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은 수많은 사람의 삶과 죽음이 뭉쳐 있는 장대한 이야기입니다. 역사는 무장봉기를 일으킨 남로당 제주도당, 양민을 학살한 군경과 서북청년회, 이를 조장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등을 주요하게 다루며 사건의 인과관계를 따지고 있지만, 사건 이면으로 깊이 들어가면 비극을 온몸으로 겪은 평범한 사람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그들 중에는 기독교인도 있었습니다.

동족상잔의 현장에서 기독교인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사료집을 읽고 연구자들을 만나면서 알게 된 이들의 모습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피해자 편에 섰던 이가 있는 반면, 가해자 곁에서 총칼을 든 사람도 있었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가 같은 신앙인이라는 사실이 모순처럼 다가왔습니다.

<뉴스앤조이>는 앞서 '서북청년회' 기사를 연재했습니다. 이번 기획은 그 후속편입니다. 4·3 사건에서 나타난 기독교인들 모습을 살펴보면서 신앙의 길을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 기자 주

[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1948년 10월 17일, 제주도 내 중산간 지역에는 송요찬 9연대장이 작성한 계엄령 포고문이 발표됐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해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 기간까지 전도 해안선부터 5㎞ 이외 지점 및 산악 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此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을 처할 것임."

해안선 5km 밖에 사는 중산간 지역 주민은 즉시 거처를 떠나 해변 마을로 이동하라는 내용이었다. 도민들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곧 있으면 겨울이었다. 조상 대대로 살았던 고향을 떠나 당장 어디로 갈 것이며, 잠잘 곳이나 생계는 어떻게 해결하라는 것인지 군의 처사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9연대는 포고문 발표 이후 이른바 '초토화 작전'을 실행했다. 12월까지 중산간 일대를 돌며 가옥을 방화하고 학살을 자행하며 중산간마을을 파괴했다. 미군 보고서는 당시 피해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모든 저항을 없애기 위해 모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이 유격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 학살 계획'을 채택했다. (중략) 섬에 있는 주택 약 1/3 파괴됐고, 주민 30만 명 중 1/4이 자신들의 마을이 파괴당한 채 해안으로 소개당했다. 마을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 45개 마을과 부분적으로 파괴된 43개 마을로부터 피난민들이 해안 마을의 수용소로 이동해 왔다." (USAFIK, G-2 Peridodic Report, No. 1097, April 1, 1949)

제주는 4·3 사건 당시 모든 도민이 적색분자라는 의미로 '레드 아일랜드'라고 규정됐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초토화 작전으로 파괴된 마을은 1949년 중반, 무장대와 토벌대 간 충돌이 진정 국면에 들어가면서 복원되기 시작했다. 군경은 폐허가 된 땅에 임시로 함석집이나 초막을 지어 주민들을 수용했다. 반면, 마을 84곳은 4·3 사건이 끝난 이후에도 끝내 복원되지 못했다.

일부 마을은 교회를 중심으로 재건됐다.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는 종교 시설 외에도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전란을 겪은 주민들이 서로 위로하고, 옷이나 음식 등 생필품을 나누며, 아이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70년이 지난 지금, 4·3 사건을 겪으며 만들어진 제주 교회는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뉴스앤조이>는 동란 속에 세워진 교회를 찾아가 목사들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토벌대장이 세운 봉개교회
마을 재건 중추 역할
설립 배경이 4·3이지만
구체적 언급 어려워

제주시 봉개동 소재 봉개교회(김태희 목사)는 1949년 9월 세워졌다. 당시 토벌대장 함병선 연대장은 마을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서부교회(현 성안교회) 이윤학 목사, 동장 임병기 씨와 교회 설립을 논의했다. 마침 지역 내 파출소에서 최용흥 경사 부인 김송남 집사가 몇몇 주민과 함께 정기적으로 기도회를 열고 있었다. 함 연대장은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개척했다.

창립 당시 봉개교회 이름은 함명교회였다. 함병선 연대장은 자신의 성 '함' 자와 작전참모 김명 대위의 이름 '명' 자를 조합해 '봉개리'를 '함명리'로 개칭했다. 교회도 지역명을 따라 함명교회로 지었다. 4·3 사건이 끝나자, 함명리는 주민들 요청으로 봉개리로 환원됐고, 함명교회도 1971년 봉개교회로 이름을 고쳤다.

함병선 연대장이 기독교인이었는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교인들 의견도 분분하다. 봉개교회 김 아무개 장로(80)는 기자와의 만남에서 "함병선 사령관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당시 봉개리에 교회가 없어 마을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교회를 세웠다. 지역 책임자와 가족들이 신자이니, 대다수 주민이 교회에 나왔다"고 말했다. 반면, 봉개교회에서 21년간 목회했던 김관진 전 담임목사는 "함병선 연대장이 지역 책임자였기 때문에 교회 설립에 관여하고 에배에 몇 번 나온 것뿐이지, 신앙인은 아니었다"고 전했다.

