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고를 때 두 가지 기준이 있다. 먼저 '나에게 필요한 책인가' 묻는다. 그 책이 필요하다면 '얼마큼 깊이가 있는가' 다시 묻는다. 첫 번째 질문인 필요성을 말할 때 다시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하나는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는가'이다. 즉 독특성이다. 동일한 관점으로 써 내려간 두 권의 책은 필요하지 않다. 그런 책은 한 권으로 충분하다. 매일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나로서는 성경을 보는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는 책이 가장 중요하다. 그다음 질문은 어떤 앞선 두 번째 질문과 맥을 같이한다. 개론서인가, 아니면 세세한 주해서인가 살핀다.

책을 깊이 읽기 위해서는 먼저 방대한 독서가 필요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한 주제를 읽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때 깊이 있는 책으로 나아가야 한다. 철학의 역사와 개요도 모르는 독자가 베르그송 책을 읽게 된다면, 그는 베르그송이 철학의 진리라고 착각하든지 철학의 미궁에 빠질 것이다. 책은 좋으나 좋은 독서법이 따르지 않으면 깊이 있는 독서가 불가능하다. 히브리서를 읽기 위해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이 한 권 있다. 바로 최승락 교수의 신간 <히브리서 산책 - 성취와 기다림>(이레서원)이다.

<히브리서 산책 - 성취와 기다림> / 최승락 지음 / 이레서원 펴냄 / 224쪽 / 1만 4000원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신약성경은 히브리서와 요한복음이다. 최근에는 공동 서신을 더 선호하지만, 히브리서는 여전히 매력적인 서신서다. 저자가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매혹적"(8쪽)인 책이다. 그러나 구약에 어느 정도 능숙하지 않다면 히브리서는 난해한 책이자 의미를 알기 힘든 책이다.

최근 들어 매일 히브리서를 주해하면서 다양한 주석을 곁에 두고 살피고 있다. 어떤 주석은 불필요하게 비평적이다. 한 본문을 두고 몇 페이지의 비평 역사와 논제들을 언급하지만 정작 그 본문이 뭘 의미하는지는 모호하게 넘어간다. 모호하기 때문에 비평이 많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다'라고 확신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럴 때는 성경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그 서신이 강조하는 중요한 주제와 논제, 목적 등을 먼저 고려한 다음에 전체 맥락에서 부분을 해석하고 주해해야 마땅하다. 그런 점에서 성경을 볼 때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은 개요와 중요한 주제를 다루면서 각 장의 중요한 주제들을 충분히 설명하는 책이어야 한다. 이 책은 저자의 말대로 세밀하고 '전문 주석'이 아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히브리서의 전체적 윤곽을 그리는 작업"(6쪽)을 시도했다. 또한 히브리서가 갖는 중요한 주제들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저자는 하나의 통일된 관점에서 히브리서를 살핀다. 그가 말하는 통일된 주제는 무엇일까.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으로서의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오래 참음이며, 인내이다. 또한 인내는 살아 내는 것이다.

"기다림은 신앙고백을 굳게 붙잡고 그것을 살아 내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기다림은 예배의 삶이기도 하고 선행의 실천이기도 합니다. 기다림은 행위를 수반합니다." (7쪽)

필자는 이것을 '살아 내는 기다림'이라고 말한다. 왜 기다려야 하는가. 성도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는 구약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는지를 끊임없이 보여 준다. 구약에서 거의 신처럼 숭배되거나 신적인 존재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한다.

히브리서에 중요한 단어는 '우월한'이다. 천사보다 우월한 예수 그리스도(1·2장), 여호수아보다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3·4장), 구약의 대제사장 또는 아론보다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4·7·8장), 구약의 성막보다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9·10장) 등을 계속하여 소개한다. 구약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율법, 선지자들, 성막과 제사 제도 등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것들은 그림자이며 모형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성취되었다. 이것이 첫 번째 의미다. 그렇지만 이미 성취되었지만 "종결된 것은"(6쪽) 아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성취를 누리면서 동시에 그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기다리며 인내하며 또한 투쟁합니다." (6쪽)

우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히브리서 기자가 끊임없이 경고하고 권고하는 이유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탓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 구원을 이루었다. 그러나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안식) 못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과 독자들의 고난받는 상황을 유비한다. 또한 지금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동일한 의미를 부여한다. 아직 영생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이루었지만 아직 완결되지 않은 도중에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살아 내는 기다림'이다.

인내와 기다림은 무엇을 의미할까. 1장을 마무리하며 아브라함을 통해 배울 것을 제시한다. 아브라함은 성이 아닌 장막에 거했다. 자신을 "외국인과 나그네로 고백"(42쪽)했다. 신앙생활은 본질적으로 정착이 아닌 유목민처럼 유랑하는 삶이다. 그렇다고 목적이 없는 표류는 아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 땅에 없는 약속을 붙잡아야 하기 때문에, 보이는 세속의 물결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성도는 위험하지만 "즐거운 기다림의 삶"(43쪽)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저자는 명확하게 구분해 내지 않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저자는 히브리서를 두 단락으로 구분한다. 첫 단락은 1-11장이고, 두 번째 단락은 12-15장이다. 히브리서 11장은 이전과 이후를 연결하는 경첩 역할을 한다. 11장에서 '믿음의 담대함으로 기다림'이라는 제목으로 이전의 모든 주장을 '믿음'이란 단어에 담는다. 11장에서 저자는 믿음을 세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먼저는 11:1-2의 오해를 푼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은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것들"(159쪽)이다. 그렇다면 믿음은 나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그것들이 지금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치 손에 잡히는 실상처럼, 또 눈에 보이는 증거처럼 그 실체를 우리에게 확실히 경험시켜 주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곳은 내가 꿈꾸는 나 자신의 성공이나 이 세상 차원의 축복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약속,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그분의 영원한 복락 속으로 인도합니다." (159~160쪽)

