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은 무엇인가를 믿는 걸까요? 이런 물음을 새삼스럽지만 되묻지 않으면 우리는 이미 그렇게 생겨 먹은 대로 살면서 믿는 것을 대단하고 심지어 거룩한 것인 양 착각하게 됩니다. 게다가 문제는 이게 단순히 착각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믿음과 얽힌 착각은 곧 자기를 절대화하고 심지어 신격화하려는 생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31~32쪽)

[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묻지 마 믿음 그리고 물음>(동연)은, 육하원칙을 이루는 여섯 개의 의문사(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를 통해 자기도취적 우상숭배 '묻지 마 믿음'을 돌아본다. 저자 정재현 교수(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는 △무엇을 믿는가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믿는가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누가 믿는가 △언제/어디서 믿는가 문제를 제기하면서 신앙을 성찰할 것을 주문한다.

믿음에 대한 물음들을 통과하는 것, 신앙 성찰이 중요한 것은 믿음이 신앙의 핵심 주제이기 때문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맹목적 믿음이 배태한 독단·맹신·복종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큰 문제다. 이는 교회 사유화와 세습, 전횡과 횡령 및 성범죄 등의 문제가 있는 목회자 편에 서는 목사·교인들 모습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독실한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기업가들과 공인들의 윤리 부재가 빚어낸 결과물들도 맹목적 '묻지 마 믿음'에서 비롯한 것이다. 생각 없는 신앙, 물음 없는 믿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묻지 마 믿음'에 대한 물음 없이 예배 현장에 나가는 것은 자아도취 신앙을 반복하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 아무 성찰 없이 자신의 신앙과 종교체험을 반복 재생하며 안정감을 얻는 것을 '은혜'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구원받은 나'를 재확인하는 수단으로 예배가 존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신앙이 반복적 자기 확인 작업, 자아도취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충만한 은혜, 독실한 믿음이 자기 믿음을 믿는 것, 즉 자기를 믿는 것일 수 있다고 이 책은 경고한다.

<묻지 마 믿음 그리고 물음>은 질문과 질문을 거듭해 '믿음'의 진의를 찾는 작업을 돕는다. 믿음의 대상·정체(무엇), 믿음의 근거(왜), 믿음의 방법(어떻게), 믿음의 주체(누가), 믿음의 상황(언제/어디서)을 꼼꼼히 따져 묻는다. '아주 열심히 믿는 분과 도저히 못 믿겠다는 분을 위하여'라는 부제처럼 이 물음들은 '믿음'의 문제에 얽혀 있는 모든 종교적 인간을 겨냥한다.

<묻지 마 믿음 그리고 물음 - 아주 열심히 믿는 분과 도저히 못 믿겠다는 분을 위하여> / 정재현 지음 / 동연 펴냄 / 230쪽 / 1만 2000원. 뉴스앤조이 유영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인가

저자는 '그들만의 천국 잔치', '당신들의 기독교'로 지칭되는 교회의 현재 상황에 주목한다. 교회의 언어가 아니라 "'당신들의 기독교'인 '우리의 기독교'를 정직하게 볼 수 있도록 거리 두기의 길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일상의 언어로 물음들을 풀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섯 개의 의문사를 통해 믿음을 묻는 이유다. '무엇을 믿는가'라는 저자의 문제 제기는 물음들의 기초가 된다. 저자는 묻는다. 과연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인가.

우리는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다. 저마다 방식에 따라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이 아닌, 그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 내가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내가 믿고 싶은)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이가 자신이 믿는 하느님을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이라고 생각한다.

"혼자만 옳다는 믿음의 절대성 주장은 그 모양새가 거의 집착적이거나 마술적이어서 일상적인 삶과는 따로 놀 수밖에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이를 자랑으로 삼으니 그러한 믿음이 지금 여기서 실행하려는 되돌아봄의 가치를 인정할 길은 도무지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의 믿음을 절대화하니 우상숭배에 빠질 수밖에 없고 자기를 기준으로 내세우니 자기도취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58~59쪽)

"자신에게 진리라고 여겨지고 있는 것,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 등에 대해 근본으로 되돌아가 물어야 합니다. 우상은 대체로 이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런 우상이 어떻게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고 어떻게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60~61쪽)

성서가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을 비춰 준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태도라고 지적한다. 성서는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고 있는 하느님, 모세가 맞닥뜨린 하느님, 예레미야를 만나 주신 하느님"(65쪽)은 매우 다른 얼굴이다. 이는 믿음의 여정에 어떤 이해의 빛을 던져 줄까.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의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는 하느님'에서 '믿고 싶은 대로'를 떼어 내고 넘어서는 길을 가르쳐"(66쪽) 준다.

성서는 "직접 보여 주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것처럼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을 가리킬 따름"(66쪽)이다. 저자는, 인간이 만약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에 이를 수 있다면 그 이미지를 신격화하고 우상숭배할뿐더러 그 이미지를 믿는 자신을 절대화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우상숭배를 경계하는 2계명('어떠한 형상도 만들지 말라')도 이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성서를 통해 우리가 마주해야 할 존재는 자신을 풍성하게 드러내는 하느님이다.

