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교회세습반대를위한신학생연대가 명성교회 세습 반대 운동의 의미를 짚는 차원에서, '명성교회 세습 반대 운동이 한국 사회에 갖는 함의 - 교회의 공공성 회복과 한국의 사회적 구조 개선에의 참여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글을 보내왔습니다. 전문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1. 들어가는 말

한국 사회는 일종의 세습 사회이다. 한국 사회는 정치와 경제, 학문과 문화 전반에 걸쳐 세습적 권력이 힘을 얻는 기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부모 또는 조부모의 직업과 재산의 정도, 혹은 특정 전문 분야에서의 명성 등은, 자녀 세대에 결정적인 성장 요인으로 작용한다. 때문에 유명했던 정치인의 자녀들이 국회나 정계로 진출하는 것과 대기업 총수의 자녀들이 경영진으로 승진하는 사례 등은, 이제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보여서 문제의식을 갖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보일 정도이다. 최근 한국 사회의 청년들에게 퍼지고 있는 일명 '숟가락론'은 이러한 출발선상의 불평등을 잔혹하게 보여 준다. 이른바 '금수저', '흙수저'로 구분된 한국인의 자의식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의 정도가 얼마나 현격한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현상이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기형적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병폐를 그대로 닮은 샴쌍둥이이다. 한국교회에 대한 비난과 성토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지금껏 이에 대한 문제의식과 해결 방식이 자못 교회 내부적 동력과 논의에서 그치고 말았다. 한국교회에 드러나는 문제들은 거의 대부분 한국 사회 전체에서 문제되는 구조들과 현상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 대표적이고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명성교회의 불법 세습 사태이다. 지금껏 불법으로 세습을 강행한 교회와 목사가 한둘이 아닌데, 유달리 명성교회 사태에 이리도 많은 사람이 공분을 보이는 것일까. 이 문제가 사회적 관심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명성교회가 세계에서 손꼽히게 큰 장로교회이고, 수많은 이권과 금권이 걸려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 이유는 명성교회의 불법 세습을 둘러싼 수많은 구조적 결탁, 법과 권위를 가장한 폭력과 욕망,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기생하는 수많은 조직 및 단체에 대한 재정적 지원과 위협 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번 명성교회의 불법 세습 사건은 한국교회 공공성의 현재 위치를 보여 준 사건이며, 그 위치와 수준은 무저갱과 같은 밑바닥임을 알 수 있다.

최근 명성교회의 불법 세습에 대해 성토하고 비판하는 목회자와 신학생, 그리고 평신도들의 서명과 성명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적 상황 속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부의 움직임은 그간 한국교회의 병폐로 인식되었던, 개교회중심주의나 기복신앙 또는 특정 목회자 우상화나 성장만능주의 등에 대한 반성과 반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명성교회 세습에 반대하는 운동은 한국교회 내부에서 공적 신앙과 공적 교회, 그리고 공공성에 대한 인식과 요청이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이요 계기라고 해석할 수 있다. 지금껏 공공신학이 영미권을 중심으로 하는 학계의 담론이었다면, 명성교회 불법 세습에 대한 반대 운동은 이러한 논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본문의 목적은 명성교회 세습 반대 운동이, 명성교회의 정상화를 넘어, 공공신학적 의의 아래 교회와 기독교 신앙의 공공성을 고취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할 것이며, 나아가 동일하게 공공성의 위기 및 세습과 같은 구조적인 불합리성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릴 수 있는 계기가 됨을 밝히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이론적 배경이 되는 공공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교회가 회복해야 할 공공성이 무엇이며, 특히 명성교회로 대표되는 대형 교회 목회 세습의 부조리와 불합리성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명성교회 세습 반대 운동이 한국 사회의 사회적 병폐에 어떠한 의미를 줄 수 있는지를 알아본 뒤, 대안적 제언으로 마칠 것이다.

