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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사람들에게 꿈을 줘야 한다"
[인터뷰] 박일준 박사 독서 여정② - 포스트휴먼 시대, 어떻게 신앙할 것인가
  • 강동석 기자 (kads2009@newsnjoy.or.kr)
  • 승인 2018.02.11 13:30

박일준 박사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신앙은 희망이다." 박일준 박사는 말했다. 그는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와 동 대학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보스턴대학교(S.T.M.)와 드류대학교(Ph.D.)에서 '학제 간 연구'(Interdisciplinary Study)를 통해 '종교와 과학'을 공부한 뒤, 생물학적 인간 이후의 '포스트휴먼'(Posthuman) 담론을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글들을 발표하고 있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신학을 이야기해 온 그라면 색다른 답을 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신앙을 희망으로 정의하는 그의 대답은 하나님나라의 본질과 맞닿아 있었다.

박일준 박사는 오늘날 교회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교회가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꿈을 줘야 하고, 기존 가치 기준에서 '비존재'(inexistence)로 밀려나는 이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펼쳐질 포스트휴먼 시대에도 유효하다. 양극화가 지금보다 격화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존재의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사람들과 어떻게 하나님나라를 공유할 것인가는 포스트휴먼 시대에도 이어져야 할 기독교의 숙제다.

첫 번째 인터뷰 기사에서는 물리학·생물학·인지과학 등을 오가는 박일준 박사의 독서 이력과 '학제 간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풀었다. 이번 두 번째 기사에서는 그가 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 1953~) 교수의 저서를 통해 학습한 '트랜스페미니즘'(Transfeminism)과 포스트휴먼 시대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 1월 30일, 감신대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에서 2시간 가까이 나눈 대화를 정리했다.

- 박사과정 이후 기억에 남는 책들을 더 이야기해 달라.

로버트 코링턴(Robert S. Corrington, 1950~) 교수 자서전이 기억에 남는다. 박사과정 당시 지도 교수라서 내가 교정을 봤다. 한국에는 정신병에 대한 편견이 많지 않나. 나는 정신병을 한 번도 접해 보지 않았는데, 지도 교수가 중증 조울증 환자였던 것이다. 지금도 약을 18개 정도씩 먹는다고 한다. 저 책을 교정하면서 조울증에 대해 알게 됐다.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생각을 확 깨 줬다.

캐서린 켈러 교수의 책들도 읽었다. 지금 번역 중인 <On the Mystery>라는 개론서가 있다. 다른 한 권은 <Cloud of the Impossible>이다. 켈러는 여성신학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켈러의 신학에는 세 가지 강조점이 있다. 여성신학(Feminist theology), 과정신학(Process theology), 구성신학(Constructive theology). 그는 여기에 현대물리학 개념을 더한다.

코링턴 교수 자서전(오른쪽 위). 캐서린 켈러의 <On the Mystery>를 들고 있는 박일준 교수(아래). 뉴스앤조이 이은혜

과정신학은 관계성을 중요하게 다룬다. 많은 사람이 관계성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 지금 방 안에 세 사람이 있다. 이때 통상 세 사람이 서로 하나로 관계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관계하지 않는다. 세 사람이 있으면, 내가 두 사람을 품은 관계가 있고, 인터뷰하는 사람이 나를 품은 관계가 있고, 사진 찍는 사람이 나머지 두 사람을 품은 관계가 있다. 이 세 가지 관계만 해도 동일하지 않다.

세 명의 관계는 서로 관계하지 않은 채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켈러는 철학자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의 개념을 가져온다. 화이트헤드의 기본 철학은, 매순간 사건을 통해 하나의 행위 주체가 모든 관계를 중층적으로 펼쳐 낸다는 것이다.

관계의 중층성은 관계가 단순히 복잡하다는 수준을 넘어선다. 관계에서 각자 각자가 하나의, 각자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으면 중층성은 작동하지 않는다. 켈러는 관계가 훨씬 더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얽힘'(entanglement)이라는 물리학 개념을 사용한다.

얽힘은 무엇인가. 물리학에서 모든 입자는 서로 쌍을 이룬다. 우주에 있는 모든 입자가 스핀값(회전운동하는 물체의 운동량 – 기자 주)으로 짝을 맺고 관계한다. 그런데 만약에 두 입자 쌍을 우주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떨어뜨려 놓은 상황에서, 한 입자에 변화를 주면 어떤 일이 생길까 사고실험을 했다.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의 사고실험이다.

