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 나나 "가즈아!"를 외치는 시대가 됐다. 사람들은 고수익을 기대하며 큰 위험을 안고 암호 화폐에 투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뉴스앤조이 최승현

"이게 우리 시대 마지막 탈출구였던 것 같다."

[뉴스앤조이-구권효·최승현 기자] 친구의 메시지가 하루 종일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평범하게 회사 다니고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사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1년에 한두 번씩 보고 한 달에 한두 번씩 메시지 주고받는 사이인데, 어느 날 '비트코인' 이야기를 꺼냈다.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투자했는데 6000만 원을 땄단다.

소셜미디어에서 누가 몇 억을 땄다더라, 몇 십억을 땄다더라 하는 말은 체감되지 않았지만, 나와 비슷한 녀석이 실제로 비트코인으로 돈을 벌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래 봤자 빚 갚는 데 쓰겠지만, 몇 주 만에 1년을 일해도 벌지 못하는 돈을 손에 쥐다니. 친구는 마지막으로 비트코인이 우리 시대 마지막 탈출구였던 것 같다며 "우리는 좀 더 빨리 알았어야 했다"고 했다.

주식 한번 해 보지 않은 나 같은 사람도 친구들을 만나면 꼭 한 번씩 비트코인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만큼 암호 화폐(cryptocurrency) 열풍이다. 이미 온라인 커뮤니티는 암호 화폐 이야기로 도배됐고, TV에서는 암호 화폐와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토론회가 열린다. 정부는 비트코인에 대한 과열된 투기를 잡느라 정책을 내놔야 하는 상황이 됐다.

투자를 하든 안 하든, 많은 사람이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암호 화폐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기독교인이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논의는 별로 없다. <뉴스앤조이>는 암호 화폐 투자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논의를 시작해 보는 차원에서 대담을 마련했다.

경제학을 공부한 후 금융 시장에서 오랫동안 일한 경험이 있는 <뉴스앤조이> 강도현 대표와, 전자공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기독교인의 사회적 성숙을 위해 위해 일해 온 청어람ARMC 양희송 대표가 1월 22일 대담을 나눴다. 블록체인과 암호 화폐가 무엇인지 등 기술적·원론적인 부분보다는, 이 시대 현상을 바라보는 기독교인의 자세와 기독교 윤리의 과제를 점검하는 시간이었다.

강도현 대표(왼쪽)와 양희송 대표(오른쪽)는 비트코인 열풍과 관련한 대담에 참여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금융 상품화'한 암호 화폐는 문제

번 사람 있으면 잃은 사람도 있는 제로섬 게임

사회적 논의 충분치 않아

- 암호 화폐와 블록체인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비트코인 광풍은 블록체인의 발전이나 이상과는 전혀 관계없다고 할 정도일까.

양희송 / 나는 그렇게 본다. 지금 대부분이 블록체인 기술에 관심 있어서가 아니라, 비트코인을 고수익 금융 상품으로 여겨 투자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 상황은 블록체인의 발전 가능성과 같은 기술적 측면보다는 경제학적으로 들여다보는 게 적합할 수 있다. 지금 암호 화폐 하루 거래량이 수십조 원으로 추정된다. 시중에 투자 가능한 유동성이 다 그쪽으로 쏠리고, 기존의 주식 혹은 돈이 돌아야 하는 영역에서 돈이 쭉쭉 빠져나간다. 정부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강도현 / 암호 화폐 열풍이 거품이라는 진단에 동의한다. 정상적으로는 블록체인이라는 기술 자체가 어느 정도 투자가치가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없어지고 암호 화폐가 금융 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암호 화폐는 달러를 깨뜨릴 수 있는 대안 경제, 대안 화폐 시스템이 아니다. 암호 화폐는 블록체인이라는 걸 어떻게 상용화할 것인가 하는 논의에서 일종의 인센티브 개념으로 나온 것이다.

'10억을 벌었다', '100억을 벌었다' 시중에는 돈 딴 사람만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러나 분명 10억을 딴 사람이 있으면 그만큼 잃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비트코인은 주식처럼 회사가 부가가치를 생성해서 다 같이 돈버는 구조가 아니다. 오히려 제로섬게임에 가깝다. 잃은 사람들이 말이 없으니 버블이 더 끼는 것 같다.

- 어쨌든 블록체인 기술은 발전시키되, 현재 비트코인과 같은 투기 광풍은 정부의 개입으로 어느 정도 제재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

양희송 / 처음 블록체인 기술이 천명한 것은 중앙 권력의 개입 없는 아나키즘적 사회, P2P 거래의 신뢰성을 획기적으로 높인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기술은 앞으로 훨씬 더 발전할 것 같다. 그렇다고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장밋빛 미래 사회가 올 것인가. 그렇게 낙관적이지는 않다고 본다.

