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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교회, 분쟁 넘어 '성도의 역할' 묻는 기폭제 되길
마당 기도회 500회 포럼 권연경 교수 발제문
  • 권연경 (yonkwon@hanmail.net)
  • 승인 2018.04.16 18:46

사랑의교회갱신위원회가 4월 15일, '부흥으로 가는 갱신'이라는 주제로 마당 기도회 500회 기념 포럼을 열었습니다. 아래는 포럼 발제자 권연경 교수(숭실대 기독교학과)의 발제문 '교회 지도자의 범죄와 성도의 역할' 전문입니다.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길지 않은 시간의 발제라, 긴 논증은 생략하고 핵심 논점만 간략하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국교회는 유난히 지도자의 범죄에 취약한 면모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일단 범죄를 저지른 지도자 본인의 책임이 크지만, 이런 범죄를 가능하게 만든 제도의 문제 역시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도들의 역할 내지 책임에 관한 이야기도 함께 고려할 수 있습니다. 주장보다는 진지한 논의와 사색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지점들을 몇 가지 제시해 보겠습니다.

지도자의 범죄는 지도자가 사적으로 저지르는 내밀한 죄가 아니라 지도자의 역할 수행과 관련하여 혹은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남용하여 저지르는 범죄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담임목회자의 범죄가 되겠습니다. 한 교회의 지도자가 담임목회자 한 사람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거의 모든 권한이 담임목회자에게로 집중되는 경우가 많아, 논의를 이 경우로 제한하는 것이 가장 실속 있는 대화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4월 15일, 사랑의교회 강남 예배당에서 열린 마당 기도회 500회 포럼. 사진 제공 사랑의교회갱신위원회

개인의 범죄 혹은 공동체의 영적 위생

인간은 누구나 잠재적 범죄자입니다. 상식이기도 하지만, 또한 교회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인간 실존의 전반적 타락을 강조하는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실제 한 사회의 건강은 범죄의 가능성 혹은 욕망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통제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사회가 건강하다면 범죄는 개인의 일탈로 기록될 것입니다. 한 개인이 남다른 이유로 범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경우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교회에 고통을 주었던, 그리고 지금도 고통을 주고 있는, 소위 "지도자들"의 이름이 여럿 떠오릅니다. 이들의 책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특정 개인 혹은 그룹의 범죄가 빈발하다면, 이는 특정 개인의 문제를 넘어 집단 전체의 위생 체계가 문제가 됩니다. 한 사람이 아프면 그 사람 자신의 건강관리 소홀에 책임을 묻겠지만, 어떤 병이 사회 전체에 유행한다면, 개인의 위생을 넘어, 사회 전체의 위생 시스템 문제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범죄 역시 이 두 번째 경우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범죄자 자신을 비판하고 처리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그런 범죄를 방조하는 비위생적 환경에 보다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목에 들어간 "성도의 역할"이라는 어구 자체가 바로 그런 관심의 표현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달라져야 한다"는 절실한 인식의 발로일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여러분이 제시한 제목 자체가 벌써 해답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영웅 숭배의 유혹과 냉정한 현실 인식의 필요성

착한 목회자만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건 현실과는 무관한 희망 사항일 뿐입니다. 언제나 거짓 선지자들이 존재했던 것처럼, 지금도 가짜 목사들이 많습니다. 한 사람 속에도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있을 때가 많습니다. 우선은 건강한 사람처럼 보여도, 실은 우리 모두가 죄라는 병균의 보균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병균이 활동하기에 좋은 환경이 조성된다면, 언제든 환자가 될 가능성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신앙"을 명분으로 생겨난 집단이라, 많은 경우 교회는 매우 "해 먹기 좋은" 환경을 갖고 있습니다. 비교적 착한 사람이 많아서 다행이지만, 마음먹고 사고 치는 사람에게는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습니다. 지도자의 범죄를 그냥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견디겠다면 할 수 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인간의 죄인 됨에 대한 보다 냉정한 인식이 필요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발병을 막는 환경입니다. 아주 막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발병을 더 어렵게 하고, 빈도를 더 낮출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입니다. 여차하면 사고 칠 수 있다는 전제하에, 그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구조를 마련하는 일입니다. 이런 환경의 한 요소는 성도들의 냉정한 현실 인식입니다. "냉정한"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보다 "성경적인" 태도이기도 합니다. 핵심은 지도자에 대한 비판적 기능입니다.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맹신도"를 자처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동반자로서, 잠들지 않는 눈으로, 지도자를 위한 비판과 견제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적 표현을 쓰자면, "아무 영이나 믿는" 태도 대신, 신중한 눈길로 "영들을 분별하는" 태도입니다. 물론 지도자를 신뢰하고 존중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비판의 기능은 중요합니다. 지도자에 대한 비판자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은 관계의 한 주체로서 성도의 직무를 유기하는 일입니다.

