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떠나 대학교 1학년까지 5년간 유학 생활을 했다. 5년 중 4년을 보낸 고등학교(St.Croix Lutheran High School)는 루터교단에 속해 있었다. 매일 모든 교사와 직원 및 학생이 함께 30분간 예배에 의무 참여하고, 매 학년 종교 과목을 필수로 이수해야 할 만큼 기독교 색채가 뚜렷했다.

루터교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사상을 토대로, 구교에서 갓 독립했을 당시 프로테스탄티즘 정신을 표방하는 교파다. 루터교가 세속적 직업 활동에 관한 성서 해석에서는 타 개신교 교단과 다소 상반되는 전통주의적 성격을 보이나, 다른 여러 방면에서는 미국 대륙까지 이어져 온 청교도주의적 개신교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유럽 내 루터교는 여전히 전통주의적 사고를 고수하고 있지만, 미국 루터교는 유럽식 전통주의적 사상에서 벗어나 미국적 청교도식 사상을 표방하기도 한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또한 유럽식 전통주의가 아닌 미국식 청교도주의 루터교에 속했다. 루터교단 소속 고등학교에서 생활한 4년과 더불어, 증조부모에게서 4대째 이어져 온 집안에서 모태신앙으로 자란 탓에, 미국과 한국 개신교를 비교할 기회가 많았다.

한국에는 개신교가 아닌 천주교가 먼저 들어왔다. 유럽 선교사 중심의 천주교는 1700년대 후반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개신교는 그보다 100년 후인 1800년대 후반부터 미 대륙의 청교도주의적 선교사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한국에 전파됐다. 이미 정착한 구교 천주교에 맞서, 1800년대 후반에 이르러 미 대륙 대부분을 개척한 후 이를 넘어 해외로의 진출까지 이뤄 나가기 위해,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은 물밀듯이 한국에 들어왔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한국에 근대 문명을 적극 제공해 주는 것으로 조선 후기 많은 이를 개종하게 했다.

이렇듯 한국과 미국의 개신교는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복음을 전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다수 한국 개신교회가 초기 미국 선교사들을 무조건적으로 예찬만 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이 든다. 미국 개신교에 내재돼 있는 쓴 뿌리를 따라, 한국교회도 개신교의 본질과 점차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한국 개신교 정착 과정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에 대한 한국교회의 구체적 환상들과 이에 따른 미국 개신교 특징들을 ①선민사상 ②종교적 반지성주의 ③구교와 유럽 사회에 대한 반감 ④문화적 배타주의 ⑤자본주의와 종교 사업화라는 5가지 항목으로 나눠서 살펴보려 한다.

한동대학교 글로벌리더십학부 류대영 교수가 2001년 출간한 <초기 미국 선교사 연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일부를 참고했으나, 이 책이 주로 미국 선교사의 중산층적 성격을 밝히는 것에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본 글의 내용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밝힌다.

1. 선민사상
- 미국의 근대 문명과 종교 전파 사명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한국은 급속한 근대화를 이루었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한국의 많은 사립대학을 설립했다. 이들이 영향을 준 것은 교육 분야만이 아니었다. 선교사들이 들여온 서양식 의복, 음식, 건축양식 등은 빠르게 보편화했고, 한국은 여러 방면에서 근대화를 이루었다. 서양 문명이 가져다준 지식, 편리 등은 많은 조선인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이내 이들은 개신교까지도 받아들인다.

19세기 후반 많은 미국 선교사가 한국으로 들어와 빠르게 개신교를 정착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명의식 때문이다. 미 대륙을 개척한 이전 세대들을 보고 자란 이들은 해외 미개척지를 향한 근대 문명과 종교 전파에 대한 사명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 사명감의 바탕에 있는 것이 미국식 선민사상이었다.

미국 백인 개신교인들은 세계 근대화와 종교 전파에 앞장서도록 신이 자신들을 선택했다고 믿고 있었다. 이는 1845년 미국이 텍사스를 자신들 영토로 합병했을 당시 저명한 칼럼니스트였던 존 오 설리반(John L. O’Sullivan, 1813~1895)에 의해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단어로 표현됐다. 아메리카 대륙 개척에서부터 텍사스 합병까지를, 모두 신에 의해 부여받은 특별한 의무이자 권리로 본 것이다. 미국 주류 사회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은 오늘날에도 과거 및 현재 미국을 표현하는 사회학적 용어로 자리 잡았다.

