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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 그거 내가 해 봐서 아는데
[서평] 칼 세데르스트룀·앙드레 스파이서 <자기 계발을 위한 몸부림>(매일경제신문사)
  • 이원석 (dkdndn2@naver.com)
  • 승인 2018.05.03 14:51

일기와 개인의 자의식

각 시대마다 나름의 매체를 독려한다. 가령 근대 세계가 열리고 개인의 자의식이 확장되면서 널리 대중화한 것은 바로 일기 쓰기다. 근대의 일기에는 일상과 업무의 보고에 더해 의식의 성찰이 담겨 있다. 자기 자신을 독자로 상정한 내면의 은밀한 고백을 주기적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그런 기록의 일부가 <안네의 일기>처럼 출판을 의도하지 않고 작성했음에도 결국 고전의 반열에 이르기도 하고, 스우 타운센드의 <비밀 일기>(김영사)처럼 애초에 일기의 형식으로 구성된 문학도 있다. 일기 문학은 기본적으로 독자들에게 훔쳐보기의 즐거움을 안겨 준다.

자아 팽창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현대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고백이 일기를 통해서 은밀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일기가 하던 역할을 새로운 소통 매체인 소셜미디어가 대신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가령 페이스북에 자신이 어디로 놀러 가고, 무엇을 먹었다고 자랑함과 아울러 일상과 시사 등에 대한 자기의 섬세한 감상과 예리한 성찰, 그리고 광범한 지식을 과시하는 경우도 빈번하지 않나. 종종 자신의 진보적 스탠스를 과시하거나 자신의 겸손한 영성을 자랑하기도 한다. 혹은 특정한 영역에 대한 공개적 자백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그 점에서 거룩함을 인정받고자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아 팽창의 시대에도 일기는 여전히 출간되는 가운데 그 나름의 위상과 유용성을 증명한다. 가령 20세기 후반 가톨릭 영성을 주도한 헨리 나(우)웬은 자신의 내적인 여정을 보여 주는 네 권의 일기를 출간한 바 있다. 그가 하나님의 인도를 추구하고, 영적인 주제에 대해 묵상하는 과정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어 독자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함이다. 그 외에도 토머스 머튼이나 키르케고르 등 여러 영성가가 영적 일기를 펴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간단히 말한다면, 일기가 성장과 학습에 도움이 되는 매우 좋은 도구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개인적 서사를 통해서 저자의 특정한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매체로 일기가 활용되고 있다. 이는 비단 영성에 한정된 것만이 아니라 생태주의나 페미니즘, 문학 읽기나 고전 독서 등 온갖 분야에 적용된다. A. J. 제이콥스의 <미친 척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 본 1년>(세종서적), 레이첼 헬드 에반스의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 본 1년>(비아토르) 등 아예 제목에서부터 드러내는 경우도 있지만, 그 기간의 에피소드와 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여 회고록이나 논픽션 등으로 재구성해 낸 경우까지 포함하면 그 범위가 확 늘어난다.

<자기 계발을 위한 몸부림 - 삶의 최적화를 위한 1년간의 처절한 실험> / 칼 세데르스트룀, 앙드레 스파이서 지음 / 임지연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펴냄 / 424쪽 / 1만 6000원

자기 계발과 참여 관찰, 그리고 일기

내가 <자기 계발을 위한 몸부림>(매일경제신문사)이라는 신간에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일기라는 매체를 통해서 집필했다는 점에 있다. 이제 국내에도 자기 계발 비판 연구가 어느 정도 축적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나름의 포인트가 있어야 자기 계발 연구자의 입장에서 관심을 가질 수 있지 않겠나. 저자는 건강 신드롬을 통해서 자기 계발 사조를 규명해 낸 작업으로 알려진 스웨덴 스톡홀름의 경영학자 칼 세데르스트룀(Carl Cederström)과 영국 런던의 경영학자 앙드레 스파이서(André Spicer)이다. 이미 <건강 신드롬>(민들레)으로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칼과 앙드레가 자기 계발 연구를 대중과 공유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 채택한 새로운 방식이 바로 한 해(2016년) 동안 달마다 특정한 한 가지 주제에 천착하여 자기 계발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가 바로 <Desperately Seeking Self-Improvement>라는 제목의 일기(부제가 'A Year Inside the Optimization Movement'이다)로 작년에 출간되었다. 이번에 나온 국역본의 제목은 <자기 계발을 위한 몸부림>이며(매우 정확하고 적절한 제목이다), 부제는 '삶의 최적화를 위한 1년간의 처절한 실험'이다. 실제 실험 과정을 생각해 보면, 나름 괜찮은 번역이다.