적극적인 범죄 유발자는 아니겠지만, 발병 가능성을 알면서도 필요한 역할을 다하지 않는 방조자로서의 책임은 피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정말 다르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는 있지만, 거기서부터 "그러니 우리 목사님은 무조건 순종하기만 하면 돼" 하는 위험지역으로 비약하지 말아야 합니다.

건강해야 할 신앙이 결과적으로 영웅 숭배라는 일탈적 문화 현상이 되어 갈 때가 많습니다. 영웅 숭배는 대중에 의해 지탱됩니다. 교회라면 "교인"일 것입니다. 교회 내의 대중들이 영웅을 만들어 내고, 영웅으로 숭배합니다.

그래서 많은 교인은 하나님과의 실질적 관계에 기초한 내실 있는 신앙이 아니라, 영웅의 존재감에 기댄 맹목적 사고와 행동 방식을 학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앙이라 착각합니다. 신천지와 같은 사교 집단에서 극단적 형태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대부분의 교회에서도 관찰되는 광범위한 현상이기도 합니다. (여러 해 전 상암동에서 열렸던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대형 집회는 한국의 어느 이단의 집회 못지않은 영웅 숭배적 양상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 바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인은 실질적으로는 숭배의 대상인 목회자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지웁니다. 맹목적이 된다는 뜻입니다. 목회자의 타락은 영웅 숭배의 나무에서 자란 독버섯과 같습니다. 사회 법정에서 범죄가 확인된 목회자에 대해서도 무조건 "아멘"으로 다가간다면, 거기서 무슨 희망을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 책임이 더 큰가를 묻는 것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일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적 주체성 – 에베소서의 가르침

여기서 관건은 좋은 목사, 나쁜 목사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특정 목회자를 무조건 신뢰하려는 태도 자체입니다. 저는 이런 문제가 "대부분의" 교회에서 관찰된다고 말했습니다. 사랑의교회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겪는 고통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여러분 스스로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설사 훌륭한 목회자라 하더라도, 그런 태도는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 치명적입니다. 영적 주체성을 포기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에는 자신의 자율성을 포기하고 보다 큰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종속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일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원론적인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에베소서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불립니다. 내가 몸을 통해 나의 존재를 이 세상에 구현하듯이, "부재중"이신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해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구현합니다(엡 1:23; 3:10). 혹은 하나님의 임재를 구현하는 물리적 토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엡 2:20-22).

물론 이 "몸"은 믿는 자들의 무리, 곧 성도들로 이루어집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또 몸으로서 스스로를 세워 갑니다(엡 4:12). 아이의 성장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처럼, 이 몸의 성장 역시 몸 자체의 기능입니다. 도움은 받을 수 있고 또 받아야 하지만, 성장을 위한 몸짓 자체는 고스란히 성도들의 공동체 자체의 몫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자신을 세워 가는 활동을 "섬김"(diakonia)이라 부릅니다(4:12). 식탁에서의 섬김에서부터 사도의 섬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우의 섬김에 활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봉사" 혹은 "섬김"으로 옮길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 "사역" 혹은 "목회"라는 번역도 가능합니다. 라틴어 번역을 비롯하여 많은 영어 성경이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the work of the ministry" – Vulgate, KJV, NRSV, ESV). 에베소서 4장에서도 교회의 성장 과정에 일어나는 활동, 또한 성장을 위해 필요한 일체의 활동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성도들 자신이 교회를 세워 가는 섬김이요 목회자라는 뜻입니다.

물론 교회에 "지도자"가 있습니다. 에베소서에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 등의 역할이 언급됩니다. 사실 지금으로서는 이들의 역할을 엄밀하게 구별하여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다소 느슨한 의미로 교회의 "지도자"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이들의 역할은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4:12). 완벽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맡은 역할에 최적화한 상태로 만든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성도의 역할이 자기 나름의 섬김 혹은 목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가는 일이라면, 그 공동체 세움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상태로 성도들을 유지하는 역할입니다. 영어 성경은 대개 equip이라는 말로 번역합니다. 몸을 세워 가는 과정에서 (잠재적) 장애 요인을 제거하고, 역할 수행의 효과를 높여서 공동체가 최적의 "몸 상태"를 유지하여 그 성장이 순조롭도록 돕는 역할입니다. 말하자면, 축구선수들을 가르치고 돕는 감독의 역할과 비슷합니다.

