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근 전 검사의 성추행 사건과 간증에 대한 비판 여론이 뜨겁다. 간증에서 보인 안 전 검사의 모습을 두고 영화 '밀양'의 실제 사례라고 말하는 이가 적지 않다. 이에 <뉴스앤조이>는 '밀양'을 소재로 용서와 사랑, 구원 등에 대해 다루는 <숨어 계신 하나님>(IVP)을 출간한 바 있는 김영봉 목사에게 이번 사태에 대한 기고를 요청했다. - 편집자 주

1.

안태근 전 검사의 일로 요즈음 나의 SNS 담벼락이 뜨겁다. 문제는 그가 지난 10월에 세례를 받으면서 했던 간증에서 시작되었다. 그에게 세례를 베푼 교회는 세례 후보자들 가운데 한 사람을 선정하여 세례에 임하는 소감을 나누게 해 왔는데, 당시에 안태근 씨가 대표자로 선정되었다. 그는 기독교와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온 50여 년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늦게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자신의 교만과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된 것을 감사한다고 고백했다. 그는 공직자로서 "깨끗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왔으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공직을 떠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위로와 힘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고백 중에 그는 여러 번 눈물을 훔쳤다. 교회는 늘 하던 대로 그의 간증 영상을 교회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 영상을, 8년 전에 그에게서 성추행을 당한 기억으로 괴로워하던 서지현 검사가 보게 되었다. 보도에 의하면, 그는 그 영상을 보고 견딜 수 없는 분노를 느꼈던 것 같다. 자신은 그 일로 인해 지금도 살이 떨릴 정도인데, 그 장본인은 그 모든 죄과를 씻어 낸 사람처럼 말하고 있으니, 피가 거꾸로 솟아오를 만하다. 그것이 서 검사로 하여금 침묵을 깨뜨리게 만들었고, 그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검찰 내부에서는 차제에 관행화된 이 문제를 해결하자는 움직임이 거세고, 교계에서는 세례와 간증의 관행에 대해 반성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작년, 국내에서는 문단에서 은밀하게 자행되고 있던 성추행과 성폭행의 실태가 몇몇 작가에 의해 수면 위로 드러났고, 미국에서는 연예계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사실들이 공개되면서 세상이 뒤집힐 듯했다. 그것은 곧 MeToo 운동("나도 당했어")으로 번져 나가 사회 곳곳에 숨겨져 있던 인간의 어두운 욕망의 모습들이 드러나고 있다. 그럴 법한 사람에서만 아니라 그럴 법하지 않은, 존경받는 영화인들과 언론인들 그리고 정치인들까지 이 일로 인해 차례로 무너지고 있다. 도대체 안 그런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

이런 추문이 존재하지 말아야 할, 혹은 적어야 할 영역이 오히려 더 깊이 곪아 있다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는다. 영적 권위를 악용하여 탐욕을 채워 온 목회자들이 거듭 우리를 실망하게 하더니, 이제는 검찰 내부에 숨겨져 있던 음흉한 얼굴을 보고 경악한다. 여성 검사가 꼼짝없이 성추행을 참아야 한다면, 이 나라에서 그 문제로부터 안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목회자는 그의 영적 책임 때문에 그런 문제에서 자유해야 하고, 검사는 그에게 주어진 법적 책임과 권위 때문에 그런 문제에서 자유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권위와 권력이 오히려 더 안전하게 악행을 즐기게 만든 셈이 되었다.