함명리는 당시 몇몇 가구가 모인 작은 마을이었다. 주민 센터도 없었고 교육 시설도 열악했다. 김관진 목사는 교회가 마을 재건 과정에서 행정·교육·복지 기능을 수행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봉개리가 낙후된 산촌이라 리사무소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주민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교회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다들 교회에 모여 세상 소식 듣고 마을 일도 보고 아이들을 교육했다"고 말했다.

1948년 9월 봉개교회 헌당식 사진. 당시에는 단기를 사용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봉개교회는 매년 교회가 창립한 9월이 되면 예배 시간에 4·3 사건을 얘기한다. 교회가 전란 속에 세워졌고, 마을 재건에 기여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당시 국가가 잘못해 죄 없는 도민이 희생됐다거나, 희생자를 추모해야 한다는 내용은 없다.

김관진 목사는 "교회 안에서 4·3은 꺼내기 어려운 얘기다. 군경에 목숨을 잃은 분이 절대다수지만, 우리 교회에는 무장대에 희생된 후손도 있다. 도민마다 4·3 사건을 보는 관점이 달라 목회자가 어느 한쪽 편에 치우쳐 말을 하기가 어렵다. 자칫 교회가 분열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교회가 설립한 역사만 언급해 왔고, 다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고 했다.

신의주 출신 영락교회 교인
4·3 사건 당시 예래교회 개척
"가해자 쪽에 선 교회가 회개해야"

예래교회(강승일 목사)는 1949년 3월,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서울에서 파견된 전투경찰이 세운 교회다. 신의주 출신 김두혁 경사는 해방 이후 북한 공산당 간부가 되라는 말을 거부했다가 불순분자로 찍혀 홀몸으로 월남했다. 그는 서울 영락교회에 다녔다. 1948년, 4·3 사건이 발발하자 서귀포로 파견됐다.

김두혁 경사는 경찰로 재직하면서 서귀포 인근 주민들을 전도했다. 주민 수십 명이 복음을 받아들였고 이들과 함께 예래교회를 개척했다. 김 경사는 1949년 교세가 확장하자 교회 사역에 집중하기 위해 경찰직을 사임하고 목사가 되었다.

강승일 목사는 4·3 때 만들어진 교회더라도, 4·3 얘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교인마다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한쪽 시각으로 사건을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다. 그는 "개인적인 생각은 많지만 이를 목회 현장에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이다"고 했다.

그는 올해 4월 제주교단협의회가 개최한 4·3 사건 70주년 연합 예배에 큰 의미를 두었다. 강 목사는 "개교회에서 4·3과 관련해 특별한 목소리를 내기 어렵지만, 교회 연합 기구에서는 충분히 다룰 수 있는 주제인 것 같다. 70주년 연합 예배처럼 교회가 서로 힘을 합쳐 목소리를 낸다면, 4·3 앞에서 침묵해 온 교계도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강 목사는 "안타깝게도 교회는 4·3 사건 당시 가해자 쪽에 섰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교회가 불의한 짓을 저질렀다면 먼저 잘못했다고 반성하고 희생자 후손들에게 다가가는 게 맞다. 70주년 연합 예배가 그런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앞으로 제주 교계 차원에서 회개 운동이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오늘날 서귀포시 예래동에 있는 예래교회 모습. 70년이 지나면서 외관이 많이 바뀌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주민들이 자생적으로 세운 교회들
"4·3 사건 민감하고 어려워
용서와 화해 강요할 수도 없어"

토벌대가 직접 세운 교회도 있지만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교회도 있다. 4·3 당시 제주에는 교회가 많지 않았다. 주민들은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그러나 점차 지역 치안이 불안해지고 야간 통행이 금지되면서 각 마을에는 자생적으로 교회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판포교회·강정교회 등이 대표적인 예다.

판포교회 송기오 목사도 앞서 두 목사처럼 교회에서 4·3 관련 설교를 하기 어려운 분위기라고 전했다. 민간인 희생자 후손과 군경 자녀들이 모두 얽혀 있기 때문에 누가 옳고 누가 나쁘다고 선을 긋기 어렵다는 것이다. 송 목사는 "안타까운 역사지만 오늘날 교회가 이를 해결할 능력이 부족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모습이 제일 이상적이다. 어려운 일이다. 이들에게 용서와 화해를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4·3 사건을 말할 때 정말 조심스럽고 어렵다. 한 세대가 가고 상처가 무뎌질 때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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