블록체인 기술의 의미는 좋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에서는 투기의 요소가 강하다. 기술은 과학과 수학의 영역이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경제 영역에 가깝다. 정부가 정책을 내놔야 하는 상황인데, 관료들은 이 현상을 큰 난관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블록체인 기술이 여러 정책을 뚫고 계속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 기술적으로는 낙관, 사회 정책적으로는 난관, 양자를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강도현 / 블록체인 기술과 비트코인을 떨어뜨려 생각할 수 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비트코인은 2008년 처음 등장한 개념이지만, 블록체인은 20세기부터 있던 기술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블록체인의 활성화를 위해, 사토시라는 그룹(혹은 개인)이 자본주의와 결합한 솔루션을 내놨고, '비트코인 채굴' 개념이 등장했다. 그리고 10년 후 블록체인 기술이 대중의 관심을 받고 활성화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블록체인을 활성화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블록체인 기술은 자본주의와 결합되면서 20여 년 만에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코인을 주는 방식 말고 블록체인을 발전시킬 대안이 있다고 주장하려면, 그게 무엇인지 제시해야 한다. 암호 화폐에 대한 아무런 대안 없이 블록체인만 발전시킬 수 있다는 건 무책임한 얘기일 수 있다.

강도현 대표는 비트코인 열풍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 암호 화폐 투기 열풍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비슷한 현상이었던 2000년대 닷컴 버블은 결과적으로 한국 IT 산업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따라 정부의 과도한 개입을 우려하는 사람도 있다.

양희송 /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마음이 편치 않다. 기술을 중시하는 사람은 "기술은 발전돼야 한다. 거기서 나오는 시행 착오나 부수적 피해는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고 한다. 손해 본 사람들도 어차피 처음부터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인 거 알고 들어온 것이라는 얘기다. 물론 이것이 자본주의의 기본이지만 너무 냉정하다. 누군가 망한 대가로 기술이 발전했다는 건 잔인한 이야기 아닌가.

강도현 / 닷컴 버블 초기, 비합리적으로 뛰어든 사람들이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결국 국가가 개입했고, 그 정책은 계몽이었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지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적으로 계몽이 이뤄졌고, 어떤 자세가 합리적인지 인식이 형성됐다. 복권을 1000만 원씩 사는 사람을 제재할 수 있을까. 복권 구매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무엇이 합리적인지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것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제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비트코인에 대해서는 (대두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이해도나 합리적 논의가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사회적 논의가 미성숙하다고 판단되면 국가가 나서서 어느 정도 제재할 수도 있다. 사회성이 담보되기 전까지는 일시적으로 막는 것이다.

- 정부가 거래소를 폐쇄하겠다고 하자, 청와대 홈페이지에 청원이 올라오고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았다. 제목이 짠하다. '정부는 국민들에게 단 한 번이라도 행복한 꿈을 꾸게 해 본 적 있습니까?' 특히 정부 발표 후 젊은 층에서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까지 떨어졌다. '한탕주의'는 문제이지만, 한탕 없이는 평생 빚만 갚아야 하는 한국 사회도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양희송 / 투기 광풍은 한국 사회 젊은이들의 현실을 보여 주는 창이다. 여윳돈이 있어서 하는 게 아니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니 한방을 노리고 뛰어든다. 특단의 대책 없이는 삶이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함이 있는 것이다. 암호 화폐나 블록체인이 더 발전할 것이라는 기술적 낙관 때문에 달려드는 것이 아니다. 로또를 사는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가 로또를 못 사게 한다고 생각해 보라. 꿈도 꾸지 말라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강도현 / 젊은 세대는 지금 한국 사회 경제 구조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부모 세대에서 큰돈을 만질 수 있는 방법은 부동산이었다. 그때 부모들은 부동산에 투자하든지 안 하든지,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젊은이들은 부동산에 투자할 수조차 없게 돼 버린 것이다.

이들은 최소한 비트코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대학교 등록금을 비트코인에 투자하는 사람이 나온다. 그 사람은 대학교를 졸업해서 전공을 살려 먹고사는 것보다, 그 돈으로 투자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소한 자기가 투자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으니 페어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두 사람은 암호 화폐가 달러를 대체할 수단은 아니라고 했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비트코인이, 지금은 '금융 상품'화 되어 버렸다는 데 동의했다.

새로운 금융자본주의 시대로 돌입

산업화 시대의 윤리관으로 설명 어려워

'회색 지대' 지날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

- 사회적으로 암호 화폐 논쟁이 뜨거운데 교회는 조용한 것 같다. 기독교는 현재 상황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양희송 / 2000년대 초반 닷컴 버블이 불 때 나는 영국에서 유학 중이었다. 그때 켄터베리 대주교도 닷컴 버블에 경고하는 목소리를 냈다. 과도한 투기는 윤리적으로 문제이니, 기독교인은 자제해야 한다는 취지의 메시지였다. 실제로 모럴해저드도 많았다. 있지도 않은 기술을 있는 것처럼 속여 투자받고 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성공한 사례도 있지만 수많은 벤처가 망했다.

