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의 메시지가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든 주요한 이유는 그 메시지가 먼저 맥체인 자신의 가슴을 파고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번연처럼 그도 '그가 느꼈던 것, 그가 통렬하게 느꼈던 것'을 말했습니다. 그의 전기를 쓴 작가의 암시적인 말을 빌리자면 그의 설교는 '그의 영혼이 경험한 것을 발전시킨 것이요, 내적 생명을 발산하는 것'이었습니다." (65쪽)

알렉산더 스멜리(Alexander Smellie)의 <로버트 맥체인 Robert Murray McCheyne>(지평서원)에 나온 내용입니다. 22살의 맥체인이 교구 목사 앤드류 알렉산더 보나르와 함께 라버트에서 부교역자로 섬기면서 처음 열 달간 설교할 때의 모습을 그린 것이죠. 그만큼 그는 스스로 은혜를 받은 말씀을 설교로 작성해 교우들과 나눴다는 뜻이죠. 그래서 추천사를 쓴 박순용 목사는 "그가 설교하기 위해 강대상에 오르기도 전에 성도들은 이미 감동되어 눈물을 글썽였다"고 하는 걸까요. 물론 그는 일일이 심방도 하고 그 일지도 꼼꼼하게 작성했다고 밝힙니다.

이 책은 영국 국교회를 탈퇴한 스코틀랜드 최초의 분리장로교회(Original Secession church)에서 목회한 알렉산더 스멜리가, 영국 자유교회위원회의 메이어(F.B.Meyer)와 그 동료들로부터 맥체인과 윌리엄 번즈(William Burns)를 중심으로 한 스코틀랜드의 부흥 역사를 기록하라고 권유받았는데, 때마침 에든버러의 제임스 맥도날드로부터 맥체인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주고받은 편지와 메모장과 설교 등의 필사본을 받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쓴 것입니다. 물론 그는 이전에 나온 앤드류 보나르(Andrew Bonar)의 <회고록 memoir and Remains>에서 '부스러기를 줍는 사람'처럼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밝히죠.

<로버트 맥체인 - 교회사의 영적 거성> / 알렉산더 스멜리 지음 / 엄경희 옮김 / 지평서원 펴냄 / 320쪽 / 1만 원

"설교 방식에는 언제나 완벽한 명쾌함의 매력이 있었습니다. 마치 강바닥의 돌멩이와 이끼가 환히 들여다보이는 맑디맑은 호수처럼 투명한 설교였습니다. 늘 예외 없이 정확한 목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의 설교의 장점이었습니다. 설교는 길었지만 쓸데없이 꾸미거나 고의적으로 장식하는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어떤 청중이 증언하듯이 그의 예화는 '기분을 들뜨게 하는 꽃이 아니라 양심에 꽂히는 화살'이었습니다." (81쪽)

맥체인이 1836년 11월 24일 세인트피터 던디의 '성베드로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행한 설교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의 설교는 명쾌했고, 호수처럼 맑았는데, 존 번연처럼 심금을 울리는 설교의 연금술사였던 것입니다. 그는 1년간 사례비를 200파운드 받았는데, 굴뚝과 갱 광부들이 모여 사는 곳의 교회였죠. 1년 만에 더 나은 세 개 교구로부터 청빙 제안이 들어왔지만, 그는 그곳을 하나님이 보낸 목회지로 알고 떠나지 않았죠. 오직 예수님처럼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를 통해 세금도 내고 활동비도 썼던 것처럼 그곳에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살기로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방식을 지리학적 교수법이라고 부릅니다. 먼저 학생들에게 갈릴리바다 같은 어떤 지역을 주고 나서 그 지역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성경에서 찾아보라고 요구합니다. 그러고 나서 마치 우리가 고등학교에서 그랬던 것처럼 분필로 칠판에 그 지역의 지도를 그립니다. 그 뒤에 모든 지역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유대 역사학자인 요세푸스, 그리고 근대 여행가들이 그 지역에 관해 설명해 놓은 것을 읽어 줍니다. 그러고 나서 그 지역과 관련이 있는 성경 구절로 다시 가서 그 지역의 지리학적 위치와 읽어 준 설명을 사용해서 그 본문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지요." (85쪽)

이것은 맥체인이 성베드로교회에 부임한지 6개월이 지났을 때 행한 성경 교실 강의 방법입니다. 이 이야기는 1838년 2월 인도에서 집으로 돌아와, 몸이 아픈 자기 형에게 써 보낸 편지를 통해 고백한 내용이라고 밝힙니다.