2. 공공성 회복으로서의 명성교회 불법 세습 반대 운동

명성교회의 불법 세습이 가진 신학적·사회적·윤리적 문제와 그 파장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다시 한 번 언급할 이유가 없다. 이미 수많은 성명서와 기사를 통해, 이번 세습 과정의 부도덕성과 불합리성, 폭력성과 몰지각성 등이 자세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명성교회의 불법 세습 그 자체가 아니라, 이 불법적인 세습의 중차대한 문제를 바르게 인식하고 저항하는 운동과 그 의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더욱 건설적인 논의라 할 수 있다.

명성교회의 세습에 대한 야욕과 기획은 수년 전부터 감지되었다. 이는 비단 명성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불거졌던 대형교회의 잇단 세습 강행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배덕만의 분류에 따르면, 1990년대 충현교회를 시작으로 전국의 유명한 대형 교회들이 줄줄이 세습을 강행했고 2000년 이후에 무도하고 변칙적인 세습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1) 이에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은 2013년 제98회 총회에서 '세습방지법'을 제정했고, 예장통합 헌법 28조 6항에 '해당 교회에서 사임(사직) 또는 은퇴하는 위임(담임)목사의 배우자 및 직계비속과 그 직계비속의 배우자', '해당 교회 시무장로의 배우자 및 직계비속과 그 직계비속의 배우자'는 청빙할 수 없다고 적시했다. 이러한 법률 제정의 목적이 비단 명성교회의 세습을 막기 위한 것만은 아니나, 당시에도 명성교회의 세습에 대한 우려와 견제의 의도와 기능이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즉 명성교회 세습에 반대하는 운동은 이미 세습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이래로 계속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명성교회 세습 반대 운동은 이미 서울동남노회 내부의 갈등과 저항에서부터 가시화하기 시작했으며, 2017년 11월 12일 명성교회의 위임식 이후 급속도로 번지기 시작했다. 이후 반대 운동은 장로회신학대학교 동기 및 동문의 성명서를 중심으로, 목사회와 교수회, 타 신학교의 연대 성명 및 명성교회 청년 및 교사 일동의 성명서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규탄과 성토의 서명으로 이어졌다. 성명서의 주제와 내용은 일반적으로 명성교회의 세습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이며 악한 것인지에 대해 지적하고, 김삼환 목사와 김하나 목사의 공식적인 사과와 사퇴 및 총회의 공정한 판결을 촉구하고 있다.

명성교회 세습 반대 운동의 일차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은 물론 명성교회의 정상화이다. 즉 명성교회가 그동안 세습을 둘러싸고 몇 해에 걸쳐 벌인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변칙과 왜곡 및 암묵적인 강요와 몰지각한 강행을 겸허히 인정하고 이에 대한 회개의 열매로 김하나 목사가 사임하며, 이후 적법한 담임목사 청빙 기준과 절차를 갖추어 속히 성서의 정신 위에 바로 서는 교회가 되는 것이, 반대 운동에 참여하는 모든 이의 바람과 목표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를 이루는 방법이 여전히 신학생과 목회자들의 성명서와 기도회뿐이라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배덕만은 그동안의 대형 교회 세습 반대 운동이 성명서, 기도회, 포럼 및 세미나, 반대 시위 등을 통해 전개되었지만, 지난 20년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한탄한다. 때문에 그는 세습 반대 시위가 더 다른 차원의 전략과 방법론을 구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2)

따라서 명성교회 세습 반대 운동의 목표는 명성교회라는 구체적인 개혁 대상의 변화를 넘어, 더욱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주제와 가치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이것이 교회 내부의 분열 및 논의가 아닌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임을 밝혀야 하는데, 본문은 그것을 공공성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이후 더 자세히 논하겠지만,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는 모두 공공성의 상실과 위기를 경험했고 또 겪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진행 중인 전방위적인 재감사와 검찰 소환 등에 이토록 국민적 관심과 지지가 높은 것은, 지난 정권과 정부가 사적 이윤과 이해관계에 공적 기관 및 수단을 남용했기 때문이다. 즉 공공성의 회복은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 모두에게 절실한 시대적 과제이며, 이를 중심으로 교회 개혁 및 세습 반대 운동 등이 사회적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본문의 주제이다.