이처럼 지도자의 역할은 결정적이지만, 제한적이기도 합니다. 성도를 제대로 구비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이지만, 책임은 거기서 멈춥니다. 섬김/목회 활동을 통해 실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은 성도들 자신의 몫입니다. 아무리 답답해도 운동장에 뛰어 들어가 선수들 대신 공을 찰 수 없는 것처럼, 제대로 안 된다고 섬김/목회의 일을 자신의 역할로 삼거나, 그리스도의 몸 세우는 일을 자기가 하겠다고 나설 수 없습니다. 답답하다고 해서, 아이가 자라도록 돕는 대신, 훈련해야 할 아이의 활동을 부모가 직접 해 버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지도자는 교회가 최적의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주신" 역할입니다.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있고 지도자들이 성도를 돕기 위해 구체적 임무와 함께 교회에 주어집니다. 물론 이것이 꼭 시간의 순서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논리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성도들이 우선입니다. 사도 바울이 선포한 복음 속에는 "그리스도 예수는 주"라는 고백뿐 아니라 "(예수를 위해) 우리가 여러분의 종"이라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고후 4:5). 그래서 아예 사도 < 성도 < 그리스도 < 하나님이라는 위계질서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고전 3:22-23).

이 가르침은 교회를 생각하고, "목회"를 생각하고, 지도자의 위상과 역할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에 중대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이 그림이 교회의 현실과 반대라고 느끼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지도자와 성도 관계의 전모는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 성경적 가르침의 한 부분입니다. 지도자를 존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존중은 역할의 혼동과 구분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세우는 일차적 주체는 성도들이지 목회자가 아닙니다. 너무 원론적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더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주제를 놓고서도 어쩌면 이것이 우리 생각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도자와 권력

덩치는 힘입니다. 커질수록 힘, 곧 권력이 생겨납니다. "교세"敎勢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결국 "세력"입니다. 교회에서는 그 권력이 자연 중심, 곧 "담임목사님"에게 집중됩니다. 교회의 대형화가 그 교회의 지도자인 담임목회자에게 거대한 권력을 부여합니다. 또 종교계의 "슈퍼스타"가 된 담임목회자의 "청중 동원력"은 교회를 더욱 거대한 조직으로 만들어 갑니다. 양적 성장은 질적 변화로 이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담임목회자의 권력은 더욱 "전제적"인 것으로 변해 갑니다.

심지어 목회자의 의중이 성도들의 신앙적 방향과 구체적 삶의 문제들까지도 결정하곤 합니다. 교회 내의 "빅 브라더"(Big Brother)가 되기도 합니다. 물론 영적 언어로 포장되곤 합니다. 성도들 입장에서도 자발적 존경이라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따르지 않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종속 관계로 변해갑니다. 이는 한국 대형 교회 모두가 공유해 온 고질적 병폐입니다.

대형 교회가 만들어 낸 문제라기보다는 교회의 "대형화" 현상과 맞물린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좋은 말로 "(영적?) 영향력"이라 부를 수 있겠지만, 본질을 따지면 권력 현상이요, 지배와 종속의 관계입니다. (신앙 연륜이 오래고, 지적으로도 탁월한 한 장로님에게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신앙적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답은 이랬습니다. "목사님께 한 번 여쭈어 보겠습니다." 그 장로님도, 그 목사님도, 도대체 그 긴 세월 동안 뭘 했던 걸까요?)

상식입니다만, 모든 권력은 타락합니다. 인간들에게 권력은 죄의 세균이 증식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부여하고 건강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예수님 같은 존재가 되어 달라는 요구와 같습니다. 결국 목회자의 타락을 막는 사실상 유일한 길은 권력을 부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 가장 어려운 고민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가장 실질적인 사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의 의도는 무슨 구체적인 방안을 제안하려는 것이 아니라, 권력 관계의 본질을 보다 적나라하게 묘사해 봄으로서, 생각의 거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교회 내 권력의 축적은 교회가 세상을 위한 존재로서의 본연의 의미를 포기하고, "자기들끼리 잘나가는" 자폐적 집단이 되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주변 사회와 소통되어야 할 인적, 물적 자원이 자신의 몸집 불리기에 활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부로는 권력형 부작용들이 만들어지고, 밖으로는 아무런 (긍정적) 영향력이 없는 집단이 되어 갑니다. 오히려 다양한 사회악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적 에너지가 세상 속 성도들의 삶에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예배당 안 성도들의 움직임에만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제자 운동으로 불리는 활동조차도 세상 속에서 존재감 있는 성도와 교회로 살아가는 훈련보다는 예배당 안에서 보다 실용적인 존재가 되도록 만드는 프로그램이 되기도 합니다.