이미와 아직 사이에 '믿음'이 필요하다. 성취와 미완성 사이에 '믿음으로 살아감'이라는 다리가 놓여 있다. 믿음은 개념과 정의定義가 아니라 행동하는 삶이다. 저자는 이것을 "우리의 기다림은 행동 중의 기다림"(119쪽)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믿음으로.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 야고보 사도의 경고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믿음은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는 행동하는 믿음의 모델들을 히브리서 11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말한 다음, 곧바로 10장 후반부부터 행동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구약의 모델들을 제시한다. 저자는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동사들의 시제에 주목한다.

"장막에 거하였다"(히 11:9)는 "나그네로 살았다"(히 11:13)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새로 지으신 장막(임시 거처)이 아닌 성(영원한 거처)를 "바라보았다." 그곳은 본향이며(11:14), 흔들리지 않는 나라(12:28)이며, 장차 올 영구한 도성(13:14)이다(173~174쪽). 바랐다는 미완료형으로, 계속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본향을 찾는다는 표현은 현재 시제다. 사는 동안 계속하여 찾으며 살았다는 뜻이다. 사모하다는 역시 현재 시제다. 모든 삶이 본향을 찾고 갈망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특징이다.

"계속하여 기다리며 바라보는 사람, 계속하여 찾고 있는 사람, 계속하여 사모하는 사람, 이것이 땅 위에서의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중략) 신약의 성도들 역시 (중략) 계속하여 영구한 도성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175쪽)

'찾는다'는 말은 어디인지 몰라 찾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살아 내다'라는 뜻이다. 저자는 다시 히브리서 12장을 해석하며 '훈육과 거룩의 공동체로서의 기다림'으로 설명해 나간다. 믿음은 홀로 싸우는 고독한 전쟁이 아니다. '함께' 또는 '서로' 살아가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충고한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3-25)."

저자는 히브리서 13장에 '예배 공동체'가 있다고 말한다. 예배는 예배의 이유이며 목적이며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예배는 믿음으로 살아가기, 믿음으로 기다리기를 실현하는 그릇인 셈이다. 12장을 시작하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자'라고 말한다. 그다음 13장에서 그리스도를 예배하라고 권한다. 예배는 믿음의 행위이자 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언제까지나 예배 공동체로 존재하는데, 그 예배의 중심에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208쪽)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다짐을 요구한다. 초대교회 성만찬이 기념을 넘어 그리스도처럼 살겠다는 결단이듯이, 예배는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성도의 삶으로 재현하게 한다. 저자는 '영문 밖'을 성도가 살아가야 할 삶의 터전으로 해석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가 '영문 밖'에서 죽으셨음을 기억하고 그곳을 "버림의 장소", "수치의 자리"(212쪽)로 상정한다. 그렇다. 그곳은 도성 밖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도성 밖으로 버렸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라가려면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1-13)."

우리도 그의 치욕, 곧 그리스도의 치욕을 짊어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치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갈 때 그곳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자리"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장소가 된다(212쪽). 그곳은 고난의 처소이다. 그렇다면 기다림이란, 고난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된다. 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영문 밖을 '실천적 삶'이라는 '예배'로 확장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곧 예배임을 보여 줍니다. 좋은 행실이 살아 있는 삶이 곧 예배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215쪽)

삶이 예배라는 말은 식상한 표어가 아니다. 예배는 삶을 요구하고, 삶은 다시 예배를 전제한다. 그러므로 삶은 예배이고, 예배는 삶이 된다. 예배하는 삶은 실천하는 삶이고, 실천하는 삶은 예배를 통해 견고해진다. 예배하는 것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예배한다.

예배가 존재의 가치를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고 찾는 것이듯, 그리스도께 예배하는 삶은 세상의 모든 가치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재평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변혁적이고, 종말론적이다. 저자의 마지막 문장은 책의 결말이자 요약이며, 히브리서가 추구하는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 준다.

"기다림은 실천입니다. 기다림은 변혁입니다. 기다림은 미래 지향적이면서 동시에 현실 변혁적입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는 역동적인 힘입니다. 우리의 소망의 닻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이 역동적인 기다림의 능력을 우리의 삶 속에서 힘차게 구현해 가는, 주님의 새 언약 백성들로 살아갑시다." (216쪽)

'성취와 기다림'이라는 주제로 풀어낸 기막힌 책이다. 기존의 주석들이 담아내지 못한 히브리서의 매력을 매혹적으로 그려 준다. 히브리서가 가진 의미를 살펴보고 싶은 성도나 설교하고 연구하고 싶은 목회자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졍현욱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에레츠교회 담임목사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