명성교회를 포함하여 지금까지 약 100여 차례의 대형 교회 세습 사건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대형 교회 세습은 근본적으로 교회를 사유화하여 교회의 공공성이라는 개념을 철저하게 파괴한다는 점이다. 물론 명성교회의 불법 세습 강행 이전에도 한국교회의 공공성은 위기를 말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사회적 신뢰도가 저조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기윤실이 2013년 조사한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는 19.4%로 5점 만점에 2.62점밖에 되지 않는 상당히 낮은 수치였다.3) 그러나 명성교회의 불법 세습이 주는 여파는 한국교회에 대한 국내의 낮은 신뢰도와 부정적인 인식을 확인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특별히 명성교회는 위치와 규모에서 단순한 개교회를 넘어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띠는 교회였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명성교회의 불법 세습은 대사회적 인식을 더욱 부정적으로 기울이고, 나아가 한국교회의 선교적 역량과 동력을 추락시킨 행위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명성교회 불법 세습 반대 운동이 가지는 의의는 단순히 명성교회라는 하나의 지역 교회가 불법적인 일을 자행했다는 사실에 대한 성토를 넘어, 이를 계기로 한국교회의 공공성을 회복하고 재구성해야 하는 시대적인 사명을 갖는다 할 수 있다. 이는 최근 신학적 화두인 공공신학의 학문적 담론에 대한 구체적인 과제이다. 물론 공공신학적 논의는 단순화할 수 없는 다양한 성격을 갖지만,4) 여기에서 학자 또는 학파의 입장에 따라 나뉘는 공공신학적 강조점들을 구분할 필요는 없다. 막스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이든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교회윤리5)이든,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공적인 성격을 담지하고 있으며, 신앙의 공공성이란 신앙과 신학의 정체성과 적절성의 균형과 조화에서 비롯되는 대화와 활동, 그리고 협력과 해석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즉 교회의 공공성이란 변하지 않는 성서적 정신과 가치에 대한 신앙과, 시대적이며 사회적으로 요청되는 사명과 과제를 끊임없이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본연의 속성을 갖는다. 그리고 새롭게 재구성된 교회의 공공성은 다양한 주체 및 행위자들에 의해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역동성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의사소통을 통해 교회의 공공성이 더 대사회적이며 보편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6)

정리하자면 명성교회의 불법 세습에 대한 반대 운동이 가지는 한국교회사적 의미는, 한국교회의 공공성을 회복하고 재고하는 것이다. 반대 운동의 단기 목표는 명성교회의 정상화이지만, 궁극적 목적은 교회의 공공성 재고를 통하여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의 공론장으로 편입되고, 이를 통해 대사회적인 대화와 협력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치 500년 전 종교개혁의 시작이 면죄부라는 지극히 신학적이고 부차적인, 그래서 어쩌면 지엽적인 병폐에 맞서 싸우던 것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발전해, 유럽 전체의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변혁을 이끌었던 것과 유사하다. 명성교회 불법 세습은 본래 교회와 교단에 국한된 문제이기는 하나, 이 문제에 대한 반대 운동의 저항과 투쟁이 보여 줄 과정과 그 결과에 따라, 이 시대의 교회가 사회적 공론의 장으로 확대되는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

3. 한국 사회의 구조 개선에 참여하는 명성교회 세습 반대 운동

한국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피케티는 21 세기의 경제적 불평등이 과거 프랑스 혁명기와 유사함을 지적하며, 전체 자산 가치를 국민소득으로 나눈 '피케티 계수'를 만들어 각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의 지표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는데, 여기에서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6 대차대조표'를 분석한 결과 한국의 불평등지수(자본/소득 비율)는 8.28배였는데, 이는 일본(6.01배), 프랑스(5.75배), 영국(5.22배) 등 주요 선진국보다 훨씬 높았고 특히 미국(4.10배), 독일(4.12배)보다는 두 배 가까이 높았다.7)