미국 선민사상은 국제사회에서 아무런 힘이 없었던 조선 후기 사회에까지 근대 문명과 복음이 전해지도록 했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한편으로는 이것이 스스로를 세계 중심으로 보고 모든 국제 정세를 통제하려는 오늘날 미국 정부와, 자신들만이 옳다고 하며 타 종교 타 문화를 배척하기 급급한 한국 개신교회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2. 종교적 반지성주의
-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의 유사과학

미국 청교도 선교사들이 한국 근대화와 고등교육 발전에 큰 토대를 마련한 것은 사실이다. 역설적이게도, 미국 청교도주의자 상당수가 비성경적 지성을 절대 금기하는 종교적 차원의 반지성주의를 표방하기도 했다. 그들은 성경에 나온 '문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절대화하며,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내용에 관한 지식과 지성을 세속적으로 여기며 부정한다. 그러한 지식의 교육과 전파를 엄격히 정죄하고 차단하는데, 이러한 입장을 가진 청교도주의자들 또한 한국 개신교에 영향을 끼쳐 그 여파가 계속되고 있다.

대표 사례가 유영민 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과, 박성진 전 중소벤처기업부장관 후보자를 통해 논란이 됐던 창조과학이다. 이후 진화 현상을 인정하거나 창조과학회에서 사퇴하여 두 사람 모두 논란을 잠재웠으나, 논란 초기 유영민 장관은 창조과학회 소속 인물과 공동으로 쓴 저서로, 박성진 후보자는 창조과학회 이사로 활동한 이력으로 도마에 올랐다. 창조과학회는 성경의 주관적 해석을 통해 근현대 생물학의 토대가 되는 개념인 진화 현상을 부정하는 단체로, 지구의 나이를 6000년으로 보는 젊은지구론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창조과학회는 오늘날 미국에서도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ICR)라는 단체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진화는 수많은 생명과학자에 의해 확인된 과학적 현상이다. 진화를 부정한다면 현대 생명과학은 존립 자체가 불가하다. 또한 지구 나이가 46억 년이라는 사실은 수많은 연구를 통해 천문학계에서 오래전부터 주류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론이다. 더불어 미국에서도 '공립학교에서는 진화론을 가르칠 수 없다'는 내용을 담은, 1925년 제정한 버틀러법(Butler Act)을 1967년 완전히 폐기했다.

반지성주의는 종교적 측면을 넘어서서 정치사회적으로도 나타난다. 이는 유럽에서 미 대륙으로 건너와 식민지를 개척한 계층들의 특징으로 잘 설명된다. 유럽에서 주체성을 갖고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귀족 상류층은 미국으로 올 이유가 없었다. 고된 항해를 거쳐 척박한 광야를 개척하며 살아가야 하는데도 오직 자유만을 위해 미 대륙으로 건너온 이들은 유럽에서 경제·사회·종교적으로 박해를 받던 이들이었다. 유럽 내 상류 엘리트층이 가진 고상한 지성은 이들을 멸시하고 소외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였다. 그렇기에 대서양을 건너오고자 했던 이들은 유럽 내 상류 엘리트층의 지성에 깊은 반감이 있었고, 이것이 구체적으로 미국적 반지성주의로 표출됐다.

미국식 반지성주의는 미국 초기 청교도 정신에도 영향을 미쳤고, 종교적 측면에서 성경의 '전반에 걸친 맥락적 내용'이 아닌 '문자 그대로'만이 진리라는 식의 사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물론 한국에 온 모든 미국 개신교 선교사가 이러한 반지성주의를 표방했다면 많은 대학들이 설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당 수의, 혹은 적어도 일부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이러한 반지성주의를 고수했고, 그것이 오늘날의 한국과 미국 개신교 사회에까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을 만큼 결코 미미하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3. 구교와 유럽 사회에 대한 반감
- 금주

개신교가 구교에 반발한 종교개혁으로 시작되었기에, 구교에 대한 개신교의 반감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 입장에서 조선에 먼저 발을 디딘 구교 천주교는 눈엣가시였다. 이는 음주를 절대적 금기로 여겼다는 점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유독 한국 개신교에서만 눈에 띄게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가 음주에 대한 강한 정죄 의식이다. 이것이 미국 개신교인들의 청교도적 금욕주의 영향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으나, 이는 17세기 아메리카 대륙의 척박하고 고독한 환경에서, 엄격한 규율로 스스로를 지키며 식민지를 직접 개척해야만 했던 1세대 미국 청교도인들의 성향에 국한된다. 몇 세대 후인 19세기 후반 미국 선교사들은 '절대적' 금주를 행할 만큼 철저한 금욕주의자들은 아니었다.

