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은 수많은 사람의 삶과 죽음이 뭉쳐 있는 장대한 이야기입니다. 역사는 무장봉기를 일으킨 남로당 제주도당, 양민을 학살한 군경과 서북청년회, 이를 조장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등을 주요하게 다루며 사건의 인과관계를 따지고 있지만, 사건 이면으로 깊이 들어가면 비극을 온몸으로 겪은 평범한 사람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그들 중에는 기독교인도 있었습니다.

동족상잔의 현장에서 기독교인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사료집을 읽고 연구자들을 만나면서 알게 된 이들의 모습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피해자 편에 섰던 이가 있는 반면, 가해자 곁에서 총칼을 든 사람도 있었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가 같은 신앙인이라는 사실이 모순처럼 다가왔습니다.

<뉴스앤조이>는 앞서 '서북청년회' 기사를 연재했습니다. 이번 기획은 그 후속편입니다. 4·3 사건에서 나타난 기독교인들 모습을 살펴보면서 신앙의 길을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 기자 주

[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올해는 제주 4·3 사건 70주년을 맞아 그 어느 때보다 4·3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정부는 2018년을 제주 방문의 해로 지정하고, 제주 시민단체 65곳을 모아 '제주 4·3 70주년 기념 사업 위원회'(강정효·강호진 공동집행위원장)를 조직했다. 지금도 전국에서는 4·3을 주제로 각종 강연·토론회·포럼·음악회·영화제·전시회 등이 열리고 있다.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4·3을 말할 수 있지만, 30~40년 전만 해도 4·3은 금기어였다. 4·3을 언급했다가 감옥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거나, 이적 행위 혹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4·3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는 시도는 일찍이 시작됐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제주대학교 학생들은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를 만들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당시 국회는 조사단까지 편성했지만, 진상 조사 활동은 1년 만에 무산됐다. 이듬해 5·16 군사 정변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군사정권은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 학생들을 용공·이적 행위 혐의로 구속했다.

1970년대에는 문인들이 4·3을 주제로 작품을 냈다가 고초를 당했다. 오성찬 소설가는 1971년 단편 '하얀 달빛'을 발표하고, 현기영 소설가는 1978년 <순이 삼촌>을 내놓았다. 하지만 작품들은 모두 회수 및 판매 금지 조치를 당했다. 1987년에는 이산하 시인(본명 이상백)이 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했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을 살았다.

제주 4·3 사건 진상을 밝히려는 노력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1988년, 제주 시민사회에서는 40주년을 맞아 추모 모임과 학술 세미나가 열렸다. 이때 4·3 사건을 민중 항쟁으로 해석한 기념비적인 연구물이 발표됐다. <제주도 4·3 민중 항쟁에 관한 연구>(박명림), <제주 민중 항쟁>(김명식), <잠들지 않는 남도>(노민영) 등이다. 1989년에는 4·3 사건 희생자를 위한 추모제가 최초로 거행되고, 제주4·3연구소가 조직돼 본격적인 진상 조사가 시작됐다.

1990년에는 <제민일보>가 4·3 사건 피해자의 증언과 채록을 모은 연재물 <4·3은 말한다>를 출간하기 시작하고, 1993년에는 제주도의회가 4·3특별위원회를 조직했다. 제주 사회에서 진상 조사 활동이 본격화하자 정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1999년, 4·3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이듬해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4·3위원회·고건 위원장)가 출범했다. 3년 뒤에는 4·3위원회가 진상 조사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4·3 사건 당시 수많은 민간인이 국가 폭력에 희생됐다는 사실이 밝혀질 수 있었다.

제주 4·3 사건은 여러 사람의 희생과 헌신으로 반세기 만에 진상이 드러날 수 있었다. 이들 중에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 기독교인도 있었다. 오성찬 소설가와 양조훈 이사장(4·3평화재단)이다. 이들은 도민들 마음속에 뿌리박힌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다. 오랜 기간 쌓인 두려움과 불안감에, 자식들에게조차 알리지 못했던 한과 슬픔을 달래기 위해 기꺼이 펜을 들었다.

