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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만에 잊혀진 '국가조찬기도회' 유감
문재인 대통령의 축사와 소강석 목사의 설교
  • 최종원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8.03.10 14:43

1. 메시지에 주목할 이유

연일 터지는 굵직굵직한 뉴스들이 느린 삶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따라잡기 버겁다. 다이내믹 코리아(Dynamic Korea) 맞다. 인정! 워싱턴발 뉴스로 이슈가 묻혀 버렸기는 하지만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나온 문재인 대통령의 축사와 소강석 목사의 설교는 우리에게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그저 문 대통령이 목사 같고, 소강석 목사가 정치가 같았다는 인상비평으로만 끝낼 얘기는 아니다.

지금은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가 그 어느 때보다 거세게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인 과세며, 동성애, 차별금지법 등의 문제를 그저 기득권 교회들의 퇴행적 모습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민감한 문제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지금껏 한 번도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었던 교회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 북한 김정은의 고민도 이해 못 하지 않을 바에야, 소강석 목사나 한국교회의 입장도 이해해 주고 들어가야 한다. 특히, 소강석 목사의 설교는 그저 정치가 같았다는 것으로 폄하하기에는 여러 가지 분석할 의미 있는 내용들이 있다.

대부분의 목회자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한다. 국가조찬기도회는 그 대상이 교회를 넘어 사회이다.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나오는 것이다. 요즘 같이 한국 사회에서 교회가 비판의 중심에 서 있는 현상에서 소강석 목사 역시 그 메시지를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교회를 대표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한국 주류 기독교의 지도급 인사의 입에서 사회를 향한 한국교회의 현실 인식을 솔직하게 잘 정돈하여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 차별 대신 분리를?

문재인 대통령이 축사에서 희년을 언급하여 화제가 되었으나, 소강석 목사도 설교에서 희년에 대해 짧지 않게 언급하였다. 현장에서 어떻게 들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설교문은 흠잡을 데 없는 구조로 짜여 있었다. 공들여 문재인 정부의 성공과 국가의 안녕, 남북 화해와 평화를 빌고, 한국 사회 속에서 기독교가 해 왔던 긍정적인 역할에 대해 열거하였다.

사실, 설교자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설교의 마지막 즈음 아래 문단에 집약되어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영역 주권 사상을 주장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국가와 교회 간에는 서로 영역들이 침범할 수 없는 고유의 신분과 주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략) 그러므로 정부는 교회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거나 억압하지 말고 오히려 교회의 역할을 원활하게 펼칠 수 있도록 교회 생태계를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동성애자들을 차별을 하지도 않고 처벌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누가 동성애자를 차별하고 있습니까? (중략) 그러나 성적 지향이 포함된 차별금지법이나 개헌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역차별을 당하는 모순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는 설교의 기회를 통해 교회를 대표해 전하고 싶은 사회적 메시지를 던졌다. 교회의 현 상황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의 메시지는 없이 일방적으로 교회가 바라는 사항만을 던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다. 이로써 한국 개신교의 목회자의 관심이 교회의, 교회에 의한, 교회를 위한 메시지에만 있는 것 같이 보이게 만들었다. 우리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소강석 목사는 한국 보수 주류 교회에서 상당한 대표성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를 통해 드러난 메시지의 속내를 읽어 본다면 주류 한국교회가 느끼고 있는 위기의식이 매우 깊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만 생각해 보자.

첫째는, 그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 주권 사상'을 언급했다. 국가가 교회라는 고유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고 그 영역을 인정해 주고, 보호해 달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교회가 지향하는 것과 사회가 지향하는 것의 다름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겠다. 교회에 다른 일반 기관과 동일한 과세 기준을 부과하거나, 교회에서 동성애자를 수용하는 것 등은 재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차별금지법을 명확하게 반대하였다. 첫 번째 이슈와 연결되는 것이다. 교회는 동성애자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과, 차별금지법 제정이 교회에 역차별을 준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모순으로 보이는 이 진술의 진실은 교회에서 절대 동성애자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에두른 표현이다. 교회가 교회 밖의 동성애에 대해 처벌을 요구할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것은 교회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교회는 교회 내에서 계속해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금지하는 차별금지법이 교회를 역차별한다는 것이다.