오늘날 한국 사회의 청년 세대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부정적 자의식과 절망적 미래 인식에는 바로 이러한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가 도대체 왜 이렇게 구조적으로 불평등하고 개선되지 않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나오는 것이 당연한데, 많은 사회학자는 그 해답을 공공성의 부재에서 찾고 있다. 대한민국의 공적 질서의 붕괴는 단순한 개개인의 성향이나 한국인의 집단적인 문화를 넘어, 광범위한 사회구조와 현상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다. 양극화로 인한 계급적 분화와 무한 경쟁 체제는 교육 및 생태 공공성을 위협하고 파괴했다. 재벌의 약탈적 유통업과 문어발식 확장은 말 그대로 상도덕도 지키지 않는 수준의 전횡을 더하고 있다.8) 사회가 전체적으로 그 공공성을 상실했으니, 한국사회는 이제 더 이상 개인에게 더 윤리적인 가치나 공적 규범 및 질서에 대해 강제할 수 있는 정당성을 잃어버렸다.

한국 사회에 있는 사회적 불평등과 구조적 폐단, 그리고 공공성의 상실 등의 위기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재벌의 세습'을 통해서 가장 잘 볼 수 있다. 국내 재벌들이 세습을 한 역사는 대형 교회보다 길고 그 내용도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국내 재벌의 세습에서 기업의 사회적 공공성은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다. 가장 유명한 사건 몇 가지만 언급한다고 하더라도, 삼성그룹의 비자금 특검 사건, 이건희 회장과 이맹희 고문 간의 유산상속과 관련된 송사, 현대그룹의 이른바 '왕자의 난'과 현대자동차그룹의 한전 부지 매입 및 정몽구 회장 부자父子의 현대글로비스 지분 매각 실패,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후계 구도를 놓고 치러지고 있는 일련의 인사 파동 사태, SK그룹 최태원 회장과 CJ그룹 이재현 회장의 분식 회계 및 비자금 관련 수감 생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박삼구 회장과 동생 박찬구 회장 간의 경영권 분쟁 소송,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 아들 간의 경영권 분쟁 소송,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 장녀(대한항공 전 부사장)에 의한 '땅콩 회항' 사건9) 등은 모두 경영권 세습을 강행하여 일어난 추문이다. 경제개혁연구소의 위평량 박사는 기업의 이익은 사유화하지만 기업의 손실은 사회화하고 있다며, 이러한 비극과 문제가 한국 재벌들의 지배 구조 리스크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다.10)

국내 정치는 부정선거와 군부독재, 그리고 지역 갈등 등의 다양한 고난과 아픔을 통해서, 공공성의 회복과 실현에 대한 민주적 제도와 절차를 발전시켜 왔다. 지난 촛불 혁명은 바로 이러한 공공성에 대한 민의의 폭발이었다. 헌법적 가치가 무시되고 국가권력 및 기관이 사사로이 운영되고 전횡을 일삼았던 것을 참다못한 시민의 목소리가,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운 정국으로 방향을 전환시켰다. 그러나 재벌이나 대형 교회 등을 포함한 한국의 지역 및 조직 문화에는 여전히 공공성을 말하기 부끄러운 상태와 수준을 보이고 있다. 대통령은 끌어내릴 수 있지만 재벌을 건드릴 수는 없다. 재벌의 영향력은 이미 초법적이 된 지 오래다.