저자는 성서가 오히려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을 믿는다는 착각을 깨부숴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 준다고 지적한다. 이를 잘 드러내는 본문 중 하나가 창세기 22장 '아케다'(이삭의 결박) 본문이다. 거대 족장으로 만들어 주는 등 아브라함에게 넉넉한 복을 허락한 것과 달리, 이 본문에서는 100세에 겨우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아브라함에게 명령하는 잔악무도한 하느님의 모습이 드러난다. 저자는 이 충돌을 아래와 같이 해석한다.

"사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인 거나 다름없습니다. (중략) 아브라함에게 그런 요구를 하시는 하느님은 누구이신가요? 절체절명의 엄청난 장면을 주목해 보십시오. 바로 이 장면은 우리 모두가 시작하는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는 하느님'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을 잠시나마 가리켜 주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중략) '내가 믿고 싶은 대로'를 여지없이 부수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어떤 형태의 우상도 에누리 없이 거부하는 단호한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69~70쪽)

"권위주의적이어서가 아니라 우상숭배에 빠질까 봐, 그래서 결국 인간이 스스로를 절대화할까 봐, 그래서 타인을 억누르는 못된 짓을 할까 봐, 범접을 허락하지 않는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에 대해 우리는 우리의 관념이나 신념, 이해나 믿음까지도 해제하고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도록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상파괴와 자기 비움의 방식으로 무장해제하는 것입니다." (70~71쪽)

우리 각자가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는 하느님'을 믿고 있다는 또 다른 근거는 저자가 분류하는 믿음의 유형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저자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 중 어느 것을 강조하면서 신앙하느냐에 따라 그 양태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지성을 강조하면 교리주의에 빠지기 쉽고, 감성을 강조하면 열광주의에 빠지기 쉬우며, 의지를 강조하면 도덕주의에 빠지기 쉽다. 누구든지 어느 한쪽에 무게중심이 있기에 각자가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는 하느님'을 신앙한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시인해야 한다.

'맹목적 믿음'에서
'무조건적 믿음'으로

'왜 믿는가'라는 질문은 '구원'과 연결되기 십상이다. 저자에 따르면, '묻지 마 믿음'이 형성되는 상당한 이유는 구원 여부에 대한 '불안'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불안은 자기 잣대로 구원 여부를 판가름하려 하는 독단적 행태로 이어진다. 구원을 확신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하느님 자리에 서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이 "'구원에 대한 확신'을 빌미로 하느님의 자리를 마구 넘보는 (중략) 하느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자기가 대신 앉아 버리는 '실제적 무신론'"(131쪽)과 다르지 않다고 비판한다.

죄와 죽음에 대한 인식이 가져오는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성찰 없이 '구원의 확신'만 붙들면, 예배와 신앙생활을 통해 자기 안정만 추구하는 '생각 없는 신앙'에 안주하는 것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신앙을 예배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대체로 '오직 믿음'이라고 말하면서도 구원과 믿음을 조건적 관계로 만드는 모순을 저지른다. 참된 신앙의 삶을 위해서는, 구원과 믿음 사이의 인과를 끊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저자의 인식이다.

"'구원받기 위하여 믿는다'라고 하면 구원이 믿음이라는 수단에 대한 목적이 됩니다. 말하자면 구원이 믿음과 조건적인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중략) 믿음이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인간의 투자(human investment to divine salvation)로 역전됩니다. (중략) 문제는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구원받기 위하여 믿는다'는 것이 일단 당연한 듯이 자리를 잡게 되면 한술 더 떠서 '믿음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데 이르게 됩니다." (113~114쪽)

저자는 구원이 목적이거나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맹목적 믿음'에서 벗어나 '무조건적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왜 믿는가'라는 물음은 물을 수 없는 물음이라고 말한다. 은총과 믿음은 무조건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조건적인 믿음(unconditional faith)'이 오해되어 '맹목적인 믿음(blind belief)'으로 둔갑"(117쪽)한 현실에 있다. 저자에 따르면 두 가지는 매우 다르다. '무조건적 믿음'은 맹목을 거절하고 자기에게 있는 조건적 욕망을 끊임없이 거절하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진실로 '맹목적인 믿음'이 거절하는 수행과 실천이야말로 참으로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그러한 수행이 믿음에 엉켜 붙어 있는 욕망이라는 조건들을 제거해 나가는 행위이고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겉보기에는 똑같은 '무조건적인 믿음'이라고 해도 이러한 되돌아보기를 거치기 이전과 그 이후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118~119쪽)

신앙은 '지킴'이 아닌 '따름'이다

그렇다면 신앙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저자는 기독교인이 지향해야 할 신앙의 근거로 누가복음 9장 23절 말씀을 가져온다.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신앙은 '지킴'이 아니라 '따름'과 '따름'으로 이어지는, 자기중심적 자리를 벗어나기 위한 지속적인 삶의 과정이라는 지적이다.

