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체코슬로바키아의 가톨릭 사제 토마시 할리크(Tomáš Halík, 1948~)는 프라하 어느 지하철역 벽에서 낙서를 발견한다. "예수가 해답이다." '복음 전도 집회에서 돌아오던 누군가가 써 놓은 낙서일까.' 그때 그는, 그 옆에 있는 또 다른 낙서를 발견한다. "그런데 문제는 뭐였지?" 모든 문제에 손쉬운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구는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다. 현대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물음이 없는 해답'을 붙들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신앙의 이름으로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물음이 많다. 주로 하느님이 부재하고 하느님이 침묵하는 것 같은 순간에 그런 물음이 솟아난다.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9·11, 삼풍백화점, 세월호에 이르기까지…. 믿음과 의심, 신앙과 불신앙에 대한 논쟁을 다루는 토마시 할리크의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 - 자캐오에게 말을 건네다>(분도출판사)은, 이 같은 순간이 만들어 내는 물음을 마주할 때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은 '예수와 자캐오(삭개오) 이야기'(누가복음 19:1-10)를 테마로 하는 묵상집이다. 저자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 예수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자캐오'와 같이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 즉 신앙에 호기심이 있지만 신앙인이 되지는 못하는 경계인, 확고한 신앙을 의심하는 회의론자, 나아가서는 고통 가운데 울부짖으며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무신론자들을 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믿지 않는 이들'과 타 종교 신자들에게도 할 말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귀 기울이고 배워야 한다. 현대에 들어 무신론이 마구 쏟아 내는 뜨거운 비난이 다른 종교들보다 특히 그리스도교를 향했다는 사실에서 자신에게 유익한 교훈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그리스도교는 그 태만함을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 그 뜨거운 비난의 용광로 속으로 들어갈 용기가 없다면, 그러한 비난들 속에서 시험받고 단련되어야 할 믿음과 희망을 포기해 버리는 것만큼이나 안타까운 일이다." (15쪽)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 / 토마시 할리크 지음 / 최문희 옮김 / 분도출판사 펴냄 / 264쪽 / 1만 5000원. 뉴스앤조이 경소영

무신론자들을 품으라는 말은, 이들을 '개종'하라는 말이 아니다. 예수께서 자캐오의 이름을 불러 주신 것처럼, 관심을 가지고 이들의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들이 던지는 의심에 찬 질문들을 마주하고, 이들과 연대하면서 '하느님을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을 보낼 때 신앙은 새로운 의미를 드러내 보인다고 말한다. 무신론은 종교적 환상을 걷어 내는 것을 도와주고, 속수무책의 현실에서 신앙인으로서 선택해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통로일 수 있다.

"아마도 지금 그분 제자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친밀함을 가장 효과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길은, 찾는 이들과 함께 구도자가 되고 묻는 이들과 함께 질문자가 되는 것이다. 벌써 목표에 도달했다고 선언하며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겉핥기식 대답들을 내어 놓는 이가 너무 많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들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 가운데 있다. '나뭇잎 사이로 내다보는' 우리 시대 자캐오들을 우리 이웃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의 이웃으로 삼는다면 우리 신앙이 훨씬 더 쉽게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28쪽)

성숙한 신앙은
확고한 믿음을 동반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무신론을 적대하고 신앙에 대한 회의와 의문을 금기시하는 경우가 많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터졌을 때, 상향성의 종교를 지향해 온 한국 기독교는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상처를 줬다. 독단적이고 확고한 믿음에 기반한 기독교적 해답들은 이들을 위로하지 못했다.

저자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신앙의 대가들이 의존했던 부정신학否定神學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돌아보면, 특정한 하느님의 모습과 속성들을 알고 있다고 지나치게 확신하는 기독교인이 적지 않다. 신앙에는, "우리가 그분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최선은 '그분이 아닌 것'뿐"(43쪽)이라는 인식도 필요하다. 하느님에 대해 가려진 부분, 감춰진 '신비'가 많다. 인간은 '완전한 진리'를 손에 넣을 수 없다. 무신론이 "풀리지 않는 문제, 완공되지 않은 건물"이듯이, 신앙의 성숙도 '자산'이 아니며 "아직 완결되지 않은 작업"이다(62쪽).

"온갖 유형의 종교 장사꾼이 매혹적으로 자기 제품을 떠벌리는 오늘날, 하느님은 그렇게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일이 유익하고 필요하다. 침묵하며 멀리 숨어 계시는 하느님을 마주한 이들을 – 그 체험 때문에 종교를 부정하게 된 이들까지도 –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면, 무신론자의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얄팍한 풋내기 신앙보다 훨씬 성숙한 신앙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41~42쪽)

"우리가 이 열정적 반항의 무신론을 정복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그들을 품어 안는 것이다. 우리 신앙의 열정으로 그들을 품어 안고 축복하자. 그들의 존재론적 체험을 우리 체험 속에 받아들이자. 우리 신앙이 비극과 고통의 인간 체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체험을 안일한 종교적 위안으로 하찮게 여기지 않으면서 견디지 않으면 우리는 성숙함의 축복을 얻을 수 없다. 성숙한 신앙은 신비의 밤을 참고 기다리며 머무르는 것이다." (144쪽)

