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MeToo) 운동은 "나도 말한다"라는 의미의 성폭력 고발 운동이다.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가운데, 국내에서도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피해 폭로를 계기로 법조계·문학계·영화계 등에서 미투 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법조계에서 시작된 한국판 미투 운동은 사법적 정의를 구현해야 할 검찰 내부의 성폭력을 드러냄으로써 사회 곳곳에 암처럼 뿌리내린 성폭력의 실태를 보여 주어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미투 운동이 일반 대중의 지지와 격려를 받으면서 사회 개혁 운동으로 유의미하게 부상하자 교계에서도 미투 운동이 확산될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한편 피해자의 사회경제적 '계급'과 조직의 성범죄 피해 구제 시스템 여부 역시 미투 운동 참여의 변수로 고려되고 있다. 그렇다면 절대적 약자이자 법적 안전장치도 없는 교회 내 성폭력 피해자가 미투에 참여할 수 있을까. 아직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미투 운동이 가진 문화 변혁력은 교계에도 이미 영향력을 끼치고 있고, 문제의식을 느낀 피해자들이 폭로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립되어 아무 말 못하고 괴로워하던 피해자들이 행위 주체로 나서서 연대하고 한목소리로 불의한 구조에 맞선다면 교회는 이를 진중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교회는 더 이상 성범죄에 대응할 수 있는 제도와 문화를 만드는 것을 미뤄서는 안 된다.

교회 내 미투 운동이 어려운 이유

교회는 생존권을 두고 투쟁해야 하는 직장과는 달리 자발적 결사체이며 그 구성원들도 가족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성폭력에 따른 갈등을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덮어 버리거나 피해자가 교회를 떠남으로써 갈등을 회피하는 것이 가능한 집단이다. 교회에서 미투 운동이 활성화하기 어렵고 성폭력 문제 해결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요인을 자세히 살펴보자.

1. 불평등한 의존 상태에서 피해자가 느끼는 죄책감과 수치심

교회 내 성폭력은 가족적 분위기의 교회에서 대단한 신망과 존경을 얻는 아버지 위치의 가해자가 피해자와 친밀한 의존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과거나 심리적 취약점을 알고 접근하여 그의 욕구를 충족하고 돌봄을 제공하면서 범죄를 저지른다. 이때 피해자는 그동안 쌓아 온 신뢰 때문에 저항하지 못하고 성폭력을 당하면서 엄청난 혼돈을 느끼게 된다.

가해자는 온갖 '말씀'과 거짓말로 피해자를 구슬려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성폭력을 지속하는데, 이런 상황이 지속될수록 피해자는 죄책감을 느끼고 "내가 잘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라며 스스로를 '죄인'으로 인식하게 된다. 피해자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피해 사실을 폭로하여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고 싶다 하더라도 가해자는 피해자의 비밀이나 취약점 등을 이용하여 공격해 올 것이 뻔하다. 피해자는 자신의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나서 사람들로부터 수치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침묵하게 된다.

2. 피해자에 대한 이단 낙인

교회에서는 목회자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유교와 무속의 영향을 받아 소위 '한국적 기독교'라고 부르는 근본주의적 기독교는 성직중심주의와 성서문자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신자들이 비판적 성찰을 하지 못하게 하고 공동체의 신앙을 마술적·전능적 수준에 고정해 놓으려는 경향이 있다. 공통의 환상에 기초한 종교적 신념을 유지해 주는 사람으로서 목회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의 성범죄를 가볍게 여기는 편이다. 그가 성범죄자라 할지라도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식이다. 이 얼마나 분열된 사고방식인가.

더군다나 봉건적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피해자를 공동체를 위협하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이단'으로 낙인찍어 교회에서 내보내기도 한다. 피해자의 인권침해에 귀 기울이지 않는 교회, 가해자의 범죄를 덮어 주고 피해자를 내쫓아서라도 유지해야 하는 교회는 누구의 교회이고 그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집단적 미몽에서 깨어나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성숙한 교회의 모습이 절실히 필요하리라 본다.

3. '회개'·'용서'에 대한 왜곡된 가치관

성폭력 가해자인 안태근 전 검사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동영상은 네티즌들의 분노를 자아냈으며, 그와 함께 기독교의 무분별한 회개와 용서에 대해 비난이 쏟아졌다. 가해자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는 것이 기독교적 가치관일까. 아니다. 하나님은 관계 속에 내재하시며 관계를 초월하여 더 큰 공동체로 나아가게 하시는 분이시므로 사람에게 짓는 죄는 관계와 공동체를 파괴함으로써 하나님께 짓는 죄가 된다는 이해가 필요하다. 회개 역시 관계를 회복하고 공동체를 치유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한편, 기독교는 여성의 희생을 이상화해 온 면이 있다. 이는 피해자가 트라우마를 자신의 '십자가'로 여기고 가해자를 용서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을 갖게 했다. 게다가 '흠 없는 희생양'이나 '순결한 마리아'와 같이 이상화한 종교적 이미지는 '성폭력 피해가 정당한 것인가'를 묻게 하여 피해자의 도덕적 위상을 판가름하고 거기에 부합하지 않으면 피해자에게 책임을 물었다. 가해자에게는 면죄부를 남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무분별한 사랑이 아닌 정의로운 사랑이 무엇인지를 판별하여 회개나 용서의 개념을 관계적이고 공동체적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나

그렇다면 미투 운동의 촉진과 더불어 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일까. 크게는 제도적 장치 마련과 의식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피해자와 연대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의식의 변화는 앞당겨질 것이며 변화된 의식이 제도 마련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1. 교회 내 성폭력 관련 법 제정