국내 재벌의 세습과 대형 교회의 세습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욕망과 진행 과정, 그리고 문제점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세습이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욕망은, 조직의 안정과 미래에 대한 선견지명 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후진적이고 몰지각한 욕망의 차원인 '오직' 혈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세습을 방지하기 위해 제정된 온갖 법적이고 사회적인 제어장치를 피하기 위해, 온갖 변칙적이고 악의적인 불법을 자행하고 있다. 물론 세습 그 자체는 대단히 합법적인 모양새를 갖춘다. 어쨌든 재벌이든 대형 교회든 세습을 통해서 나타나는 결과는 동일하다. 사회적 불평등의 구조를 고착화하여 사회적 공공성의 수준을 격하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와 같은 비등한 예를 찾는 것은 한도 끝도 없는 작업이다.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 내에는 그 사회적 공공성을 상실한 수많은 불평등과 불합리, 그리고 불법의 카르텔이 공고하게 서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불법의 카르텔을 영속적이고 합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길은 세습뿐이다. 민주적 절차와 과정은 세습의 합법성을 위한 포장 과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명성교회의 불법적 세습은 한국교회가 가지는 공공성의 현재 수준과 상태를 보여 주는 현상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한국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퍼진 거대 권력의 생태계를 그대로 닮은 기형적 쌍둥이 구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명성교회 불법 세습에 대한 반대 운동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는 자못 의미심장하다 할 수 있다. 반대 운동의 일차적이고 구체적인 목표는 명성교회의 정상화이나, 궁극적이고 발전적인 목적은 한국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지배적인 불법 구조에 대하여 공공성을 고취하고 그 선례를 보이는 것이다. 임성빈은 교회가 시민사회를 협력자로 인식하고 이와 원활하게 소통하고 사회 문화 형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변한다.11) 이러한 주장이 공허한 외침으로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와 사회 공통의 근원적 문제의식과 구조를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인 영역에서의 개선과 그 성공적인 결과에 대한 경험의 공유가 절실하다. 본문은 바로 명성교회 불법 세습에 대한 반대 운동이, 바로 그러한 연결 지점이 되리라 기대한다. 즉 교회와 시민사회가, 세습으로 대표되는 공공성의 위기 및 상실의 상황을 극복하고 개선해 나가는데, 협력할 수 있으리라 소망한다. 더 이상 세습과 공공성 상실이라는 상황에 대해 성토하고 사법적 처벌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제는 시민사회와 더불어, 강력한 보이콧을 통해 이익은 사유화하고 책임은 사회화하는 지배 구조에 경종을 울리고 개혁을 추동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3. 나가는 말

명성교회의 불법적인 세습 강행을 보고 많은 그리스도인이 아파하고 울어야 했다. 아무리 진작에 예상되는 일이었다고는 하나, 그것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이 뜻깊은 해에 명성교회 사태와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많은 이에게 더욱 큰 충격이었다. 이는 여러 측면에서 500년 전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마틴 루터를 파문했던 당시의 교황 레오 10세 역시 일종의 세습 교황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회적 공공성을 완전히 상실한 교회의 부정하고 불의한 구조에서 교권을 세습한 교황이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명문가인 메디치 가문의 차남으로 13세에 추기경이 되었고, 37세에 벌써 교황에 올랐다. 당시의 로마가톨릭교회가 보여 준 성직매매, 친족 등용, 성직 겸직, 부재 성직, 축첩 등의 도덕적 파탄12)은, 명성교회로 대표되는 오늘날 대형 교회들의 세습과 목회자 재정 전횡 및 비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새로운 날의 태양이 떠오르는 새벽녘이 가장 어둡다는 말처럼, 명성교회의 세습 강행은 본의 아니게 교회의 공공성에 대한 요청에 불을 지폈다. 명성교회 세습에 대한 반대 운동이 확산되는 과정은 마치 새로운 종교개혁처럼 새로운 희망의 전조를 보여 준다. 그것은 여전히 순진하게도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고 믿으며 들풀처럼 다시 일어나는 신학생들이 있기 때문이며, 사회적 지위나 비난 및 논란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앞장서는 교계의 원로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신학교 교수들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현재 대한민국은 촛불혁명 이후, 그 어느 때보다 구조적 모순과 거대 질서에 대한 반감과 적폐 청산에 대한 요구가 높은 시대를 보내고 있다. 이는 교회의 문제와 시대적 과제가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보일 수 있는 가장 좋은 공론장의 주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향후 명성교회 세습에 대한 반대 운동이 더욱 적극적인 보이콧과 활발한 시민운동 및 학술적 교류를 통해 확대되고, 이를 통해 명성교회가 정상화하는 성공적인 사례로 자리매김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리하여 한국교회의 공공성이 확장되고, 한국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교회의 모범과 기여에 대한 요청이 높아지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이재용 / 목사, 독일 'Ruhr Universität Bochum'에서 수학 중