그런데 그가 에롤의 그리어슨 목사와 철봉대에서 재주를 겨루다가 그만 떨어져 다쳤고, 고향 집에 돌아가 안식을 누리다가, 1839년 3월 29일에 선교 사역을 떠나게 되죠. 팔레스타인을 직접 보는 여행길이었습니다. 햄프스타드를 출발해 프랑스, 이탈리아, 발레타, 알렉산드리아, 갈멜 산등성이에 있는 격리 수용소, 베이루트와 서머나, 갈라츠, 타노플, 브레슬라우를 거쳐 11월 6일 템스강으로 돌아오는 여정이었죠.

그 사이 성베드로교회의 목회는 다른 목회자가 1939년 11월까지 맡게 되었는데, 24살의 윌리엄 번즈가 그였죠. 번즈는 그 당시 아버지의 킬사이드교회와 맥체인의 성베드로교회에서 번갈아 가며 설교했는데, 그가 설교할 때 두 교회에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일어났고, 그것이 스코틀랜드 전반의 걸쳐 번진 '킬사이드 부흥'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하죠. 물론 맥체인이 다시금 교회로 돌아왔을 때 번즈와 갈등이 있었지만 둘은 서로를 존중했고, 번즈가 다른 선교지로 떠날 때에는 맥체인이 그 뒤에 후원하고 협력했다고 하죠.

우리가 아는 바대로, 번즈는 영국 장로교 선교회 첫 중국 선교사로 파송받은 이요, 조선에 처음 복음의 씨를 뿌린 귀츨라프 선교사에게 중국인 언어 선생을 소개받아 중국어를 배운 이요, 허드슨 테일러에게 영적 멘토였던 이로 널리 전해졌죠. 더욱이 그 유명한 앤드류 머레이의 회심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죠. 바로 그런 점들이 영국 자유교회위원회의 메이어(F.B.Meyer)와 그 동료들이  알렉산더 스멜리에게 그 둘의 관계를 통한 스코틀랜드 부흥 역사를 쓰도록 독려했던 것이겠죠. 그만큼 맥체인은 번즈의 킬사이드 부흥, 곧 스코틀랜드 부흥에 영적 촉매제 역할을 했던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맥체인은 그 뒤 여러 모임과 심방을 하는 중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었고, 급기야 의식이 혼미하던 상황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며, 1843년 3월 25일 토요일 아침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29살의 일이었죠. 일생에 두 번 약혼식이 있었지만 그는 홀로 사역하다 젊은 날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다만 이 책에는 그가 결혼하려 했던 제시 테인(Jessie Thain)의 일기가 부록으로 실려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맥체인의 설교에는 코튼 매더(Cottom Mather)의 <존 엘리엇의 생애 Life of John Eliot>, 존 플라벨의 묵상집, 영(Young)의 <밤 묵상 Night Thoughts>, 조나단 에드워즈의 결심문과 소책자와 논문,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해 The Galatians>, 번연의 <구원받은 예루살렘 죄인 Jerusalem Sinner Saved> 등의 인용문이 많이 들어 있다고 밝힙니다.

또한 그의 동료 가운데 그 유명한 호라티우스 보나르도 있는데, 더 놀라운 것은 1842년 11월에 에든버러의 올드타운에 있는 록스버러예배당에서 465명의 사역자가 참석한 '록스버러 회의'가 열렸는데, 스코틀랜드 복음주의자들을 위한 모임이었고 맥체인도 그곳에서 기도를 했다는 점이죠. 그만큼 그는 영국 국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온전한 복음을 전하고자 애쓴 '영적 거성'이었던 것입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