일각에서는 미투 운동이 성폭력 무고를 증가하게 하고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에 대한 인권침해를 일으킨다고 말하고 있다. 교계에는 아직 이런 우려가 현실화할 리 없는데도 미투 운동이 '교회 분열'을 일으킬까 두려워하는 이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폭력 사건의 진위를 제대로 파악하여 가해자를 처벌하는 법과 제도는 피해자 보호만이 아니라 공동체 보호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각 교단에 교회 내 성폭력 사건의 맥락과 특성을 고려한 관련 법과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이 시급한 시점이다. 또한 목회적 돌봄이 목회자의 권력 남용으로 이어지지 않고 성도들의 신앙적 성숙을 돕는 데 적절하게 사용되기 위해서는 목회자 윤리의 정립과 이를 감시·감독하는 교단 차원의 관리가 요구된다.

2. 평등 공동체 지향하는 예배·설교

설교나 성경 공부에서 여성을 '음녀'요 '죄인'으로 표상하는 성서 구절은 어떠한 비판도 거치지 않은 채 발화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해 성희롱도 서슴지 않는 교회에서 여성이 신앙생활을 할 때, 자기 학대 성향과 자발적 순종의 태도를 갖도록 사회화하고 있다. 여성의 공모와 함께 유지된 뿌리 깊은 성차별적 가부장제의 교회는 여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지 않고 열등하고 종속된 존재로 여겨 왔다. 성차별적 가부장제라는 근본적 발병 원인을 그대로 둔 채 교회 내 성폭력이라는 증상만을 고치고자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성차별적 가부장제의 '남성 지배 논리'는 모든 관계를 수직적·위계적으로 형성하려는 경향을 나타내므로 '권력형 범죄'인 성폭력을 지속하게 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차별적 가부장제를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불의한 구조로 여겨 전면적으로 거부해야 한다. 그리고 평등한 교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예배와 설교, 성례전을 바꾸어야 한다. 위계질서에 억눌린 자들이 예배의 주체가 되게 하고, 교회에 만연한 폭력을 종식하고 관계의 회복을 위해 결단할 수 있도록 예배 형식과 내용의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설교에 있어서는 남성 중심적 언어의 사용을 지양하며 포괄적 언어를 사용하되 그동안 들리지 않았던 여성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리고 약자들과 피해자들을 위한 기도문과 의례, 설교 등을 개발해야 한다.

3. 교회 내 성 담론 활성화

교회는 성을 죄악시하고 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금기시해 왔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영육 이원론에 기원을 두고 있다. 교부들은 몸을 '썩어질 육신', 구원을 방해하는 족쇄처럼 여겼고 '몸적 존재'인 여성을 '이브'와 같이 죄와 타락의 '유혹자'로 여겼다. 그 후 교회는 몸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이해하기보다 섹슈얼한 기호로만 받아들이게 되면서 '도구화된 몸', '대상화된 몸'에 대한 이해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런즉 지금까지 교회는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성폭력이라는 비인간적 현상에 침묵해 왔다.

교회는 또한 남성성·여성성이라는 고정된 성 정체성을 '하나님의 창조 섭리'로 주장해 왔다. 일면 평등해 보이는 이런 논리 밑에 교회의 기득권층이 남성 문화와 손잡고 남성의 성 본능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면서 여성에 대한 폭력과 통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없다고 볼 수 없다. 성별 고정관념은 '여성성'이라는 미명하에 성폭력에 취약한 여성을 계속 양산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이제 편견으로 가득 찬 성 정체성을 이용하여 상대를 재단하고 틀 속에 가두려는 태도를 버리고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성차를 존중하고 젠더 감수성을 훈련하는 것은 상대방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배려하려는 태도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이 성적 존재라는 것은 관계적 존재라는 의미이며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찾고 구현하는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타자 지향'의 욕망을 지니며, 쉽게 상처받기도 하는 '취약한 존재'들이다. 교회 안에서 "어떻게 관계 맺고 사랑할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성 담론이 활성화한다면, 교회에 만연한 성폭력에 저항하는 대안 문화를 형성하고 몸과 성을 포함하는 통합적 차원의 영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4. 목회적 돌봄 네트워크 구축

교회 내 성폭력이 불평등한 의존과 돌봄 가운데 일어난다는 사실에 주의한다면 모든 교인이 목회자에게 일방적으로 의존하고 목회자가 모든 교인을 다 돌보아야 하는 목회적 돌봄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목회자와 교인 사이의 불평등한 권력관계에서 의존이 악용되어 성폭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평신도 중심의 돌봄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의존과 돌봄을 필요로 하는 상호 의존적 존재이고 교회는 사람과 세상을 섬기고 돌보는 디아코니아 공동체이다. 세례받은 교인 모두가 목회적 돌봄을 수행할 수 있으며 다양한 은사를 통해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러한 돌봄 네트워크는 교인들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관계망으로써 누구도 소외되거나 억압당하지 않도록 가능하면 권력을 균등하게 배분하고 상호 호혜적 관계가 될 수 있게 구성해야 한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고린도전서 12장 26절의 말씀은 교회 안에 성폭력 피해자가 존재하고 고통받는다면 교회 공동체 전체가 그 일로 아파해야 하며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상호 의존하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 침묵하는 것은 죄이기도 하다.

교회 공동체는 미투 운동이 교회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엄중히 받아들여 개혁을 단행하고 피해자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하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미투 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교회는 사랑·평등·돌봄·연대의 공동체로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피해자뿐 아니라 교회도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이 글은 <기독교세계> 3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채수지 / 한국여신학자협의회 기독교여성상담소 소장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