이번 기회에 교계에서도 MeToo 운동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순진한 기대일까. 그동안 불거진 일부 목회자의 스캔들은 널리 퍼져 있는 현상의 예외적 표출이다. 교단 안에서 혹은 교회 안에서 위계에 의한 성추행과 성폭행의 실상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깊고 더 넓다. 담임목사의 습관적인 성추행적 언어와 행동을 참고 살아온 여성 목회자들 혹은 직원들이 목소리를 낸다면 어찌될까. 하지만 지금 한국교회의 상황으로 볼 때 그런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보다 더 현실적인 기대는 목회자들이 지금의 상황을 보고 경각심을 느끼고 언행을 고치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여성 검사를 향한 웬만한 성추행적 언어와 행동을 관행처럼 여기는 검사들이 있는 것처럼, 목회자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여성 부교역자만이 아니라 남성 부교역자들에게도 언어적인 폭행을 일삼는 목회자들도 적지 않다. 어떤 경우에는 평신도 지도자들이 부교역자나 사무원 혹은 목회자의 아내를 상대로 그렇게 하기도 한다. 교회와 교계 내에 약자를 억압하고 유린하고 착취하는 불의한 일들이 말소되지 않으면 교회는 복음을 말할 자격을 잃는다.

또한 이번 사태를 지켜보는 그리스도인들 각자는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습득된, 성을 대상화하고 수단화하는 성향에 물든 사고방식과 언어와 행동을 반성해야 한다. 일반화하여 말하자면, 한국 남성의 경우 자라면서 왜곡된 남성성을 주입받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여성을 대상화하고 수단화하는 농담을 즐기고 성적 무용담을 자랑하는 문화에서 자라는 동안에 그런 사고방식과 언행을 당연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사태를 보면서 각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구체적 사례가 생각난다면 용기를 내어 그 사람에게 진실하게 사과하여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곳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파수꾼의 역할을 하고, 그런 일로 고통받는 약자가 있다면 그의 목소리가 되어 주고 힘이 되어 주어야 한다.

2.

이번 사태와 관련한 또 하나의 논점은 회개와 간증에 관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안태근 씨의 회개를 가짜로 단정한다. 어떤 이들은 영화 '밀양'에 나오는 유괴 살인범 박도섭이 자신의 범행으로 아들을 잃고 아파하는 신애 앞에서 자신은 하나님께 이미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신애는 자신이 용서하지 않은 박도섭을 용서했다는 신에 대해 분노를 느끼며 무너진다. 서지현 검사가 말한 성추행이 실제로 있었다면, 안태근 씨의 간증 영상을 본 그의 심정은 신애의 그것과 유사했을 것이다. 자신은 8년 전에 당한 일이 어젯밤 일처럼 생생한데, 정작 그 일을 행한 사람은 성자라도 된 것처럼 간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개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던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서는 '유턴'(U-turn)으로서의 회개이고(돌아섬으로서의 회개), 다른 하나는 자신이 행한 잘못에 대한 구체적인 회개('뉘우침으로서의 회개')다. 세례는 '유턴'으로서의 회개를 확인하고 공표하는 예식이다. 세례를 통해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것이 칭의의 사건이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칭의가 곧 구원의 완성인 것처럼 가르쳐 왔다는 데 있다. 요즈음 신학자들 사이에 이 문제에 대한 반성이 이어지고 있어서 다행이지만, 교회 현장에서는 여전히 세례가 구원의 종착점인 것처럼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즉시로 성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하늘로 들려 올려지는 것도 아니다. 회개하고 세례받음으로써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 구원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회개의 열매를 맺는 성화의 삶으로써 구원받은 증거를 드러내야 한다. 그럴 때 첫 번째 회개가 진실임이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안태근 씨의 회개를 가짜라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지금으로서는 진짜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것은 안태근 씨가 앞으로 증명해 가야 할 일이다. 그가 속한 믿음의 공동체도 그가 회개의 열매를 맺도록 도와야 하는 책임 앞에 서 있다.