오성찬 소설가. 한 초등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제주의소리

국내 최초로 4·3 소설 발표
'하얀 달빛', '겨울 산행',
'한라구절초' 등 30여 편
후손들 반목하는 모습에
용서와 화해 강조

오성찬 소설가(1940~2012)는 제주 서귀포에서 태어나, 1969년 <신아일보> 신춘문예에 '별을 따려는 사람들'로 등단했다. <제주신문>·<제남신문>·<제주투데이> 등에서 기자로 지내고, 향토사 연구에도 앞장서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민속연구관, 제주역사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4·3을 주제로 '하얀 달빛', '겨울 산행', '어느 공산주의자에 관한 보고서', '한라구절초', '사포에서' 등 중·단편 30여 편을 내놓았다.

오성찬 소설가가 1971년 쓴 '하얀 달빛'은 국내에서 최초로 4·3을 다룬 작품이다. 8세 때 경험했던 일을 짧은 이야기로 풀어냈다. 어느 날 갑자기 군인들이 찾아와 마을 주민을 학교 운동장에 소집해 학살한 사건을 담고 있다. 4·3 사건에서 가해자는 군경만이 아니었다. 소설 속 주인공 '아이' 아버지는 협조를 거부하다 무장대의 죽창에 찔려 목숨을 잃는다.

'하얀 달빛'이 수록된 첫 작품집 <별을 따려는 사람들>(현대문학사)은 출간된 지 얼마 안 돼 정부로부터 회수 및 판매 금지 조치를 당했다. 오 소설가는 이에 좌절해 한동안 4·3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한라구절초 – 오성찬 4·3 문학선>(푸른사상) 머리말에 이렇게 회고했다.

"그 후 상당 기간 4·3을 덮어 두고 지냈다. 다른 데 관심을 두고 있기도 했지만, 처음 작품집의 수거와 판금으로 용기를 잃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서 40대 중반인 1980년대 초에 또 한 마디 좌절을 겪고 고향에 눌러앉아 '제주의 마을' 시리즈를 내기 시작했다. 고향의 뿌리를 캐는 작업을 시작하고 나는 4·3이 섬사람 가슴에 어떤 생채기로 남아 있는가를 깊이 실감하고, 깨달았다."

향토사 집필은 그를 다시 4·3으로 떠밀었다. 제주 향토사를 쓰기 위해 여러 마을을 돌았지만, 곳곳에 4·3이 남긴 상흔이 가득했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도민들은 여전히 4·3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남들에게 쉽게 말하지 못한 억울한 사연들이 주민들 마음속에 오랫동안 곪아 있었다. 괴로움은 글을 쓰는 동인이 되었다. 그는 1988년, 도민들의 구술을 모아 단편집 <단추와 허리띠>(지성문화사)와 증언집 <한라의 통곡 소리 – 4·3 제주 대학살의 증언>(소나무)을 발간했다.

<뉴스앤조이>는 제주에서 오성찬 소설가의 유족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고인께서 희생자 가족들의 뼛속 시린 증언을 듣고는 당신의 일처럼 괴로워했다. 고인이 평소 암송했던 성경 구절이 있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19:40).' 도민들이 겪은 참상을 알리기 위해 매일 새벽 책상에 앉아 글을 썼다"고 말했다.

1989년에 쓴 소설 '어느 공산주의자에 관한 보고서'는 그의 대표작이다. 남로당 제주도당 조직부장 조몽구를 다룬 작품이다. 비둘기파(온건파)였던 조몽구는 매파(강경파)의 무장봉기 계획에 반대하다 4·3 발발 직전 일본으로 도주했다. 1951년, 한국전쟁을 틈타 부산에 들어왔다가 경찰에 체포되고, 10년을 복역한 후 제주로 귀향했다.

고향에는 그를 반기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아내와 자식 넷은 4·3 사건 당시 군경에 목숨을 잃었다. 그는 남로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폭도', '살인마'라고 불리며 평생 이웃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의 무덤에는 지금도 비석이 세워지지 않았다.

용서와 화해의 대표적 사례인 제주 하귀리 영모원. 오 소설가가 비문을 작성했다. 그는 모두가 역사의 피해자라고 인식했다. 사진 출처 4·3아카이브

오 소설가 유족은 "고인은 한마을에서 친구이자 형제처럼 지냈던 이들이 4·3 사건 이후 서로 원수가 되는 광경을 보고 굉장히 가슴 아파했다. 4·3이 낳은 저주였다. 후손들이 더 이상 반목하지 않고 서로 화해하고 상처를 치유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지 항상 고민하며 글을 썼다"고 했다.