신앙생활의 여정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모든 태양에서 멀어진",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일식의 순간들"은 존재한다(13쪽). 저자에 따르면, 성숙한 신앙은 확고한 믿음을 동반하지 않는다. 하느님 부재와 하느님 침묵이 드러나는 현장, 온갖 의문들이 생겨나는 현실 가운데서, 정확한 답을 내리지는 못하지만, 불확실성과 함께 있는 이들의 손을 잡아 주고 조용히 연대하는 것이 오히려 기독교가 말하는 인내와 사랑을 발견하는 길이며, 숨어 계신 하느님과 마주하면서 신앙 성숙으로 나아가는 통로다.

"결국 그리스도교가 제시하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아무런 역경 없는 삶을 선사하거나 역경에 부닥쳤을 때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고통스러운 물음에 즉각 만족스러운 답을 주는 하느님이 아니며, 어둔 밤이 뒤따르지 않고 낮만 계속되리라고 약속하지도 않는다. 그런 깜깜한 밤에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건네는 약속의 전부다. 우리는 이 약속에 의지하여 우리의 어둠과 무거운 짐을 견딜 뿐 아니라, 타인들, 특히 그분의 약속을 듣지 못했거나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도 견딜 수 있도록 도울 힘을 얻어야 한다." (130쪽)

경계를 뛰어넘는 신앙의 개방성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은 가톨릭 사제가 쓴 책이다. 저자 토마시 할리크는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 정권 아래 있을 때 동독에서 비밀리에 서품을 받고 지하 교회에서 사역했다. 대외적으로는 심리치료사로 활동했다. 1989년 '벨벳 혁명'으로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되고 자유가 찾아오자, 역설적으로 열린 공간과 다양성 앞에서 혼란에 사로잡혀 어떤 무리에도 합류하지 못하고 숨는 '자캐오' 같은 사람이 많았다. 저자는 자유를 얻은 기독교인들을 바라보는 수많은 '세리'에 주목했다. 많은 기독교인이 이웃의 경계를 허물고 자캐오들에게 다가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신앙의 개방성을 강조한다. 저자는 가톨릭교회 일원이지만 '신 죽음'을 선언한 니체와 같은 철학자들과 루터나 키에르케고르, 폴 틸리히 같은 개신교 신학자들 말을 적극 끌어온다. 재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삶의 정황들도 살핀다. 죽음의 순간에 영생을 향한 믿음 없이 하느님 부재를 느꼈던 리지외의 성녀 테레사와, 죽을 때까지 세례성사를 거부하고 교회에 소속되지 않은 채 죽은 신비주의 사상가 시몬 베유의 사례를 검토한다.

저자 토마시 할리크. 2014년 템플턴상을 수상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십자가 위 예수님의 외침은 버림받고 잊히고 소리 내지 못하는 모든 폭력의 희생자들의 목소리가 된다. '희생자와의 연대'가 핵심이 되는 무한한 연대를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평화이시다. 그분은 모든 경계를 허무셨다. '우리'와 '그들'의 경계를 뛰어넘어, 망각으로 가려진 희생자들의 얼굴을 우리 양심과 기억 안에 되살리려는 노력은 바오로 성인이 우리에게 호소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십시오.'" (202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느님이 죄인들의 세상에 가장 적극적으로 개방성을 펼쳐 보인 행위다. 하느님은 욥의 원망이나 야곱의 공격도 받아들였다(250쪽). 기다림은 하느님께서 먼저 보이신 개방성과 인내를 따르는 것이자, '하느님 침묵'의 골짜기에서 부활의 아침을 희망하는 일이다. 저자는 기다림 가운데서 믿음·희망·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우리가 삶의 끊임없는 수수께끼들에 부닥칠 때 지나치게 단순한 대답들로 돌아서서 그런 대답들에 의존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며 발휘하는 인내는 '바로 손닿을 곳에' 계시지 않는 하느님을 참고 기다리는 시간이다. 그러나 숨어 계신 하느님 앞에서 이렇게 열려 있는 개방성, 침묵하시는 하느님의 깊은 고요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담대히 '예' 또는 간절히 '아마도'라고 대답하는 것, 가장 길고 어둡고 추운 밤들에도 체념의 재를 거듭 헤치고 튀어 오르는 그 작고 집요한 불꽃이 바로 신앙이 아닐까? 그리스도교에서는 믿음과 희망을 갈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인내는 이 둘의 공통분모이자 공통 열매다." (253~254쪽)

오늘날 교회는, 예수께서 가장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셨다는 것과, 자캐오와 같은 가장자리에 있는 이들을 하느님께서 결국 심장부로 이끄실 것이라는 성경의 말씀을 되새겨야 한다. 중심부에 가까운 가장자리, 어둡고 텅 빈 그 거룩한 자리에 하느님과 그분의 영광이 가장 충만하게 머무르고 있다(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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