을 바친 이들이 있었습니다. 정치인들도 있었고 경제인도 존재했고 그리고 성직자, 문학인들도 그리했습니다. 지금도 북쪽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6·15 선언을 성사한 김대중 대통령, 개성과 서해 5°를 평화지대로 구상한 노무현 대통령, 소 떼를 몰고 자기 고향 이북으로 넘어간 정주영 회장, 김일성과 얼싸안았던 민족 시인 문익환 목사가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이 있었기에 문재인 대통령의 4·27 판문점 선언도 가능했습니다. 그에게 용기를 준 동력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의 선을 넘나드는 두 정상의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 벅차 했습니다.

성령만이 인위적으로 만든 분단의 벽을 부술 수 있다는 것이 우리들 믿음입니다. 사람은 막고 분열하나 하느님은 이들이 만든 벽을 허무십니다. 분단 70년을 맞은 지금, 촛불 혁명의 힘이 하늘을 감동해 좌/우 세계 이념들이 만든 분단의 장벽, 이념의 죄를 폐할 것을 확신합니다. 평화협정으로 남북의 사람들이 상호 오갈 수 있는 성령의 시대가 한반도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임한 하느님의 영이 사람 사이를 가른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시고 원수 된 것을 없이하셨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말씀을 '平昌'의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으십시다.

6.

에베소서 말씀 끝자락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 조문으로 된 율법을 폐하시고 자기 안에서 사람을 새롭게 하여 평화를 이루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율법 조문은 세상을 가르는 이념이라 읽어도 좋습니다. 그 이념들 일체를 예수께서는 자기 몸 안에서 폐하셨습니다.

그의 몸은 과연 어떤 몸이겠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몸이 아니겠습니까. 그 몸 안에서 모든 장벽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하나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남과 북이 사라졌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그랬듯이 분단 체제의 노예가 아니라 남북을 하나로 느끼는 마음으로 세상 살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평화를 위해 사는 새사람의 삶,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모습이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형제들과 먼저 화해한 후에 예배하라는 복음서 말씀의 본뜻과도 일치합니다.

형제간인 남북이 갈등하고 적대하는 한 우리는 아직 하느님께 예배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화해를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지속적인 용서와 사랑의 빚을 지는 일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판문점 선언 이후를 사는 기독교인이 된 우리의 운명입니다. 종북/좌빨만을 외치는 사이비 정치가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이 운명을 회피하지 마십시다. 예수의 마지막 기도처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옳습니다.

7.

이렇게 우리가 평화의 새 술을 담는 새 그릇이 될 경우 하늘은 우리에게 엄청난 미래를 선사할 것입니다. 통일을 대박이라 여기며 김칫국부터 마시는 일은 분명 삼갈 일입니다. 하지만 남쪽의 기술과 자본, 북쪽의 노동력과 토지를 결합한 상생적 경제모델이 실행될 경우 남북의 미래는 낙관할 수 있습니다. 개성, 인천 그리고 해주를 연결한 경제모델, 강원 북부권과 연결된 금강산 관광사업, 반전 평화 그리고 생태를 상징하는 비무장지대 내 UN대학 설립, 북한의 땅과 해협 전역에 묻혀 있는 자원들(석유, 희토류 등)이 한반도를 복되게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한 선결 과제는 남과 북이 바울의 말처럼 공동 운명체가 되는 일입니다. 미국 학자 프랑크 비예는 남북의 분단 현실을 한 몸에 두 머리를 지닌 '샴쌍둥이'에 비유했습니다. 이들은 개체성을 지녔으나 언제든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머리로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통제할 뿐이기에 상호 협력하는 법을 배워야만 생존 가능합니다. 삶을 위해 상대방과 신체적·감정적으로 조율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과 같은 분단 체제로는 상생이 불가능합니다. 평화 체제로 바뀌어야 서로 생존이 가능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분단된 남북의 관계가 샴쌍둥이에 비유된 것이 유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본래 우리들 모습이 아닌 까닭입니다. 그렇기에 2주 전 노회찬 의원과 같은 날 세상을 떠난 작가 최인훈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분단의 고통을 이생에서 다 치유하지 못하면 수백 번이라도 다시 태어나서 그 일을 이루고 싶다." - <바다의 편지>(삼인) 中

한반도 평화의 기운의 진원지인 이곳 평창의 사람들, 기독교인들에게서 이런 각오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본 설교문은 재미 정치학자 박한식의 <선善을 넘어 생각한다>(부키)와 신한대학교 탈분단경계문화연구원이 엮은 <경계에서 분단을 다시 보다>(울력) 외 몇 권의 책 내용을 중심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이정배 / 전 감신대 교수, 현장아카데미 원장

위 글은 8월 5일 평창 진부성결교회에서 열린 남북 평화통일 기원 예배 설교입니다. 전문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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