각주

1) 배덕만, "한국교회의 세습. 그 뒤틀린 역사," 『신학과 선교』 43(2013), 25-34.
2) Ebd. 98.
3) 기윤실, "2013 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기초 보고서", http://cemk.org/2008/bbs/board.php?bo_table=2007_data_cemk&wr_id=347.
4) 스미트(Dirk J. Smit)는 공공신학의 기원과 발전 과정에 대하여 ⓐ공개된 공적 영역에서의 신학, ⓑ공적 담론으로서의 신학, ⓒ신학과 공적 영역, ⓓ신학과 공적 투쟁, ⓔ글로벌 세계에서의 신학과 공공성, ⓕ신학과 종교의 공적 귀환이라는 여섯 가지 이야기로 요약한 바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문시영, "'위험 사회'의 공공신학적 성찰과 한국교회의 과제" 『장신논단』 47 (2015), 181-182 를 참조하라.
5) 스택하우스에게 신학은 본질상 공공신학이며, 변증적이며 사회윤리적인 성격을 갖는다. 즉 스택하우스의 입장에서 신학은 교회나 기독교인뿐 아니라 일반인과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는 보편적인 사회윤리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교회 자체가 하나의 사회윤리라는 입장이다. 즉 교회는 교회됨을 통하여 스스로 사회에 대안적 공동체로 작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단순하게 도식화하자면, 스택하우스가 현대사회에 대한 기독교의 적절성을 강조한다면,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정체성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김현수, "자유주의자 vs. 분파주의자. - 공공신학자 막스 스택하우스와 교회윤리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논쟁" 『한국 기독교 신학 논총』 80 (2012), 277–301 을 참조하라.
6) 홍성태, "공공성의 사회적 구성과 정치과정의 동학. - 공론장, 의사소통, 토의 정치" 『한국사회학회 사회학 대회 논문집』 (2012), 878.
7) 허지은, [피케티 지수로 본 가계 부채 대책] 세계 최고 수준 '불평등 사회' 바꿀 수 있을까. 대책 효과에 대해서는 '미지수', in: 이코노믹 리뷰, 28.10.2017
8) 조대엽, "공공성의 사회적 구성과 공공성 프레임의 역사적 유형" 『아세아연구』 56 (2013), 7–8.
9) 위평량, "재벌 총수 일가의 경영권 세습과 전문가 인식도 분석" 『기업 지배 구조 연구』 50 (2015), 80.
10) Ebd. 80-81.
11) 임성빈, "21세기 초반 한국교회의 과제에 대한 소고. - 공공신학적 관점에서" 『장신논단』 47 (2015), 202–203.
12) W. Walker, 송인설 옮김, 『기독교회사』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476-477.

참고 문헌

W. Walker, 송인설 옮김, 『기독교회사』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기윤실, "2013 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기초 보고서", http://cemk.org/2008/bbs/board.php?bo_table=2007_data_cemk&wr_id=347.
김현수, "자유주의자 vs. 분파주의자. - 공공신학자 막스 스택하우스와 교회윤리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논쟁" 『한국 기독교 신학 논총』 80 (2012), 277–301.
문시영, "'위험 사회'의 공공신학적 성찰과 한국교회의 과제" 『장신논단』 47 (2015), 177–199.
배덕만, "한국교회의 세습. 그 뒤틀린 역사," 『신학과 선교』 43(2013), 69–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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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엽; 홍성태, "공공성의 사회적 구성과 공공성 프레임의 역사적 유형" 『아세아연구』 56 (2013), 7–41.
홍성태, "공공성의 사회적 구성과 정치과정의 동학. - 공론장, 의사소통, 토의 정치" 『한국사회학회 사회학 대회 논문집』 (2012), 873–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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