아인슈타인 공식에 따르면 빛보다 빨리 이동하는 입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주의 끝에서 끝으로 떨어졌다는 말은 너무 멀리 떨어져 서로 만날 일이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 둘은 관계로 얽혀 있다. 충격을 가하든지 해서 스핀값에 변화를 주면, 짝을 맺은 반대쪽 입자에 어떤 일이 생길까. 사고실험 결과, 아인슈타인의 물리학 공식에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결론이 나온다. 한 입자에 변화를 주는 순간, 우주 반대쪽 입자에도 동시적으로 스핀값의 변화가 생긴다는 것.

켈러는, 이 같은 얽힘 개념을 관계에 비유해서 썼다. 즉 관계라는 것은 빛으로 해석하는 물리적 방정식이나 법칙을 초월하는 상당히 신비로운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태를 분석·판단할 때, 대부분 선악 이분법에 따라 판단하지만, 관계는 복합적·중층적으로 얽혀 있다. 한 주체 안에는 여러 세계가 어우러져 있기에 쉽게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부정신학을 보면, 하나님의 '보여지는 얼굴'과 '안 보여지는 얼굴'을 다루지 않나. 우리는 알고 있는 만큼 모를 수밖에 없다. 관계하면 할수록, 나는 관계를 알아 가는 것보다 몰라 가는, 놓치는 측면이 더 많아진다. 내가 분명히 A라고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분명히 A가 아닐 수도 있는 측면을 함의한다. 내가 여성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내가 여성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모르는 게 분명하다.

가부장제를 이야기할 때, 가장 쉬운 방법은 선악을 나누는 것이다. 남자는 가부장제 주역, 여자는 가부장제 피해자라고 정해 놓으면 해답은 명확하다. 켈러의 요점은, 이렇듯 간단하고 명확한 해결법이 사태 해결에 도움을 주지 않고 사태를 더 악화하기 쉽다는 것이다.

테러리스트에 대한 해법은 조지 부시(George W. Bush, 1946~)의 방법이 가장 간단하다. 적으로 규정하고 섬멸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런 해법은 사태를 해결하지 않고 악화한다.

페미니즘과 관련해 가부장적 사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흑백의 이분법 논리보다 조금 더 복잡하게, 매순간 기준을 갖고, 그때그때 사안에 공정한 판단을 펼쳐 나갈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켈러 교수는 관계성을 설명하기 위해 현대물리학의 '얽힘'(entanglement) 개념을 가져온다.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의 사고실험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박일준 박사. 뉴스앤조이 이은혜

- 켈러 교수가 방한訪韓 강연을 할 때, 박사님도 '나 역시 남자가 아니다'라는 글을 발표했다. 페미니즘도 많이 학습했을 것 같은데.

변선환 교수님의 마지막 목표가 페미니즘이었다. 출교를 당했기에 진척이 안 됐다. 그리고 변 교수님은 작업을 진척하는 분이라기보다 제자들에게 표제를 던져 주시는 분이었다. 인간을 인간 되게 만들어 가는 존재는, 인간의 범주에 포함된 인간이 아니고, 인간인데 인간으로 규정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우리 시대 인간을 규정하는 척도가 되더라.

가부장적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느냐를 판단하려면, 가부장제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자신의 역량(capability)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당연히 여성이 인간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런 내용이 내 고민이기는 했는데, 페미니즘과 본격적으로 결합한 것은 최근이다.

최근에는 엘리자베스 그로츠(Elizabeth Grosz, 1952~)의 <Volatile Bodies>[역서: <뫼비우스 띠로서 몸>(여성문화이론연구소)]를 읽었다. 인지과학과 연관한 주제를 다룬다. 몸 이야기인데, 이때 'Volatile'은 휘발성처럼 규정이 안 되고 날아가는 것을 뜻한다. 엘리자베스 그로츠가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생각을 자기 생각과 결합해 페미니즘을 규정해 나가는 것을 보면서, 페미니즘이 남녀 문제를 넘어서서 비존재로 규정되는 모든 사람과 연대하는 담론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렇다고 페미니즘이 여성에 대한 죄책감에서 비롯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페미니즘 담론에 익숙해지면서, 생물학적 남성이나 사회적 젠더가 남성인 사람이 페미니즘을 접하게 됐을 때 크게 두 가지로 반응하는 것을 본다.

