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서안산시온교회 이창갑 목사가 4월 1일,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하는 '2018 안산 합동 분향소 부활주일 새벽 기도회'에서 전한 설교문['갈릴리로 가자(막 16:1-8)']입니다. 허락을 받아 전문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역사와 사회의 어두움을 뚫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4년 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날은 공교롭게도, '죽음을 이긴 생명의 기념일인 부활절'을 코앞에 둔 수요일이었습니다. 며칠간 참담한 직후에 바로 맞이한 주일 아침, 그 누구도 부활의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없었습니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충격적인 일들은 그날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고, 상상을 초월하는 은폐와 조작은 한동안 그 누구도 세월호 참사에 대해 말을 보태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아무도 목소리를 내지 못할 때, 의식 있는 몇몇 작가가 국가적 거짓과 위선에 대한 공동의 목소리를 한 책에 담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책의 제목은 <눈먼 자들의 국가>(문학동네)였습니다. 모든 글이 절절했지만 그중 특별히 마음을 사로잡은 글이 있었는데, 그것은 진은영 시인의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진 시인은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후)에서 빌려 온 '연민'과 '수치'라는 개념으로, 참사를 맞아 우리가 느껴야 할 적절한 감정을 말하였습니다. 그녀는 세월호 사건에서 우리가 흔히 느낄 수 있는 불쌍하다고 느끼는 감정, 즉 연민이라는 감정이 지닐 수 있는 위선적 측면을 지적합니다. 연민이라는 감정은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사건에 대해서만 지닐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 시인은, 세월호 참사의 경우 희생자들을 불쌍하다 느끼는 연민의 감정은 적절한 감정도 올바른 감정도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우리 모두는 세월호 참사를 일으키게 만들거나 방조한 불의한 사회적 구조에 예외 없이 가담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느껴야 하는 감정은 연민이 아니라 '수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와 관계없는 사건이니 내 책임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는 연민이 아니라,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 역시 연관돼 있는 일부로서 철저히 책임을 통감하겠다는 수치심이야말로 우리가 느껴야 하는 올바른 감정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느껴야 하는 감정은 책임을 누락한 연민이 아니라 책임을 지는 길로 나설 수 있게 하는 수치심입니다. 이런 자각의 바탕이 없이는 우리는 진정한 예수님의 부활을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2018 안산 합동 분향소 부활주일 새벽 기도회' 설교를 맡은 이창갑 목사. 뉴스앤조이 박요셉

그동안 우리 사회는 대통령 탄핵과 구속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경험하며 격동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왔습니다. 그러나 4주기가 다 돼 가지만 그동안 겪어 왔던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과 고난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유가족이 무슨 벼슬이냐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마땅히 국가가 책임져야 할 진상 규명을 위해 그동안 유가족들이 손수 발로 뛰어야 했습니다. 위로받고 애도해야 할 시간에 광화문에서 청운동에서 노숙을 해야 했습니다. 40일이 넘도록 금식을 해야 했습니다. 선체 인양을 촉구하기 위해 안산에서 진도 팽목항까지 도보 행진을 했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었고, 사람들은 고스란히 우리 사회가 강자의 편에 서서 약자를 차별하는 모습을 목격해야만 했습니다. 더 깊게는 한국교회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내었습니다. 교회는 아파하는 이웃을 외면하였고 알려진 교계의 지도자들은 슬픔을 당한 이들보다 권력자들의 심기를 챙기는 일에 앞다투어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또한 "함께 울고 함께 웃으라"는 말씀의 진의를 우상숭배라는 종교적 도그마의 칼날로 재단하여 '고통'과 '죽음'의 의미를 폄훼, 왜곡하며 희생당한 이들의 슬픔을 더 가중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은이 엄마인 박은희 전도사님은 작년 감신대의 신학생들과 만남에서 "세월호를 침몰시킨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라고 말했습니다. 사회가 옳지 못한 길로 갈 때 옳은 목소리를 내야 할 교회가 오히려 "권세 잡은 자에게 순종하라"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입을 막으려 하고, 낮고 비천한 곳으로 오셨던 예수님을 이야기하지 않고 힘과 권력을 옹호하고 심지어 부당한 권세를 지키려는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결국 세월호를 침몰에 이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이들은 세월호 참사를 '신정론'으로 치부하여 인간의 책임을 회피하고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역사적 맥락에서 하나님이 알지 못하시는 사건은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해자의 폭력으로 피해자들이 슬픔과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아신다는 의미이지, 세월호를 대한민국을 회개하게 하는 도화선으로 사용하시기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은 어리석고 무지한 태도입니다.