"지난 1년간, 우리는 자기 계발 테크닉을 시험하는 데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쏟아부었습니다. 뇌 검사를 하기도 하고, 뇌 기능 활성화 약을 먹고, 성인 용품을 실험해 보고, 성형수술도 받았어요. 심령술사 및 라이프코치와 상담하고, 모르는 남자와 알몸으로 춤을 추기도 하고, 동기부여 세미나에 참여하고, 정식 역도 대회에 참가하고, 그리고 치유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어요." (6쪽)

안드레는 이 '처절한 실험'을 가리켜 "진지한 연구 프로젝트"(5쪽)라고 단언하였고, 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연구는 참여 관찰의 방법론을 따른 것으로, 두 저자가 "몸과 마음을 극단적 상황에 몰아넣은 뒤 그 경험을 공유해서 정리한 사회과학적 실험"이다(11쪽). 결코 "자신을 극복한 두 남자의 영웅담이 아니"(10쪽)라 자기 계발이라고 하는 "연구 주제와 육체적·감정적으로 거리를 두는 연구자"(11쪽)로서의 자신들에 대한 반성의 일환이다. 또한 "절망감과 좌절, 드라마와 유머, 자기 계발을 추구하는 이들의 공통된 심리를 드러내 보여 주려"(10쪽) 하는 대중적 소통의 작업의 결과이다. 즉 대중에게 생생하게 보여 주려는 의지의 소산이다.

자기 계발의 헛되고 헛된 추구

이러한 추구가 좌충우돌("처절한 실험")일 수밖에 없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처음부터 자기 계발에 대해 불신을 품고 시작했으니 당연한 노릇이다. 칼은 미국 출판사 담당자 콜린과 통화하는 중에(12월 6일, 385~386쪽)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는다. "그럼,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리라 생각한 적 없다는 거예요?" 그는 답변한다. "아마도요." 콜린이 다음과 반응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건 불가능한 기회에 맞선 싸움이었어요. 당신들은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프로젝트를 진행했죠." 처음부터 불순한 동기로 자기 계발의 여정에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믿음을 가지고 시작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자기 계발에 대한 믿음의 도약이 맞이하는 결말은 처절한 추락이다. 바로 내가 바로 그 좋은 사례이다. 처음부터 자기 계발에 회의적이었던 칼과 앙드레와는 달리 나는 초등학생일 때부터 자기 계발서를 읽기 시작했다. 노만 빈센트 필 목사의 <적극적 사고방식>을 시작으로 하여 광범한 분야를 섭렵했다. 그렇게 열심히 읽고, 이에 따라 실천한 결과("이생망")를 담론 분석의 채로 거른 결실이 바로 <거대한 사기극>(북바이북)이다(담론 분석은 언어적 차원 이면에 작동하는 사회적 맥락을 살펴보는 데 유용한 기법이다).

(이제까지의 언급으로 충분히 예측되고도 남을) 결론으로 바로 들어가 보자. 앙드레는 "자기 계발이라는 넓은 문화에 느낀 좌절"(418쪽)을 고백한다. 칼은 더 명확하게 들려준다. 우선 그의 아내와의 대화(12월 7일, 388~389쪽)에서 일부를 소개하고 싶다. 그는 아내 샐리에게 자기 계발 프로젝트에 몰두한 지난 1년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았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해? (중략) 당신 생각을 듣고 싶어." 그녀의 답변은 이렇다. "당신은 더 나은 사람이 되지 못했어. 음, 아마 지금은 적어도 자신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게 되었겠네." 이어서 그가 마지막 날(12월 31일) 쓴 일기의 마지막 부분을 여기에 적어 본다.

"하늘이 밝아졌다. 이제 끝났다. 내일은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날 것이다. 더 이상 인터넷에 반나체 사진을 올릴 필요도 없다. 더 이상 성형 시술을 하지 않아도, 거짓 친절을 베풀지 않아도, 구직 상담을 하지도, 섹스 토이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베개에 대고 소리 지를 일도 없을 테고, 앙드레와 상담받을 필요도 없다. 더 이상 억지로 먹지 않아도 되고, 단식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전기 충격을 받지 않아도, 웨어러블 기기를 착용하지 않아도 된다. 정말 이상한 한 해였다." (419쪽)

그렇다고 아무 성과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여러 앱과 기법을 활용해 전에는 불가능하다 여겼던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숫자 외우기, 스릴러 소설 쓰기, 프랑스어 배우기 등 계속해서 나 자신을 편안하고 익숙한 영역 밖으로 밀어낸 노력에는 성과가 따랐다. (중략) 이렇게 많은 자기 계발 기법이 실제로 효과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392쪽) 그러나 이 문단을 뒤잇는 부분을 함께 봐야 한다. "하지만 '나'에게 무엇이 남았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이루어 낸 많은 성과는 나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얻은 결과였기 때문이다."(392쪽) 앙드레도 이렇게 자문한다.