첫 번째는 반감이다. "나는 남자니까" 하면서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페미니즘을 남자의 적으로 삼아 바운더리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죄책감이다.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여성에 대해 자책하거나 미안해하는 것이다. 이는 1960년대 1970년대에 페미니즘이 남자와 여자를 이분법으로 나눠 놓고 심플하게 도식화해서 해법을 구할 때, 그것에 반발하거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비슷하다. 내 생각에는 둘 다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페미니즘이 정말 사회를 변혁하는 담론이 되려면 남성이 자신들이 남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남자를 상징화하는 '가부장'은 가부장제에서 생물학적 남성을 가리키지 않는다. 가부장 체제의 최고 권력일 따름이다. 거의 대부분의 남성은 가부장적 체제하에서 '비존재'다. 비존재의 동일성으로 연대해서 우리 사회에서 비존재로 밀려난 사람이 인간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을 개선하려면 손을 잡고 연대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발전한다. 탄핵도 광장에 100만의 사람이 모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소수가 진보적인 목소리를 낸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내가 페미니즘에 특별히 관심하는 것은, 페미니즘을 통해 비존재들의 연대를 구성해 나갈 수 있다면 사회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도 늘 여자와 더 가까이 있었다. 성적 대상으로서가 아니었다. 예수가 장애인, 세리, 술꾼 곁에 있었던 것은,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올 수 있는 대안적 방법이 비존재로 밀려난 사람들이 인간의 역량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는 진보 경제주의자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었을지 모른다. 모든 사람이 경제적 양을 동등하게 나누면 사회정의가 실현된다고 믿는 경우가 있다. 아닐지도 모른다. 가난해도 사람들은 행복할 수 있다. 물론 부유하다고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선입견이 문제다.

예수는 특정한 돈이 없어도 하나님나라를 열 수 있는 방법을 사람들과 공유해 나갔다. 그런 모습이 소비자본주의, 지구촌자본주의를 이겨 나갈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 최근에는 어떤 책들을 읽고 있나.

최근에는 앤디 클락(Andy Clark, 1957~),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1927~1998),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1947~) 등의 저서에 관심을 갖는다. 관계성을 하나의 끈, 네트워크 연결로 설명한다. 인간을 '사이보그'라고 규정하는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 1944~)와 같은 사람들 책도 집중해서 읽고 있다.

- 포스트휴먼 담론을 신학적으로 논의해 왔다. 포스트휴먼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뒀나.

포스트휴먼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유학을 갔다 온 뒤다. 포스트휴먼은 '트랜스휴먼'(Transhuman)에 대한 이야기와 같이 나오는데, 이 개념들을 접했을 때 내가 여태껏 공부했던 것과 큰 연결 고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랜스휴먼이라고 하면, 일부 사람은 기계를 통해 인간 몸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사실 '트랜스'라는 말에는 '초월'과 '건너간다',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니체의 '초인'(der Ubermensh)과 비슷하다. 'the Overman'이라는 의미니까. 인간이 인간을 넘어간다는 뜻이다.

포스트휴먼, 트랜스휴먼 개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생각의 징검다리를 놓아 준 사람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였다. 데리다의 <Margins of philosophy>에는 'The Ends Of Man'(인간의 종말)이라는 논문이 있다. 데리다는 여기서 근대 휴머니스트 철학자들을 살핀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자신들을 휴머니스트라고 지칭한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인간의 정의에는 아시아 사람, 아프리카 사람이 들어가지 않는다. 위선적 휴머니즘이다.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1925~1961)이 유럽 지식인으로서 식민주의를 비판하고 탈식민주의의 길을 열어 준 뒤로도, 휴머니즘 안에 다른 인종, 다른 계층 사람이 인간으로 포함되는 경계에서 배제된다. 데리다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폭력과 억압의 단초가 될 수 있듯이, 마찬가지로 포스트휴먼이나 트랜스휴먼의 개념이 폭력과 억압의 단초가 될 수 있다.

포스트휴먼 시대에 '호모 데우스'(Homo Deus, 신이 된 인간)를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가 <호모 데우스>(김영사)에서 이야기했지만, 그의 말도 호모 데우스가 되자는 것이 아니다. 이미 (과학기술의 발달로) 호모 데우스가 된 인간들이 사는 세계에서 어떻게 인간답게 살아갈 것인가가 진짜 문제다. 나는 이 말을 조금 다르게 이어받아, 모든 것이 세속화하고 신이 죽어 버린 이 세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성스럽게 하나님을 다시 믿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 박사님에게 신앙은 어떤 의미인가.

