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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새로운 이해의 필요성
바울은 결코 믿음과 행함을 나누지 않았다
  • 김영석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8.07.11 18:07

믿음은 무엇이며,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또 그것은 행함을 배제하는가. 대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한 개인의 법정주의적 신분 변화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한 개인이 법정에서 어떻게 의롭다 하는 신분을 획득하는가 문제로 본다. 예수의 대속을 믿는 믿음으로 죄인이 의인이 되는 변화를 아우구스티누스는 imparted righteousness(의를 나눠 줌)으로, 루터는 imputed righteousness(의롭다고 간주함)으로 불렀다. 두 경우 모두 개인의 의로움을 한순간에 일어나는 신분의 변화로 본 것이다. 과연 바울이 이러한 개념의 개인의 의를 강조했을까.

New International Version 1984년판에서 위와 같은 개인적 의를 강조하기 위해 로마서 3장 22절을 이렇게 번역하였다. "한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예수의 신실함"으로 이 땅에 나타났고 그 의는 모든 신자의 동참으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 기치는 "오직 믿음으로"였다. 그는 야고보서를 싫어하였다. 그 이유는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서 1장 17절을 읽으며 개인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 하는 진리를 찾았다고 한다. 로마서 1장 17절은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믿음을 통하여 (혹은 믿음으로부터) 믿음으로 나타났다. 이는 의로운 자는 믿음으로 살 것이라 함과 같다."(필자 번역) "의로운 자는 믿음으로 살 것"이라는 말은 하박국 2장 4절에서 왔으며 히브리어 텍스트에서는 "그의 믿음으로"(의로운 자의 믿음) 살 것이라 했지만, 바울은 그냥 "믿음"이라고 했고, 소위 70인역(헬라어 번역서)에서는 "나의 믿음으로"(하나님의 믿음) 살 것이라 했다.

이러한 번역의 차이와, 바울이 왜 그냥 믿음으로만 했는지는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다만, 위의 어떤 텍스트이든 "믿음"은 "삶"을 수식하고 있다. 즉, 의롭다고 하는 자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냥 믿음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자"가 의롭다는 것이다. 그런데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의 하박국 부분을 다르게 번역하며 "믿음으로 의로운 자는 살 것이다"로 하였다. 이 번역은 매우 어색하고 문맥상 맞지 않다.

로마서 1장 17절의 헬라어는 이렇다. ho de dikaios ek pisteos zesetai. 이 헬라어의 번역은 "의로은 자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가 자연스럽다. 루터의 번역이 맞으려면 헬라어 어순이 달라야 한다. 즉, ho de ek pisteos dikaios zesetai으로 되어야 한다. 만약 이 이 어순으로 되었다면 즉, ek pisteos가 ho de 다음에 나오면, 루터의 번역이 맞다. 그러나 원어 순서는 그렇지 않다. dikaios가 ho de 다음에 바로 나와서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자연스런 번역은 믿음이 삶을 수식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며, 오늘날 대부분 영어 성서에서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도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며 충성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지식을 받아들인다거나, 한순간의 고백을 지칭하지 않는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고, 신뢰했기에 한평생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의 신뢰를 지켜 나갔다. 그가 결코 순탄한 삶을 살지 않았고, 때로는 용감하였으며 때로는 약하고 비겁한 모습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는 단순한 지식이나 일회적인 사건에 있지 않다. 바울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믿음에 연결하며 의롭다고 하는 자는 믿음에 의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믿음은 신뢰이며 충성이다.

바울에게서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 뜻대로 사는 것이며, 또한 그분의 뜻을 이 땅에 펼친 그의 아들 예수의 신실함에 동참하는 것이다. 믿음을 명사가 아니라 동사("충성하다")나 형용사("신실하다")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믿음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믿음은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구체적인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른다고 할 때, 그 근거는 무엇인가. 구약에서 단연히 하나님은 의롭다(히브리어: tsadiq, tsedaka). 의롭다는 말은 그분의 성품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행한 옳은 일이다. 절망의 인간에게 희망을 주며, 불의의 사회에 공의와 정의를 세우며, 억울한 자를 풀어 주며, 억압당하고 굶주린 자에게 해방을 주며, 현세의 고난에 떠는 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그런 행위이다. 구약 선지자들은 이러한 일에 헌신을 하고 하늘의 뜻을 전달하고 지도자를 꾸짖고 백성을 위로하는 일을 하였다.