"내 사진으로 미루어 보면, 2016년은 나만의 '나의 시대'였다. 그렇지 않은가? 이렇게 나답지 않은 짓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 해는 또다시 없을 것 같다. 픽업아티스트가 되려 했던 건 정말 내가 아니었다. 통근 지하철 안에서 좌석을 사겠다고 돈을 내미는 것도 내가 아니다. 정크 푸드만 먹고 하루 종일 비디오게임을 하는 것도 진정 내가 아니었다. 이런 것들이 내가 아니라면, 그럼 누구란 말인가?" (396쪽)

서로서로 도우라

자기 계발(self-help, 自助)은 참된 자아의 추구와는 다르다(원서 제목의 self-improvement가 뜻하는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도우라는 정신("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은 세상의 시스템에서 인정되는 방식으로 성취를 거두기 위한 정신 개조를 독려한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내게 있고, 그 해법 또한 마찬가지다. 문제 해결의 결과는 세상에서 이루는 성취이다. 앙드레는 동료의 질문에 응답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자기 계발이라는 광범위한 문화] 목적은 (중략) 바로 공동체의 훌륭한 구성원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399쪽) 하지만 이런 업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은 결국 내 영혼의 눈을 흐리게 만든다.

하나 자기 계발만 성취를 강조하지는 않는다. 위의 인용문에 중략된 부분을 되살려 보자. "그 목적은 다른 문화의 의식과 같지요, 바로 공동체의 훌륭한 구성원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계발은 이러한 성취를 위해 유독 자신에게 몰두하게 만든다. 타인들과 더 비교하게 하고 경쟁에서 우위에 서게 하는 것이다. "이[자아 최적화, 즉 자기 계발]는 곧 좀 더 생산적인 사람으로 변화시켜 경쟁 우위를 점하게 한다."(409쪽) 당연히 나의 참된 욕망보다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가 되기 때문에 외려 더 타인의 기준에 부합하고자) 타인의 헛된 욕망에 더 민감해지는 것이다. 남이 갖고 싶어하는 것을 내가 쟁취하여 만족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도와가며(사랑하며) 살 것을 요구하신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이를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영혼, 즉 참된 자아를 직면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각자의 참된 욕망에 충실하다면, 자연스레 서로서로 도와가며 살게 마련이다. 각자의 필요와 욕망이 다르고, 각자의 은사와 능력이 다르기에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와줄 때, 즉 서로의 필요를 채워 줄 때 자연스럽게 자신의 필요와 욕망이 충족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모든 공동체, 특히 교회 공동체의 구성 원리이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의 참된 자아와 그 욕망에 눈을 떠야 한다.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눅 12:19)."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 12:20)."

<자기 계발을 위한 몸부림>에서 드러나는 양태는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1990년대 후반 이후로 사회 전반에 자기 계발이 널리 퍼진 것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그저 기독교 라벨이 붙어 있을 뿐 실상은 그대로다. 내 영혼이 잘됨과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는 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교인 확보가 생존에 직결되고, 성공의 지표가 되는 목회자들에게 있어서도 상황은 매한가지다. 남과 비교하고, 서로 경쟁하는 것이 모두의 현실이자 운명이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남의 영혼을 얻는 것은 고사하고 내 영혼을 잃을까 두려워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서로 돕지도(사랑하지도), 또한 세상 속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지도 않고, 그저 자기 자신만을 돕기 때문이다. 세상의 눈에 비치는 한국교회는 그렇게 자기만 아는 추한 풍경일 뿐이다. 개독교라는 별명이 달리 나왔겠는가. 그런 자세로 교회에서 섬기고,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 열심에 비례하여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따름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이웃과 형제를 대한 우리의 태도로 확인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

이 책에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 칼과 앙드레의 관계 변화이다. 이 1년간의 프로젝트는 둘의 우정에 균열을 내고 말았다. 앙드레는 12월 30일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제 우리는 기분이 상한 채 헤어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렇게 많은 일을 함께해 왔는데. (중략) 물론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칼에게 짜증 났던 적도 많았다."(418쪽) 그 전전날에는 둘이 또다시 프로젝트를 함께하게 될지를 묻는 칼의 물음에 이렇게 답하였다. "난 잘 모르겠어. (중략) 사실 내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넌 다시는 나랑 일하고 싶지 않잖아."(414~415쪽) 자기 계발의 추구가 우정에 균열을 내고 말았다. 자기를 우선하는 게 자기 계발이니 놀랄 일도 아니다.

<자기 계발을 위한 몸부림>을 읽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계속 언급해 온 바와 같이 이 책은 자기 계발을 추구하는 삶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매우 진지하나 상당히 우스꽝스런 탐구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에 자기 계발에 굳이 돈과 시간을 쓰지 않더라도 그저 칼과 앙드레의 처절한 실험을 엿보는 것만으로 (수시로 웃음을 자아내는 가운데) 자기 계발의 의미와 그 폐해(그리고 약간의 유익)에 대해서 숙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실제로 자기 계발을 추구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들여다보고, 그러한 삶의 의미에 대해서 성찰하고 싶다면, 우선 칼과 앙드레의 일기를 펼쳐 볼 일이다(좀 더 관심이 생긴다면, 내가 쓴 <거대한 사기극>을 참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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