교회의 존재에 대한 물음

대부분 한국교회는 "목회자"의 주도로 세워집니다. 핵심 그룹이 "개척 멤버"로 함께하지만, "바지 사장"이든 실권자든 그 중심에는 대개 목회자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 자체가 나쁠 건 없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설정하는 방향 혹은 존재 목표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교회가 세워지면, 그때부터 목표는 "성장"이었습니다. 물론 "양적 성장"입니다.

말이 좋아 성장이지, 실은 건강한 성장이나 성숙과 무관한 "체중 불리기"입니다. 제대로 된 복음 공동체를 지향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교회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수적, 양적 세 불리기에 전념합니다. 그래서 전도가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합니다. 또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상 돈이 교회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이런 식의 "교회 성장"이 오랫동안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세계관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개척 때부터 무한한 자기 확장을 지속해 갑니다. 수가 늘고, 돈이 많아지고, 공간을 더 넓히고, 살림도 장만하고, 차도 마련합니다. 당연히 숙원 사업은 "내 집 마련"입니다. 에너지의 상당 부분이 여기에 들어갑니다. 물론 욕심 혹은 "비전"은 계속됩니다. 교육관을 짓고, 수양관을 마련하고, 나중에는 죽을 자리까지 마련해 둡니다. 제가 쓰는 표현으로, "신혼살림 모델"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제성장이라는 신나는 파도를 타고 초고속 비만을 이루었던 한국교회의 전형적 모습입니다. 익숙한 모습이지만, 성경이 의도한 교회와는 거의 상관없는 그림입니다.

물적 확장이 목표가 되면, 성도들은 그 목표 성취를 위한 "수단"이 됩니다. 교인의 수가 "세력"으로 환산되고, 돈(헌금)으로 환산됩니다. 성도들의 건강을 무시하는 건 아니라고 변명할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그 건강조차도 정해진 목표의 수행과 관련된 지표들로 측정됩니다. "교회 생활"에 대한 열심이나 교회의 활동에 도움이 되는 정도에 따라 그 가치가 매겨집니다.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닐 수 있지만, 이런 기준은 다른 신앙적 지표들을 사실상 무시하게 만드는 강력한 흡인력을 갖습니다.

심한 경우 이는 여왕개미와 수많은 일개미와의 관계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가는 주체가 되어야 할 성도들이 다른 작위적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동원되고, 소비되는 비정상적 상황입니다. 이런 비틀린 구조 혹은 관계를 보다 선명하게 인식하는 일, 그리고 이를 보다 건강한 구조로 바꾸어 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는 교회의 존재 의미에 관한 보다 큰 물음과 함께 갈 것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토론을 위한 것이라, 굳이 표현을 정제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구체적 방안보다는 원론적 사색의 수준에 머무는 이야기들입니다. "국외자"의 입장에서, 저의 역할이 그렇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전 예배 설교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서초동"과의 싸움 자체에는 별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싸움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도 저는 잘 모릅니다. 제가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중심에서 벗어나 "마당"에 서야 하는 지금의 이 아픔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전과는 다른 자리에서,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영적 갱신의 계기로 작용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 행사도 반대편을 의식한 투쟁의 한 몸짓으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를 돌아보고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반성과 묵상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만 지금의 이 사건이, 그저 어느 한 교회의 분쟁 이야기를 넘어, 현재 급진적인 변화의 시기로 들어서고 있는 한국교회의 역사에 "의미 있는" 한 삽화로 기억될 것입니다. "지도자의 범죄"로 인해 촉발된 이 상황이 결국 "성도의 역할"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탐색의 기폭제가 되는 이야기, 작은 불행에서 시작되어 오히려 더 큰 감사로 진행해 가는 그런 이야기를 기대해 봅니다.

권연경 교수. 뉴스앤조이 구권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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