구약에서 오랫동안 하나님의 의는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가 그분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 땅에 실현하였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이며, 그것이 로마서 3장 22절에 나온다. 여기에 그 유명한 pistis christou 구절이 나타난다. 이것을 "예수의 신실함"으로 번역하는 것이 "예수를 믿음"보다 더 타당하다. 예수는 "하나님의 의"의 실현을 위하여 온몸과 마음을 바친 것이며 죽기까지 그 뜻에 따랐다. 즉, 죽음을 불사하는 그의 신실한 삶, 곧 행동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나게 만든 것이다.

번역상 "예수를 믿음"도 틀린 것이 아니지만 바울이 어떤 의미를 더 강조하였을 것인가는 우리가 생각하고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의 신실함보다는 우리의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번역하는 경향이 뚜렷하다(필자가 아는 한, 영어 성경의 Common English Bible을 제외하고).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그분의 신실함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예수를 주술적 대상으로만 여기고 그분의 삶의 실체와 목적을 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단순히 더 강력한 "신"으로 모시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면 신자의 믿음 혹은 충성은 어디에 어떻게 연결되는가. 로마서 3장 22절의 끝부분에 신자의 믿음이 나온다. 로마서 3장 22절을 필자가 번역하면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나타난바 이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이다." 대부분의 번역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나타난다고 하고 있다. 이러면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첫째는 바울은 왜 더 명확하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문구를 쓸 수 있는데 굳이 오해할 만한 pistis christou(소유격, genitive case)를 썼을까 하는 것이다. 즉, pistis en christo라는 표현을 쓰면 누가 봐도 이것은 예수를 믿는 것으로 이해한다. En은 전치사로 영어의 "in"과 같다. 둘째로 바울이 pistis christou를 예수를 믿는 것으로 의도했다면 굳이 마지막 부분,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불필요한 반복이다.

로마서 3장 22절에서 바울의 핵심 포인트는 세 가지다. 첫째는 "하나님의 의"(우리 개인의 의가 아니라)가 나타났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나타났다는 것이고, 셋째는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믿는 자에게 동일하게 실현될 것이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미 필자가 쓴 책에서 밝힌 바 있다(A Theological Introduction to Paul’s Letter; 한국어 번역: <바울의 삼중 신학>).

그러면 믿음과 의와는 어떤 관계가 있나. 즉,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는 "우리는 이제 율법의 행위(works of the law)가 아니라 pistis christou(예수의 신실함 혹은 예수를 믿음)로 의롭게 된다"고 한다. 여기에 다시 pistis christou가 나타나는데, 대부분 예수를 믿음(faith in Christ)으로 번역하나 예수의 신실함(Jesus’ faithfulness)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며 의롭다는 개념을 앞에서 본 법정주의적 신분의 변화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갈라디아서를 이해하는데 훨씬 더 좋다.

의롭게 된다는 것은 헬라어 동사 dikaioo에서 왔으며 이것은 관계적 용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선다는 뜻이며 의를 따라 사는 삶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적 믿음에 동참함으로 가능하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믿음의 선행자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신실함을 좇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로마서 3장 26절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의 신실함을 공유하는 자를 의롭다 할 것이다." 이것은 필자의 번역이다. 여기서도 pistis christou가 나타난다. 이를 예수의 믿음으로 보는 것이다.

이 글을 맺으며 필자는 강조하고 싶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어떤 지식이나 단순히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충성이며, 동시에 예수의 신실함을 따르는 그의 종, 바로 그리스도 같은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의가 온 땅에 충만하게 함이다. 이렇게 보면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곧 행함이며 야고보서와 다르지 않다. 야고보 교회에서 바울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말하길, 믿음만 있으면 되지 행함은 필요 없다고 말하지만 야고보 저자는 분명히 한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애초부터 그런 믿음은 없다. 바울의 설교를 듣거나 그의 편지를 읽고 오해한 자들이 그가 말하는 믿음(pistis)을 잘못 해석하여 행함을 분리한 것이다.

바울은 결코 믿음/행함의 이분법을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로마서 3장 31절에서 반문한다. 믿음이 율법을 폐하느냐?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 답한다. 믿음은 아브라함 때부터 있었으며, 그 이후 항상 그것이 신앙생활의 기본이었다. 율법은 믿음으로 해석되고 행해져야 하며, 모든 행동은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 믿음이란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충성을 말한다.

한국교회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믿음"과 "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이를 통하여 한국 사회에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길 희망해 본다. 바울의 관심은 어떻게 한 개인이 의롭게 되는가가 아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인가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어떻게 올바르게 유지하느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좇아 사는 삶이며, 이는 정의와 사랑의 관계이다.

김영석 / 버지니아유니언대학교 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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