희망이다. "믿음, 소망, 사랑, 그중 제일은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두 번째를 소망이라고 하는데, 사실 많은 영어 번역은 '희망'(hope)이다. 희망은 참 묘하다. 희망은 꿈이기에 믿음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내가 믿는다는 것은 그것이 이뤄졌기 때문이 아니다.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대하면서 거기에 믿음을 두는 것이다. 희망이 꿈꾸는 세계는 실현되거나 도래한 게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고 꿈꾸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기적을 행하셔서, 기적적으로 몸을 치유해 줘서 그분을 믿는다면 이것은 믿음이 아니다. 예측이다. '나를 고쳐 줬으니까 또 해 주겠지' 생각하는 것이다. 일종의 통계인 셈이다. 정의의 나라는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다.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는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그것을 희망하고 따라가는 것이 신앙이다.

박일준 박사는 포스트휴먼 시대에 어떻게 신앙하며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하나님나라는 세상에 대한 뺄셈 공식이다. 우리가 세상이라고 믿는 전체를 100이라고 하고, 거기에 우리 신앙을 뺄셈하면 어떻게 되는가. 숫자적으로 두 가지 결과밖에 안 나온다. 신앙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는 뺄셈 공식이 먹히지 않는다. 결과값이 100이 된다. 뺄셈하는 값이 0이기 때문에. 대부분 기독교인, 비기독교인이 이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이라는 100이 그대로 남는다.

신앙인이라면, 세상이라는 전체에 신앙을 뺄셈했을 때 0이 나와야 한다. 0이 나오는 사람이 거의 없을 텐데, 100이 나오는 사람은 신앙이 없어도 세상이 있으면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것을 믿고 사느냐는 것. 그 결과값이 100이 나오면, 그 사람에게 신앙은 가치값이 0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세상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세상의 값을 0으로 무화할 수 있느냐는 것이 신앙의 핵심 문제다.

믿고 소망하는 가치가 세상에 있는 기존의 도덕적 가치라면, 그것을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기존 가치 범위에서 일탈하는 사람, 이를테면 소수자들을 없애야 할 것이다. 세상에 대한 뺄셈 공식이 신앙이라면, 신앙은 세상의 가치 바깥에 있다. 신앙은 언제나 기존의 가치 바깥으로 나간다.

기존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면, 예수가 활동 당시 도덕적 가치 기준으로 봤을 때 동족의 피를 빨아먹고 나라를 팔아먹는 세리와 어떻게 어울렸겠는가. 기존 가치판단으로 세리는 매국노다. 일제 때로 치면, 친일에 협조하고 있는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다. 민족을 해방하러 왔다는 구세주가 친일하는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예수는 어울렸다. 다른 기준을 봤으니까.

예수는, 세리도 나름대로 체제의 도구가 된 사정과 정황이 있지만 그가 비존재들과 연대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면,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 아니었을까. 기존 도덕을 지켜야 신앙이 선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신학적으로 완전히 잘못된 판단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신앙과 더불어 세상을 만들어 왔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은 경제체제든 정치체제든 가치 기준이 계속해서 바뀌어 왔다. 그렇다면 기존의 도덕을 지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지킨다는 말 자체가 상당히 모순적이다. 시대에 따라 세상의 도덕과 가치 기준은 바뀐다. 기존의 변해 가는 세상의 도덕과 가치 기준이 무엇을 빼먹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빠뜨리는 게 생길 수밖에 없다. 옛날에는 노예, 여성이 빠졌다. 현대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시아인, 흑인 등등….

포스트휴먼 시대에는 인종 구별이나 성의 구별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을 소유하고 거대한 자본을 갖고 있는 1%가 모든 부를 독식할 것이라고 하지 않나. 나머지 99%는 빈곤의 끝자락에서 살거나, 운이 좋다면 복지가 잘된 나라에서 기초 연금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나뉘는 세상에서 존재의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이들을 어떻게 품을 것인가가 이 시대 신앙의 핵심 문제다. 그들과 어떻게 하나님나라를 공유하면서 살지 고민해야 한다.