비트코인 시장도 어느 정도 결과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기독교 윤리적으로는 이에 대한 논의조차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한국의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일반적 윤리는 '노동 윤리'다. 땀흘려 일한 것의 보상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대가 금융자본주의로 넘어오면서 불로소득, 땀흘리지 않은 소득이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게 됐다. 시대가 바뀐 지 오래됐지만, 아직도 기독교 윤리적 측면에서의 논의는 별로 없다.

자본주의에는 어느 정도 기독교 정신이 있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개신교와 자본주의가 운명 공동체인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베버는 책 마지막 부분에서, 지금 자본주의는 스포츠적 열정으로 개신교 윤리와 상관없이 굴러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미 그때부터 자본주의 질서를 개신교 신앙 윤리로 정당화하거나 서포트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자본주의에 대한 고찰이 없으니 '사용'에 대해서만 말해 왔다. 수단에 대한 성찰은 없고, 돈 많이 벌어서 헌금하면 된다는 식이다. 반면, 일부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보며, 이는 성경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자본주의가 인간 소외를 일으킨다는 지적은 물론 중요하다.

그런데 오늘날의 경제 작동 구조는 산업화 시대와는 다르다. 굉장히 복잡하고 많은 질문이 나온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 윤리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산업화 시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금융자본주의 시대에서 해야 할 얘기가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강도현 / 지금은 자본이 노동보다 더 큰 생산 비중을 차지한다. 자본이 투여된 기계가 생산하는 자본의 비율이 점점 커지고 있다. 자본에 의한 자본 창출이 윤리적으로 옳지 않으니 이를 제재해야 한다거나, 기독교 윤리적으로 이런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마냥 쉽게 말할 수는 없다.

결국 자본이 낳은 자본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배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자본이 생산하는 지분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소유권을 주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기독교 신학과 윤리가 이를 설명하고 답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방식이 수학적으로 변하면서, 자본주의를 이해하기가 어려워졌다. 기독교인뿐 아니라 진보적인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이, 실제 주류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사람들과 너무 다르다. 생각의 차이는 당연하겠으나 체계 자체가 달라지다 보니 말 자체가 안 통하게 됐다.

자본주의가 문제가 많지만 최소한 봉건주의보다는 낫다. 자본주의 체제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상향식으로 만들어졌다고 본다. 그 과정에 리카르도, 아담스 같은 담론가들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런 점에서 최근 주목할 만한 사람이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다. 피케티는 진보적인 사람들이 솔깃할 만한 얘기를 하면서도 주류 자본주의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런 사람이 더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양희송 대표는 한국교회가 새로운 현상들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생겨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 암호 화폐에 투자하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교회에서도 누구는 투자를 하고, 누구는 따기도 하고 누구는 잃기도 할 텐데,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모르겠다. 불로소득을 노린다는 생각에 때로는 위화감이 들기도 한다.

양희송 / 먼저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한 교회 안에서도 누구는 주식 투자를 해서 돈을 벌고, 누구는 임대 사업으로 돈을 번다. 누구는 돈이 없어서 투자 자체를 못하는 게 현실이다. 이 현실과 우리는 공존한다.

현실에서 육체노동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고, 노동 없는 경제 체제로 넘어가고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는 육체성을 되살리는 자급자족 실험을 할 수도 있다. 자본에 투자하고 거기서 발생하는 수익을 모든 구성원에게 공평하게 나누자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대안적 절충점이 만들어지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기독교 윤리가 언제나 모든 문제에 답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윤리적 회색 지대에서 살아가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없던 지대가 생기고, 자명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자명하지 않아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어떤 현상이 새롭게 등장하고 우리가 거기 당면했을 때, 그 순간을 지나갈 때는 윤리적 회색 지대로 잠정적으로 지나갈 수밖에 없다. 모든 현상이 급격하게 다가오는 시대인 만큼, 지나고 보니 이게 맞았구나 하면서 돌아보고 정리할 수는 있어도, 내다보고 미리 결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스도인은 답을 다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암호 화폐 열풍과 같은 새로운 사회적 현상이 낯설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가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상황에 대응하는 훈련을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해야 한다. 'Yes or No'로 세상을 나누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정직하지도 않다. 옳고 그름을 한 번 정한다고 끝까지 입장을 바꾸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많은 한국교회 교인은 자기 스스로 감각을 찾지 않고, 바깥에서 답을 찾으려 하고 자기 윤리 판단 사고를 외부 권위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처리해 왔다. 목사님이 "투자해도 됩니다"라고 말하면 투자할 건가. 교인 스스로가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가치 판단을 외부 권위에 외주 주는 방식으로 신앙생활하면 안 된다.

그래서 하라는 말이냐 하지 말라는 말이냐고 묻는다면, 답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다만 우리는 여기에 대한 윤리적 질문, 고민, 논의가 충분하지 않다. 한국교회는 그런 것을 활성화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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