기독교인이었던 오성찬 소설가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권력과 물질을 가까이하는 모습을 보고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2002년에 쓴 <우리 시대의 애가>(푸른사상)에서 교회를 '교회 주식회사'라고 표현하며 이렇게 지적했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사회를 계도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 사회의 개혁에도 못 미치는 '무풍지대', 한국교회는 교권 의식, 분파주의, 기복 사상, 배금사상, 물량주의 등으로 팽배해 있어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게 됐다." (41쪽)

<제주신문>·<제민일보> 4·3취재반장
난관 부딪힐 때마다 빌립보서 말씀 암송
"군경, 무장대, 도민 모두가 희생자"
4·3유족회·경우회, 화해와 상생 선언

4·3평화재단 양조훈 이사장은 1988년부터 <제주신문>·<제민일보> 등에서 '4·3취재반'을 이끌며 4·3을 알리는 데 앞장서 왔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된 뒤,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가 되어 4·3특별법 제정 운동에도 동참했다. 2000년에는 4·3위원회에서 수석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진상 조사 보고서 작성 실무를 맡았다. 저서로는 <4·3은 말한다>(1~5권, 공저), <4·3 그 진실을 찾아서>(선인) 등이 있다.

<제주신문>에서 4·3취재반이 결성된 건 1988년 3월이다. 민주화 바람이 땅끝 제주에까지 불었다. 양조훈 이사장은 6월 8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전국에 민주화 운동이 확산하면서 제주 4·3 사건 진상을 밝히자는 목소리도 커지기 시작했다. 4·3이 40년 동안 지하에 갇혀 있었다. 젊은 기자들의 강한 요구로 특별취재반이 조직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주변 사람들은 "4·3 하면 신세 그르친다", "'빨간 줄' 하나면 인생 망친다"며 그를 만류했다. 덜컥 취재반장을 맡긴 했지만 양 이사장도 속으로 갈등하고 있었다. 결심이 서지 않아 밤마다 침대에서 뒤척이고, 가위눌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는 교회에서 기도하는 도중 4·3 취재를 결단하게 됐다고 했다.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엎드려 기도했다. 이쪽저쪽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갈 테니 제발 도와 달라고 하나님에게 간구했다. 오랫동안 기도하고 나니 결심이 섰다. 진상 조사 과정에서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기도와 말씀으로 버텼다. 특히 빌립보서를 여러 차례 암송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 6-7)는 구절이다."

4·3평화공원에서 희생자들에게 대해 설명하고 있는 양조훈 이사장. 뉴스앤조이 박요셉

양 이사장은 4·3 사건 희생자 가족들을 취재하면서 끔찍한 참상에 놀랐다고 했다. 토벌에 가담한 군경은 도민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마음대로 희롱하다 참살해도 되는 하찮은 존재로 간주했다. 그는 "당시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범죄와 폭력을 통제해야 할 국가권력이 오히려 살인과 학살을 조장하는 쪽에 서 있었다"고 했다.

4.3은 제주에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세계사적으로 볼 때에는 한반도 분단과 동서 냉전의 전초전이었다. 양 이사장은 "4·3 사건의 본질은 강대국들이 세계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총소리 없는 전쟁이다. 토벌에 가담한 군경이나 봉기를 일으킨 무장대,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도민들 모두 역사의 희생자다"고 말했다.

70주년을 맞는 올해, 그는 제주 사회가 상처와 갈등을 넘어 화해와 상생을 바라봐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제주 4·3 희생자 유족들과 전직 제주 경찰 단체가 서로 화해한 사건을 예로 들었다. 2013년 8월, 4·3유족회와 제주도재향경우회는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화해와 상생'을 선언했다. 양 단체 대표는 기자회견에서 두 팔로 서로 껴안으며 "제주도민 모두가 피해자라는 입장에서 서로 아픔을 치유하고 제주 사회 발전에 동참하겠다"고 했다. 이들은 매년 4·3평화공원에서 합동 참배를 열고 있다.

한국교회에도 제주 사회의 화해와 상생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한국 교계는 4·3을 보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거나 침묵으로 일관했다. 제주에 있는 소수 목회자만 진상을 알리고 있는 상황이다. 그는 "한국교회는 4·3 사건 당시 서북청년회라는 이름으로 가해자 편에 서 있었다. 지금도 4·3을 단순히 무장대가 일으킨 폭동으로 보는 이도 있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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