어거스틴은 '악'은 '선의 부재'이기 때문에 '악'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비추어 본다면 세월호 참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실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악용한 사악한 인간들의 잘못이라 할 것입니다.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의 비도덕적 양심, 그리고 악한 행위의 문제이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순과 악행까지도 다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의 오용이요 종교적 폭력입니다. 그러한 오용과 남용은 악과 그것에 희생당한 희생자의 고통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여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입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만행을 침묵으로 방관했던 독일인들을 향해 '디트리히 본회퍼'는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죄"라고 명확하게 정리했습니다. 그가 고백했던 하나님은 '지금 여기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현재의 악의 문제를 관망하시거나 관망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회퍼는 '하나님의 침묵'을 들어 침묵하라고 하는 것은 "헐값의 위로",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은혜" 즉 '값싼 은혜'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앙의 모습에 대한 대안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시 진정한 부활 신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부활 신앙'이며, 그 점에 대해 바울 사도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선교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고전 15:14)." 부활 신앙은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생명 운동입니다. 그래서 부활 신앙이란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인자가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일어나는 장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에 모든 민족들은 오른편의 양과 왼편의 염소처럼 구분되고 "너희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는 기준에 의해 상벌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이 땅에서 가장 약한 이들, 작은 이들과 동일시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참사에서 사랑하는 이를 잃고 슬픔에 잠긴 유가족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또한 참사에서 살아남기는 했지만 그 고통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감당해야 하는 생존자로 찾아오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의 교회가 그들의 '곁'이 돼 주는 행동은 곧 예수님을 맞이하는 행동이요 부활하셔서 여전히 우리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는 신앙의 모습이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갈릴리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부활의 아침,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은 굴려져 있었고, 한 청년이 두려움과 놀람 속에 있는 무덤을 찾은 여인들을 향해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실 것이며 그곳에서 주님을 뵐 것이라고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이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 갈릴리입니까? 부활한 예수가 저 권력의 심장부 로마에 가서 당당하게 나타나 그 교만한 권력을 끌어내려서 사정없이 땅바닥에 내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니면 예루살렘에 현현하여 그토록 예수를 핍박했던 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면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부활이 없다고 오직 힘의 현실만이 있다고 했던 사두개파 사람들의 저 뻔뻔한 입을 틀어막아 버리면 얼마나 통쾌하겠습니까. 예수님에게 침 뱉고 채찍질하고 조롱하고 모욕했던 자들에게도 한 방 보기 좋게 먹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정의가 서고 그래야 진실이 살고 그래야 하나님의 엄위가 만천하에 밝혀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마가는 젊은이의 입을 빌어 예수님이 이미 전에 말한 대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리라고 말했다고 강조합니다. 적어도 마가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갈릴리뿐입니다. 갈릴리의 자리에 서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갈릴리는 오늘날로 치면 그리 거주하고 싶은 지역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중심부였던 예루살렘과는 달리 갈릴리는 변방이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한 '이방 땅'이었다고 해도 무방한 곳이었으며, 사람들의 생각 속에 밀쳐지고 소외된 지역이었다. 그곳은 흑암과 사망의 땅이었습니다(마 4:15-16). 갈릴리는 조롱과 무시의 대상이 되는 지역이었습니다. 소외와 가난, 절망과 슬픔, 눈물과 고통이 가득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갈릴리로 부르시고 그곳에서 만나시는 것 속에서 우리는 보다 깊은 의미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의 현장, 고통당함이 있는 곳이 바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고난과 부활은 연결돼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서로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갈릴리에서 하나님나라 복음을 선포하고 끊임없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온 예수의 실천 없이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갈릴리로부터 시작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십자가의 길을 걸어와, 마침내 십자가에서 큰 소리로 부르짖었던 그 물음, 갈릴리의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모든 버림받은 자들의 한 맺힌 절규,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외친 그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새벽 기도회 현장. 뉴스앤조이 박요셉

예수님의 부활은 뜬금없는 천상의 하모니가 아닙니다. 저 로마 군대의 승전 팡파르는 더더욱 아닙니다. 부활은 고난당하고 버림받은 자의 한 맺힌 절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에 죽임당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한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버림받은 자들의 땅으로 가야 합니다.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고,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음을 보여 주신, 위대한 영광의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체포되신 순간 도망쳤던 제자들을, 당신의 '형제들'이라 부르시면서 그들을 갈릴리로 부르십니다.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과 행적이 배어 있고, 자신들의 몰이해와 무지, 연약한 믿음을 드러냈던 그 수치스러운 원점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세월호는 오늘 한국 사회의 어둠이요 십자가입니다. 국민을 섬겨야 할 정치권력에 의해 철저히 진실이 은폐되고, 진실을 밝히려는 길을 차단당해 온, 끈질긴 악행덩어리의 표상이 세월호입니다. 인간 생명보다 돈과 권력을 더 중요시한 탐욕덩어리가 세월호입니다. 가족 친지를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유가족들을 냉정하게 외면한 돌심장이 세월호입니다. 그러나 세월호는 304명의 희생을 품은 우리의 십자가이기도 합니다. 진실은 감출 수 없습니다. 부패한 정치권력은 스스로의 무덤을 팔 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로 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자들을 기다리신다. 그곳에 그들을 회복시키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실패한 그의 제자들을 다시 제자의 신분으로 불러 세우시고 그들에게 선교적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회의와 불신앙을 정복하시고 부활의 증인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로 말미암아 슬픔과 두려움, 의심을 극복한 제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삶이 시작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증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어도 금방 모든 불의와 폭력들이 일거에 해소되지 않았음을 성경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권력의 폭력을 피해 숨어 다녀야 했고, 교회는 박해를 견뎌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활의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을까요?

스승인 예수를 버리고 배반했던 제자들의 수치심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복음에 대한 책임으로 진전해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책임감을 굳게 다진 그들은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임은 교회를 통하여 사람에서 사람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끝없이 이어져 마침내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예수 부활에 깃든 책임, 나에게까지 전해져 온 이 책임은 단지 종교적 영역의 것으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안산은 갈릴리처럼 고난당하고 버림받은 자의 절규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한 증인입니다. 절대로 진실을 감출 수 없고, 죽음이 생명을 이길 수 없고,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음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또한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갈릴리로 가야 합니다.

그 땅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만나시고 또 그 땅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그곳에 주님을 만나는 교회 또한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부활 신앙으로 이곳 안산에서부터 생명의 도시로 만들어 갑시다. 이곳이 생명으로 꽃피우고 정의롭고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상징적인 도시가 돼야 하겠습니다. 책임감을 갖고 부활 생명의 걸음을 걷는 부활의 중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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