흑인신학자 제임스 콘(James H. Cone, 1936~)의 제자인 한 흑인 교수님의 통역을 도운 적이 있다. 이분이 이야기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개인 인격은 본받을 가치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남긴 연설 'I have a dream'은 많은 이에게 영감을 주고 회자된다. 그 연설에 나오는 세상은 한 번도 실현된 적 없다. 마치 꿈처럼.

꿈. 바로 지금 우리 시대 교회가 잊어버린 것이다. 교회 건물은 커졌고 정치적 수단은 늘었다.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됐지만, 우리 시대의 꿈이 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경멸의 대상이지 않은가.

로마 시대, 노예와 여자가 사람이 아니었던 그 시절에 같이 모여 형제와 자매라고 부르면서 한 공동체에서 예배했다. 당시는 노예에게 형제라고, 여자에게 자매라고 호칭하는 것이 불법이었다. 중세 가톨릭 제도하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종교개혁자가 성서를 번역해 평신도에게 나눠 주고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를 선포했지 않은가. 당시에는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꿈을 줬던 것이다.

사회문제를 보고 사람들을 돕는 일도 중요하다. 세상에 수없이 많은 차별과 부정의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얼마나 많은 것을 직접 해결할 수 있겠나. 노력을 최대한 해야겠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우리 몸의 실천을 통해 다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위험한 생각이다.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시대 사람들이 교회와 기독교를 통해 꿈을 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앞으로의 계획을 나눠 달라.

현재 골몰하는 신학 주제는 포스트휴먼, 호모 데우스 시대의 신학적 대안이다. 최근 관심하는 학자는 자크 데리다의 제자 캐서린 말라부(Catherine Malabou, 1959~)다. 데리다의 철학과 뇌과학 사이의 대화를 이끌었던 여성 철학자다. 이 사람은 요즘 우리의 두뇌가 네트워크처럼 평행 분산 병렬 처리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신경세포가 어떤 일을 처리하는 방식의 이미지가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시장과 너무 닮았다는 것이다.

이제 평생직장 개념이 없어지지 않았나. 모든 사람이 만능이 돼야 하고, 네트워크가 늘 열려 있어야 한다. 언제 무슨 일이 닥치든지 융통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캐서린 말라부는, '왜 뇌가 하고 있는 이미지와 자본주의 노동시장 이미지가 비슷한 것인가' 질문을 던졌다.

캐서린 말라부의 요지는, 두뇌를 이해하는 방식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두뇌를 이해하는 방식은 다시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조건이나 상황을 이해하는 데 큰 영향을 준다. 뇌의 모습이 먼저인가, 노동시장의 현실이 먼저인가. 어느 것이 먼저라고 말할 수 없다. 뇌의 모습이 그렇기에 노동시장이 그렇게 보일 수 있고, 노동시장을 그렇게 파악했기에 뇌가 이 이미지를 계속 투사하고 있을 수 있다.

우리 시대 자본은 네트워크로 평행 분산 병렬 처리된다. 네그리(Antonio Negri, 1933~)와 하르트(Michael Hardt, 1960~)가 쓴 <제국 Empire>(이학사)의 결론이기도 하다. 호모 데우스 시대, 인간이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으로 연결되고 인공지능을 사용하고 신체적 결함을 기계적으로 극복할 것인데, 좋은 세상만 열리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시간제 비정규직이 돼서 2~3가지 일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상황이 놓일 것이다. 이 시대 신학적 대안이 무엇인지 살피려 한다.

두 번째는 오래된 과제다. 포스트휴먼과 연관한, 자연과 인공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것이다. 요즘 생태 친화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도가 높지 않나. 친환경 농법이라는 말을 쓰고는 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 해법이 산업자본주의가 환경을 남용해 온 방식의 대안이 되기보다 그것과 맞물려서 같이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명박 대통령식 녹색 성장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홀푸드'라는 유기농 식품을 파는 식료품점이 체인점으로 동네마다 있는데 매년 성장한다. 유기농이라서 일반 사람이 먹는 음식보다 비싸다. 그런데 이것이 점점 더 커지면서 대기업 소수 자본에 의해 장악된다. 우리 시대에는 단순한 이분법에 자본의 힘에 의해 조작, 남용되는 것이다. 포스트휴먼 시대에 이분법을 넘어서 어떤 대안을 모색할지가 관심사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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