이들은 앞 세대가 일구어 놓아 체계화한 미국 사회 기반 위에서 비교적 안정되고 여유로운 삶을 살았다. 류대영 교수의 <초기 미국 선교사 연구>에 언급된 이들의 한국 선교 생활 또한 금욕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의 상류 지배층적인 삶을 살았다. (중략) 이런 선교사의 모습을 보면서 초기 선교사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은 그의 일기 속에, 선교사의 일이란 '희극'(farce)이요 '맛나게 쉬운 일'(a nutty soft thing)이라고 적었다. (중략)

한국에 왔던 미국 선교사들은 19세기적인 '복음적' 개신교를 대변하고 있었을 뿐, 다른 선교지에 갔던 동시대의 선교사들보다 신학적으로 특히 보수적이었다는 증거는 눈에 띄지 않는다. (중략) (단지) 선교사들과 그들의 청교도 선조들 간의 차이점이라면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자기들의 종교를 전하고 가르치는 선생이었다는 사실이다. 선생은 자신이 가르치는 것의 진실성을 과장되게 강조하고 또 자기 스스로도 잘해 내지 못했던 것을 학생들에게 요구하기 마련이다. 선교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초기 미국 선교사 연구>, 64~65쪽, 103~104쪽)

실제로 성경조차도 음주를 '절대적'으로 금기시하지 않는다. 이를 19세기 후반 당시 미국 개신교인들이 가장 흔히 썼을 킹제임스성경 문구와, 미국 개신교 신학자 유진 피터슨이 12년에 걸쳐 현대인이 이해하기 쉬운 문체로 번역해 한국에도 2017년 완역된 한글판 메시지성경을 함께 인용하여 살펴보았다.

성경에는 단지 "And be not drunk with wine, wherein is excess;"(KJV, Ephesians 5:18a), "과음하지 마십시오"(메시지, 에베소서 5:18a)라는 내용이 있을 뿐, "Drink no longer water, but use a little wine for thy stomach’s sake and thine often infirmities"(KJV, 1 Timothy 5:23), "포도주를 조금씩 사용하십시오. 포도주는 그대의 소화 기능에도 효과가 있고, 그대를 괴롭히는 병에도 좋은 약입니다"(메시지, 디모데전서 5:23)와 같이 오히려 '필요 상황에 따라' 음주를 권하는 내용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 또한 실제로 포도주를 마셨다는 사실이 복음서에 기록돼 있다.

정황상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술을 금기시한 데는 앞서 전파된 천주교와 차별되는 개신교만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한 이유가 컸던 것 같다. 하지만 음주 여부 자체가 기독교인, 특히나 천주교가 아닌 '개신교인' 정체성을 결정짓게 하는 척도가 돼서는 안 된다. 식과 성을 비롯하여 다양한 종류의 게임과 오락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즐거움이 그러하듯, 음주 또한 절제와 책임이 따라야 한다.

음주와 술 자체는 선이나 악이 아니라, 쓰임에 따라 선도 될 수 있고 악도 될 수 있는 중성적 행위와 도구일 뿐이다. 이웃의 기쁨에 함께 즐거워하고, 이웃의 슬픔에 동참하며 위로할 수 있는 '적당한' 음주나, 주의 성전이 되는 내 육체와 정신을 지키기 위한 금주나, '주를 위한 것'이라면 감히 정죄할 수 없다.

그렇기에 유독 한국 개신교에서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음주에 대한 엄격한 정죄는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교묘히 이용당한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4. 문화적 배타주의
- 절과 제사 금지

술과 더불어, 천주교는 수용했지만 개신교는 수용하지 않은 또 다른 것이 제사다. 제사는, 구교에 대한 개신교의 반감뿐 아니라 미국 주류 개신교 내부 깊숙이 자리한 문화적 배타주의도 시사한다. 온전히 자신들 문화만 옳은 것이라는 우월적 분리주의를 가진 미국 백인들은 절과 제사라는 한국의 문화를 용납하거나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 선교사들이 외롭고 낯선 환경 속에서도, 조선인이라는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며 사랑을 전하는 데 애썼을 것'이라는 한국 개신교인들 생각은 막연한 환상일 수 있다. 미국 백인 선교사 중 적지 않은 이가 조선인과는 철저히 분리된 삶을 지키고자 했다.

