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금의 영성> / 헨리 나우웬 지음 / 김한성 옮김 / 포이에마 펴냄 / 88쪽 / 9000원

<모금의 영성>이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두 가지 생각이 집요하게 나를 따라왔다. 하나는 하루하루 핍절한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 정말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 또 하나는 모금이 구걸로 보일 수 있다는 비참한 생각이다. 어느 날 갑자기 안정된 교회에서 부목사로 생활하다 낯선 도시에서 교회 개척을 시작했다. 사십 대 후반에 낯선 외지에 아무 수입도 없이 교회 개척을 한 것이다.

말이 개척이지 가족끼리 예배하는 것 말고는 할 것이 없다. 실제로 감당하는 서평과 몇 곳에 기고하는 글은 수입이 없다. 책을 골라 구입하고, 하루 종일 책과 씨름하고, 그다음 날이 되면 한 편의 서평이 완성된다. 묵상 글은 더 짧다. 그러나 시시포스의 저주처럼 진한 고뇌로 만들어 낸 글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수입이 없다.

그렇다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없다. 아내는 작년 가을 수술을 해서 조금만 무리해도 쉬워야 하고, 나 또한 무릎이 좋지 않아 한 시간 서 있기도 힘들다. 그것뿐 아니라 아내가 몸이 불편하니 내가 아이들까지 돌봐야 하는 상황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박하게 필요하지만 누군가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은 비루해 보여 페이스북에 계좌 번호 띄우는 것이 전부이고, 8개월이 지났지만 딱 2편의 공개편지를 썼을 뿐이다. 그것도 불특정 다수에게.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심적으로 부담이 되고 힘든지는 직접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 가난했지만 돕는 자로 있었다. 매월 고아들을 돕는 단체에 고정적으로 기부했고, 지인들 중에 어려운 분이 있으면 허리띠를 졸라매고 돕기를 즐겼다. 그러나 받는 위치가 되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가장 큰 문제는 타인들의 시선이다. 얼마 전 대담한 젊은 목사 입에서 '목사들의 거지 근성'이란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비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실제로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 상대편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는 아는 것이 아니다. 안다는 생각 자체가 교만이다. 이런 실수는 누구나 하며, 나 또한 여전하다. 그러니 헨리 나우웬의 이 책은 기부가 소외되고, 나눔이 허공 속에 메아리치는 상황에서 적절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민해야 할 주제이기도 하다.

헨리 나우웬 책이 대부분 그렇지만 논리적 순서가 담겨 있거나 명징한 지식을 전달하지 않는다. 이 책은 강연을 엮은 것이며, 헨리 나우웬 글만을 추려 낸다면 고작 60쪽 분량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기독교인이 모금에 대해 가져야 할 생각이 무엇인지 성경적 관점에서 정확하게 짚어 준다. 8장으로 이루어진 작은 이 책에서 헨리 나우웬은 모금과 몇 가지 사실을 짚어 준다.

먼저 모금은 사역이다. 즉 모금은 '대책'이 아니라 "사역의 형태를 띠어야 한다"(23쪽)고 조언한다. 모금은 "우리의 비전과 사명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제공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선포하는 행위"(24쪽)이다. 즉 구걸이 아니다.

둘째, 모금은 "회심하라는 부르심이다."(24쪽) 이것은 모금자나 후원자 모두에게 해당된다. 하나님을 협력을 통해 일을 하신다. 모금 사역에서 회심은 "진정한 관계"(28쪽)를 이루는 것이다. 먼저는 모금자에게 거룩한 삶으로 살아가도록 요구한다. 기부자가 모금자의 삶을 보았을 때 실망하지 않아야 한다. 헨리 나우웬은 바로 이 부분에서 모금이 사역임을 회상시킨다.

"사역의 한 형태인 모금은 설교나 기도나 환우를 위로하는 것이나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을 주는 것만큼이나 영적인 활동이다." (29쪽)

3장에서 헨리는 모금자 자신이 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종용慫慂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보다 스스로 저축하여 안정을 추구한다. 이것은 필자에게도 역시 동일하며 인간의 보편적 성향이다. 그러나 저축은 한편으로 하나님이 아닌 돈을 의지하는 행위일 수 있다. 또한 저축에는 나누지 않는 여정이 포함되기도 한다. 돈이란 이처럼 인간의 안정 요구에 대한 깊은 욕망의 실체이기 때문에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 저축하든지 나누든지 중요한 문제는 돈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금자가 보여야 할 회심의 모습이다.

셋째, 모금은 하나님나라가 임하도록 돕는 방법이다(35쪽). 하나님은 성경의 어느 곳에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만, 다른 곳에서는 구제하고 사랑하고 연보하라고 말씀하신다. 바울은 연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 8:13-15)."

이것은 이스라엘 출애굽 당시 광야 생활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하늘을 열어 먹을 것이 없는 이스라엘에 만나를 내리셨다. 만나는 안식일 외에 저장되지 않는다. 만나는 매일의 양식이다. 신약에서는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말씀이신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옳은 말이며 바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만나는 확장된다. 그것은 만나가 가진 혁명성 때문이다. 만나는 하나님나라의 실체를 보여 준다. 바울은 그 실체가 바로 연보(나눔과 기부)에 있다고 주장한다. 헨리 나우웬은 이러한 바울의 생각을 간파하고 이렇게 말한다.

"만약 우리가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재정을 모금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이 그분의 나라를 세우시도록 돕는 것이다." (36쪽)

헨리 나우웬은 적절하게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의 후한 베풂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배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며, 베풂의 친절이 하나님의 은혜의 일부가 되어 "원래의 경계를 넘어서, 이 세상에서 역하시는 하나님"(63쪽)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넷째, 모금은 영적 친교로의 초대다. 헨리 나우웬은 후원을 요청하는 것을 "새로운 영적 교제로 초대하는 것"(67쪽)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은 명징하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롬 8:22-23에 기록된 '탄식'을 "시간과 공간이 가진 한계를 초월하는 하나님과의 친교, 그리고 우리 둘 사이의 친교를 갈구하는 탄식"(67쪽)이라고 말한다. 헨리 나우웬의 통찰은 이 바로 지점에서 드러난다. 그는 모금의 행위를 "당신이 우리를 알기를 원합니다"고 말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과의 친교와 서로 간의 친교로 부르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모금의 행위는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일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모금의 여정에는, 모금에 대한 인식과 돈에 대한 가치의 변화 등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 여정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공동체로의 회귀로 귀결된다. 여기에는 부자들에 대한 인식 변화도 포함한다.

헨리 나우웬은 마지막을 '기도와 감사'로 마무리한다. 기도가 "돈 있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적대감과 의심이 아닌 환대로 여기도록 회심하게 돕는 영적 훈련"(76쪽)이라는 충고는 깊이 새겨들을 필요가 있는 듯하다. 기도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으로 타인을 보도록 변화하게 한다. 마지막 문장은 우리에게 모금이 무엇인지 잘 보여 준다. 필자는 헨리 나우웬의 모금에 대한 도전에 적극 동의하며, 좀 더 충분하게 설명되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도 갖는다.

"감사는 모금 행사를 구걸하지 않고 진행하게 해 주고, 분노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마칠 수 있도록 돕는다. 모금 행사에 오가며,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마음으로 기뻐하고,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안전히 거할 수 있다." (79쪽)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정현욱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에레츠교회 목사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