한 사람이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은 점진적인 과정이다. 물론, 회개하는 즉시로 자신의 과거 죄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면서 즉시로 행동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윤리적인 완전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또한 더 많은 경우에는 마치 신생아가 점진적으로 자라서 사람의 모습으로 형성되듯, 영적 신생아도 그렇게 점진적으로 형성된다. 안태근 씨는 50년 넘게 세속적인 가치관과 지혜를 따라 성공 지향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가 세례를 받고 거듭났다고는 하지만 옛 사람의 습관에서 온전히 벗어나려면 상당한 시간의 노력과 아픔을 겪어야 한다. 그가 간증을 하면서 "비교적 모범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했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공직을 떠났다"고 했는데, 지금의 그의 세계관과 가치관에서는 그것이 진심일 수 있다. 다만 그가 제자로서 성화의 길에서 계속 진보한다면 그러한 인식들에 대한 잘못을 깨닫고 어떤 손해를 당하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며 처벌을 받는 데까지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는 영적 여정의 출발점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법적 정의를 따라 자신의 책임을 져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렇기에 믿음의 공동체는 그가 법적 정의를 따라 당당하게 책임지도록 권면하는 한편, 새 사람으로 자라 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안태근 씨 자신도 이제 자신의 회개의 진위를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입장에 내몰린 것을 깨닫고 영적 결단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에 그의 영성이 아직 연약하겠지만,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배운 복음의 빛에서 깨달은 잘못에 대해서는 진실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며 필요하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만일 여기서 주춤하여 다시 과거의 방식대로 자신을 변명한다면 그는 자신의 회개가 거짓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 된다.

이 사태를 지켜보면서, 세례와 간증에 대한 교회의 관행에 대해서도 숙고하고 고민할 필요를 느낀다. 오늘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세례를 준비하게 하면서 그리스도인 됨에 따르는 값에 대해서는 별로 강조하지 않고 그리스도인 됨의 유익에 대해서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에도 권면하여 세례받게 하는 경향도 있다. 나 자신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세례 실적주의에 모두가 물들어 있는 것이다. 제자가 되려면 그에 따른 값이 어떤 것인지를 충분히 알고 시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눅 14:25-33)을 기억한다면, 좀 더 신중하게 세례를 준비하게 해야 옳으며, 세례 후보자에게 진실한 회개와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 약을 처방하면서 반드시 부작용을 설명해 주어야 하는 것처럼, 복음을 설명하면서 그 복음에 따른 희생에 대해서도 말해 주어야 한다.

세례를 준비하는 사람의 간증은 대체로 감동적이다. 한 사람의 영적 변화의 과정에는 언제나 신비한 손길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교회에서 세례 후보자에게 간증을 하게 한다. 나도 몇 번 그렇게 했었는데, 유익보다는 위험이 더 많다고 판단하여 중단한 지 오래다. 우선,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 공동체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본인 자신에게 영적으로 유익하지 않다. 세례받은 사람은 교우들의 영적 도움 가운데 겸손히 영적 성장을 추구해 가야 하는데, 공개적인 간증과 그로 인한 교우들의 반응과 기대 때문에 영적으로 교만해지거나 위선에 빠질 수 있다. 감동적인 간증의 당사자가 그 이후의 삶을 통해 이런저런 약점을 보일 때면 교인들도 상처를 받는다. 간증은 한 공동체 내에서 충분히 검증된 사람에게 부탁할 일이다.

안태근 씨의 간증이 이러한 문제를 극단적으로 증명한다. 이번 사태로 인해 안태근 씨의 믿음이 어느 길로 갈지 염려스럽다. 부디, 이 풍파를 잘 견디고 진실한 신앙인으로 형성되어 가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그것은 초보 신앙인에게는 너무도 감당하기 어려운 도전이다. 평생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온 사람도 이런 상황에 처하면 부인과 변명으로 대응하곤 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것을 생각하면 그의 회개와 거듭남이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고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점진적으로 숙성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이번 풍파와 홍역이 연루된 개인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결국 모두에게 좋은 결과로 귀결하기를 소망한다. 또한 이번 사태가 검찰과 교계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 있는 어둠을 제거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 아멘.

김영봉 / 버지니아 와싱톤사귐의교회 목사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