"'구원받으려거든'이나 '복 받으려거든', 또는 '잘살고 싶거든'이 아니라 '따르려거든 따르라'라고 선언합니다. 조건절 형식을 취하지만 동어반복을 통해 조건의 얼개를 깨부수는 절묘한 수사입니다. 말하자면, '따름'에 앞서 어떠한 조건도 전제되어 있지 않음을 명백히 함으로써 '따름'으로서의 믿음이 무조건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확연하게 선포합니다. 믿는다는 것이 곧 따름이라고 할 때, 이 따름은 그에 앞서 어떠한 조건도 깔지 않는 그야말로 무조건적인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136쪽)

이때 예수의 말씀에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을 믿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기 절대화와 자기도취에서 빠져나오라는 요청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대속을 명분으로, 성찰 없이 예수의 십자가에 신앙의 모든 것을 맡겨 버리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나라는 요청이다.

이 요청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믿는다는 것은 곧 그렇게 산다는 것"(157쪽)이라는 인식하에 믿음을 삶과 엮어서 봐야 하는 이유다. 따라서 자기도취와 우상숭배를 깨부수라는 요청은, 삶 가운데 이루어 낼 가능성이고 겸허하게 되새겨야 할 인생의 과제가 된다.

저자 정재현 교수. 뉴스앤조이 박요셉

물음을 미루지 않아야 하는 이유

나머지 세 가지 물음(누가, 언제/어디서) 중 '누가 믿는가'는 신앙 주체에 대한 인식을 촉구한다. 하느님이 인간을 전통이나 종교 집단이 아닌 개체로서 만나고 있다는 것이다. 각 사람은 "개체적으로 고유하게 하느님을 만나고 그 앞에서 자기 개체의 실존적인 결단을 해야 하는 과제를 받고 있다"(172쪽)는 지적이다. '나'는 타자와의 같음과 다름이 혼재돼 있는 혼종적 존재다. 종교 정체성에서도 마찬가지다. 같은 기독교인이든 타 종교인이든 누구와 비교를 해도 같음과 다름은 뒤섞여 있다.

"'누가 믿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나'는 그렇게 서로 다른 개체로서의 주체이면서 그런 개체적 주체도 같음과 다름이 뒤섞인 자기로서의 '나'입니다. 따라서 나의 믿음만 옳다고 주장할 그런 '나'가 홀로 있을 수 없으며 '믿음'도 옳음만으로 이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중략) '내가 다 이루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앞을 향해 달려갈 뿐이라'는 바울의 고백이 그리는 '도상의 존재'라는 것도 이것을 가리킬 것입니다." (184~185쪽)

'언제/어디서 믿는가'에는 시간과 공간의 특수성에 대한 인식이 들어가 있다. 인간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유한성을 가진 한계적 존재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신앙은 그 사람이 존재하는 시공간의 역사성과 사회성에 묶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경우, 무속과 유교의 뿌리 깊은 영향력 아래 있는 삶의 터와 얽혀 있다. '언제/어디서 믿는가'라는 물음은 이 같은 한계를 드러내 보이는 것과 동시에, 시간과 공간을 비집고 들어와서 인간과 관계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준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저자는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도 '누가-언제/어디서'의 물음을 통해 살펴볼 때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이 인간의 '누가-언제/어디서'를 하느님의 '누가-언제/어디서'로 더불어 나누는 행위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굳이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것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고통과 죽음 중에서도 가장 비참하고도 가장 잔인하며 가장 억울한 고통과 죽음을 그의 살과 피로 친히 겪음으로써 세상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우리와 더불어 그의 사랑을 나누신다는 데에 근본적인 뜻이 있습니다. (중략) 사람이 되어서 살과 피로써 직접 몸소! 그리고 더불어! 우리의 고통과 죽음을 겪으시는 사랑의 구원 말입니다." (210~211쪽)

저자 정재현 교수가 <묻지 마 믿음 그리고 물음>에서 던지는 여섯 개의 물음이 요청하는 것은 끊임없이 삶의 자리를 성찰하는 신앙이다. 그가 검토하는 물음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데서 발생하는 독단·맹신·복종을 벗어나는 길로 이끈다. 믿음의 여정에서 각 물음들을 검토하는 일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성찰 없는 확신이 강박이나 독단에 빠질 수밖에 없다면 참으로 믿음이 삶에서, 삶에 대해서 뜻을 지닐 수 있기 위해서는 이제 돌아보고 묻는 것을 미룰 수는 없습니다. 물음 뒤에 어떤 대답이 마땅할 것인지에 대해 우리가 두려워할 일은 아닙니다. 이걸 노심초사하여 주저하기도 하지만, 이건 그분이 하실 것입니다. 그리 믿고 묻는다면, 그 물음의 뜻을 그분이 이루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묻는 것은 우리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믿는다는 것이 따라가면서 묻는 것이 아닐까요?" (213쪽)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