복잡한 것 같지만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하자면, 세상과 다른 교회만의 고유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 벽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세상의 악한(?) 물결이 교회 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가능한 한 교회의 차이를 인정하고 보호해 달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아마 소강석 목사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 주권 사상이 어떠한 식으로 실제 사회에서 구현되었는지는 모를 것이다. 한국에서는 보수 교단에서 기독교 세계관이나 정치를 논할 때 지금도 곧잘 인용되고 있는 카이퍼이지만, 실제 영문 학술 저널에서 카이퍼가 인용될 때에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과 관련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의 영역 주권에 대한 주장은 네덜란드계 남아프리카인들인 보어인 지배자들이 흑백 분리 정책을 실행하는 근거가 되었다. 극단적인 분리주의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는 백인·흑인·인도인 등 인종에 따라 분류하여 거주 지역을 제한하고, 인종 간의 혼인을 금지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소강석 목사의 메시지는 차별하지 않을 테니, 대신 우리를 사회와 분리해 달라는 것이다. 사회와의 대화 속에서 교회의 역할과 위치를 찾아가고자 하기보다는 교회 문제는 교회에 맡기고 내버려 달라는 것이다. 마치 요사이 '미투' 운동이 걷잡을 수 없게 퍼지니 '펜스룰'로 대응한다는 움직임과 매한가지이다. 이것은 답일 수 없다.

3. 벽을 세우기보다 흘러 들어가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벽을 세우는 것은 간편해 보이는 대응 방안 같으나 해법이 되지는 못한다. 국제정치에서도 장벽을 세우거나, 고립시키기보다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는 것이 답이다. 서로 소통하고 흘러 들어가야 살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소강석 목사의 요구에 대한 답은 문 대통령의 축사를 통해 나왔다. 문 대통령은 교회가 겪는 위기의식을 극복하는 방식을 두 여전도사의 실례를 통해 제시했다.

"조수옥 전도사는 신사참배 거부로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평양 형무소에서 만난 아이들이 눈에 밟혀 자신의 쇠약한 몸을 돌보지 않고 1946년 9월, 고아원인 마산 인애원을 세웠습니다. 그 후 부모 잃은 아이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문준경 전도사는 병든 자의 의사였습니다. 문맹 퇴치 선봉자이자 우리들의 어머니라고 불렸습니다. 1950년 순교하기까지 생명을 다해 이웃을 사랑한 흔적들이 전남 신안군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문 대통령은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 것을 언급했다. 그의 메시지에는 '아이들', '고아', '병든 자', '우리들', '이웃' 등이 들어가 있다. 이들에 대한 기억과 돌봄이 지금 한국 사회가 기독교에 바라고 요구하는 핵심인 것이다. 세상의 약한 자, 병들고 소외된 자, 소수자들을 다시 기억하는 것이 한국 기독교가 사는 길이다. 같은 현실에 대한 문 대통령과 소강석 목사의 해법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두 사람의 축사와 설교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교회와 교회가 바라보는 사회의 간극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소 목사로 대표되는 이 땅의 주류 교회는 이러한 사회적 감수성이 메말라 소수자를 기억하는 사고조차 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일반 국민이 요구하는 것은 문 대통령의 기대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사회로 흘러 들어가는 교회의 모습이다.

문 대통령은 흘러 보내는 교회를 얘기했는데 소강석 목사는 벽을 세우는 교회를 얘기했다. 아마 포스트모더니즘, 동성애, 이슬람, 친북 좌파라는 세속의 도전 속에서 올바른 신학을 '정립'하고 '다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것이 현실에서는 타자에 대해 성벽을 만들고, 교회에 들어올 수 없게 울타리를 치는 것일 수 있다.