"선교사들은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위해 일하는 것과 한국 혹은 한국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을 분명히 구별했다. 어떤 이유에서였건 그들은 한국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한국 사람과 더불어 같이 살면서가 아니라 한국 사람으로부터 분리된 자기들만의 세계 속에서 보여주려 하였다. (중략) 개항지의 외국인 거주지에 만들어진 선교 구내는 한국 사람들은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는 특별한 곳이었다. (중략)

미국 선교사들의 삶이 한국적 상황 속에서 거의 사치에 가까웠다는 점은 미국 선교사와 프랑스 천주교 신부들과의 비교에서 매우 극명하게 드러난다. (중략) (프랑스 천주교 신부들은) 평민들이 먹고, 입고, 사는 그대로 따라 하며 완전히 동화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프랑스어를 거의 잊어버리는 경우까지 있었다 한다. (중략) 이것은 같은 시기에 경쟁적으로 선교를 하면서 갈등을 겪었던 미국 선교사들과 크게 구별되는 점이었다." (<초기 미국 선교사 연구>, 57쪽, 86~87쪽)

이렇듯 천주교 선교사들은 조선인과 '동등한' 인간으로서 함께 먹고 마시며 더불어 살아가고자 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절'이라는 행위가 한국인과 얼마나 친숙하고 일상적인지를 알았다. '절'로 나타나는 조선인의 정과 예를 이해했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전통문화인 제사가 조선인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 정신의 중심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매일 가까이서 지켜보며 깨달았고 존중했다.

기도의 궁극적 대상이 성부·성자·성령을 가리키고만 있다면 조상을 생각하고 추모하는 제사 행위 자체는 하나의 문화일 뿐,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반면, '원주민'과 철저히 분리된 삶을 지키고자 했던 미국 백인 선교사들은 한국 문화를 한국의 시선에 맞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기준과 틀 안에서 봤다. 이러한 그들의 분리주의는 당연히 우리 문화에 대한 오해나 멸시로 거듭될 수밖에 없었고, 구체적으로는 제사와 같은 우리 전통에 대한 금기로 드러났다.

제사는 예와 효를 중시하는 한국 문화를 대표한다. 윗대를 기리며 나의 뿌리를 생각해 보고, 내 존재가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는 겸손의 문화이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 내 존재에 대한 시초까지 찾아가다 보면 충분히 신에 대한 생각에까지도 이를 수 있는 경건하고 신성한 종교의식이다. 물론 기독교 차원에서 볼 때, 제사의 궁극적 대상은 조상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지켜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제사 행위나 형식 자체에 대한 경멸과 정죄는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의 우월적 배타주의에 발을 맞추는 사대주의라고 본다.

한민족에게 '절'은 일상적 행위 문화다. 왕과 같은 권위자에 대한 절은 절대적 복종을 내포하기도 하지만, 가족과 친지, 이웃 간에서 행하는 일상적 절은 인사의 표현에 가까웠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명절이면 조부모님이나 부모님, 여러 웃어른께 절을 하며 인사를 드린다. 하지만 동아시아 외 다른 지역 사람들은 왕이나 신 같은 절대적 권위 앞이 아니라면 쉽게 엎드려 절(bow down)을 하지 않았다. 백인 사회나, 성경에 나오는 중동 민족이나, '엎드려 절'을 하는 행위는 '절대복종'을 의미했지만, 한국인에게 '절'은 삶에서 늘 함께하는 인사와 감사, 애도의 표현이었다.

일상 속에서 함께하고자 했던 천주교 사회는, 삼위일체 신에 대한 시인과 이러한 신을 향한 기도를 바탕에 둔다면 차이를 '동등한' 문화로 존중하며 이해했다. 개신교 사회는, 이를 '우월함'과 '미개함'으로 분리해 자신들이 생각하는 미개함을 공격적으로 제거하려 들었다.