정체성을 세우고 신학을 정립하고 다지는 것만 강조하지 말고, 이제는 세상 속으로 교회의 가르침을 흘러 보내는 일을 하면 어떨까. 교회도 세상보다 더 급진적으로 타자를 수용할 수 있다고 한번 보여 주면 어떨까. 그것이 꿈 같은 얘기일까. 만약 교회가 이러한 급진성을 가지지 못했더라면 2000년간이나 유지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4. 의외성에 대한 기대와 기도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한 세대가 채 지나지 않아 교회는 큰 사회적 위기를 겪게 된다. 교회 내의 삼위일체 신봉자들과 아리우스파 간의 논쟁은 325년 니케아공의회가 끝난 이후에도 잦아들지 않았다. 그 와중에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 교육을 받았지만, 그리스도인 황제로부터 정적으로 몰려 아버지와 형제들이 무참히 죽임을 당한 개인사가 있는 줄리안이 황제로 등극했다. 흔히 배교자 줄리안으로 알려진 이 황제는 탁월한 통치력으로 로마를 안정해 가면서 로마를 다시 이교 신앙으로 돌이키고자 시도했다.

이러한 위기의 때를 이겨 내고 교회를 지켜 낸 인물들이 등장한다. 흔히 '위대한 갑바도기아인들'로 알려진 대 바실, 그의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 그리고 친구인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가 그들이다. 학자들은 그들이 활동한 이 4세기를 동방 신학의 황금기라고 부른다. 그 기본 맥락은 '신학은 삶'이라는 명제였다. 바실은 아테네에서 줄리안과 함께 공부한 탁월한 학자였지만, 그가 위대한 바실로 불리는 이유는 나환자들을 돕는 자선사업에 헌신한 삶 때문이다. 이들 모두는 차가운 교리가나 변증가가 아니라 핍박하는 자에게 축복하고 따뜻한 가슴으로 소외된 자들을 돌보고, 지성을 자랑하지 않는 겸손한 수도사의 삶을 살았다. 4세기 기독교의 위기를 극복하고 동방 신학의 황금기를 구축한 것은 정밀한 신학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였다.

반면, 서방 신학의 황금기는 12~13세기로 본다. 다양한 가설이나 설명 사이의 상호 간의 모순을 조화시키는 방식으로 결론을 도출하는 스콜라학의 발전 덕분이다. 신학은 이론을 통해서도 드러나야 하지만, 그 근본적인 앎은 삶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위대한 갑바도기아인들'은 웅변하고 있다. 피상적으로 흘러가는 교회의 흐름만 보면, 콘스탄틴 황제가 교회를 공인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소망을 찾기 어렵다. 교회가 세속화하면서 급격하게 변질되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대한 갑바도기아인들에게서 발견되는 의외성은 역사의 진보를 바라는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이들의 삶은 오늘날 우리가 돌아가서 회복해야 할 교회와 신앙의 근본이 무엇인지 제시해 주고 있다.

교회는 정체성을 세우고 지키는 곳이어야 하는가. 신학은 정립하고 다지는 학문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삶으로부터 세상으로 흘러 들어가도록 하는 통로여야 하는가. 곱씹어 고민해야 한다. 여전히 더 다지고 더 정립하자고 한다. 그러나 부지불식간에 그만 세상과 장벽을 세우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흘러 나가고 흘러 들어오도록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필수 사항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날 약속을 할 것이라고 감히 1년 전에 누가 예측이나 했겠는가. 그 때문에 나는 여전히 한국교회에서 성을 쌓기보다 세상 속으로 흘러 보내는 흐름이 생겨날 것이라는 의외성에 대한 기대를 접을 수가 없다. 그래서 기도한다.

2018년 3월 9일 최종원 교수(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허락을 받고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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