얼핏 다양성을 존중하는 듯 보이는 미국은 여전히 앵글로색슨 백인 중심 정치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종차별 사건이 하루에도 수백 건씩 일어나고 있으며 이민 규제도 더 강화되는 추세다. 이러한 백인 중심의 인종적, 문화적 배타주의 현상 내부를 들여다봤을 때, 개신교인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도 이제는 놀랍지 않다. 미국 백인 개신교인들은 자신들 문화와 문명에 대한 우월의식으로, 아메리카 원주민에서부터 오늘날 히스패닉 사회까지 수많은 민족의 귀한 전통을 미개한 것으로 취급하고 '제거'하거나 '개조'해 왔다. 한국 개신교만큼은 이에 맞서 전통문화의 귀중한 정신과 형식을 지키며 그 안에 개신교의 중심 가치와 교리를 함께 녹여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5. 자본주의와 종교 사업화
- 과연 신은 어디 있는가

19세기 미국 개신교인의 또 다른 특징 하나는 자본주의 가치관이 뚜렷했다는 것이다. 개신교인들이 경제적 활동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현상을 화두로 그 원인과 상관관계를 연구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도 언급하는 내용이다. 어떻게 '돈'을 만 악의 근원으로 여기는 성경을 근본으로 하는 개신교인들이 역설적이게도 '돈'을 벌거나 불리는 데 관심을 두고 열심을 다해 중상류층으로 자리 잡았는지는 매우 복잡한 인과관계가 얽히고설켜 있어 한마디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에 온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 중 일부 또한 직간접적으로 무수한 상행위를 통해 재정적 이익까지 챙겨 나갔다는 사실이다.

"선교사들 중 일부는 여러 가지 경제적 이권에 개입하거나 미국 자본주의가 만든 물건을 소개하고 판매함으로써, 아니면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본주의적 노동관과 재산관을 한국에 전함으로써 자신들이 자본주의 신봉자라는 것을 드러내었다. (중략) 선교사들이 행하는 복음 전파를 근거로, 서구 열강이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진출을 종교적, 윤리적으로 정당화시킨다는 점은 아담 스미스(Adam Smith) 때부터 이미 지적되어 온 것이었다. 따라서 선교사가 미국의 상업적 진출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많은 선교 옹호론자들이 즐겨 강조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초기 미국 선교사 연구>, 213쪽)

이처럼 미국식 자본주의적 개신교를 보고 받아들인 한국의 개신교회는, 오늘날 여느 기업들과 다를 것 없이 각종 포퓰리즘과 물질주의적 홍보를 통해 교인 수를 늘리고 교회를 크게 성장하게 한 후, 자식에게 세습하기에 이르렀다. 미국도 여전하다. 유명 가수들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각종 찬양, 설교 집회의 미국 전역 투어를 통해 돈을 모으고 교회를 키운다. 한미 개신교가 믿는다는 사랑의 신은 과연 어디 있는 것인가.

민중과 사랑의 종교,
개신교의 건강한 가치 실현을 위해

한국과 미국을 막론하고 교회 지도자들이 돈과 시간은 물론 이성과 감정, 심지어 성까지도 교인들에게 바치기를 요구했다는 폭로는, 한 명의 개신교인으로서 부끄럽고 창피하고 화가 나기에도 그 시간과 에너지가 아까울 만큼 오늘날 미디어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이야기다.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개신교를 전한 영향으로 많은 한국교회가 친미 성향을 보인다. 초기 미국 선교사들과 미국 개신교회를 다룰 때 비판하기보다는 무조건적으로 업적을 기리고 따르는 교회가 대부분이다. 특별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술과 제사에 대한 금기도 배경에 대한 생각이나 비판 없이 많은 한국 개신교회가 열심을 다해 따르려 한다. 이제는 초기 미국 백인 선교사들과 미국 개신교회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이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잃어버린 귀중한 한국의 문화를 다시금 생각해 봐야 할 때가 아닐까.

미국 개신교회가 한국교회에까지 박아 놓은 선민의식, 반지성주의, 타 종교와 타 문화에 대한 배제, 교회에까지 침투한 자본주의라는 못을 시원하게 뽑아 버려야 한다. 한국에서 주체적으로 독립적으로 구축한 예배 및 교회 문화와 함께 성경이 말하는 건강한 가치들을 실현하려 애쓴다면, 오늘날 이 땅에서 '개독'이라고 불리는 이 종교가 다시금 진정한 사랑을 행하고 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최은빈 / 부산 맑은물교회 교인, 부산대학교 생명과학과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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