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법률가회 국제국장 이병주 변호사가 '명성교회의 교회적 파탄과 평신도 신앙의 함정'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보내왔습니다. 세 차례 나눠서 싣습니다. - 편집자 주

만인제사장주의로 표현되는 평신도의 신앙적 주체성에 관한 종교개혁의 기본적 교리, 2017년 명성교회 세습 사태로 폭로된 한국교회 평신도 신앙의 수동성과 맹목성에 대한 고통스러운 각성, 가나안 성도 현상으로 표현되는 한국교회 평신도들의 신앙적 방황, 선교 운동 단체, 교회 개혁 운동 단체, 평신도 대중 단체로 이어지는 한국교회 평신도 단체들의 역사적 노력과 인적 자원의 축적, 이 모든 것이 합쳐지면, 종교개혁 501주년이 다시 시작되는 2018년부터 한국교회 경력직 평신도들이 주도하는 본격적인 평신도 운동을 전개할 수 있습니다. 충분한 시대적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됩니다. 이제 본격적인 평신도 운동의 전개를 위한 구슬이 서 말이나 있다는 점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그 구슬들을 꿰어서 한국교회의 보배를 만드는 일을 구체적으로 한 가지씩 시작하면 합니다. 직접 시작할 수 있는 네 가지의 집단적 노력을 구체적으로 제안합니다.

첫째, '2017년의 명성교회 위기'에 대한 실효적 대응으로 '2018년 이후의 본격적 평신도 운동'을 한국교회 개혁의 시대적 구호로 형성하는 평신도들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난 10여 년 가속화한 한국교회의 퇴락 과정에서 목회자들을 욕하는 것도, 교회들을 욕하는 것도 실질적인 효과를 내지 못했다는 점이 이번 명성교회 사태를 통하여 증명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욕하는 사람들이 본인들을 욕하는 것, 즉 목회자와 교회를 욕하는 평신도들 본인을 스스로 욕하고 고치는 것으로, 교회 개혁 운동의 시대적 구호를 바꾸어야 합니다.

2016년 말 2017년 초 한국 사회의 민주적 변혁을 가져온 시대적 구호였던 '탄핵'도 처음 시작이 될 때에는 그 모습도 막연하고 그 가능성도 막막한 '신기루' 같은 것이었지만, 막상 시대의 요청과 사람들의 각오가 만나게 되자 거대한 물결처럼 한국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2017년 말 2018년 초 한국교회의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한 '평신도 운동'도 처음에는 다소 막연하고 신기루처럼 보일지라도 시대의 흐름과 신자들의 각오가 함께 합쳐진다면 한국교회의 회복과 새로운 발전을 위한 거대한 물결을 만들어 낼 것으로 확신합니다.

둘째, 한국교회의 본격적인 평신도 운동은 '평신도들의 신앙적 회개 운동'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목회자라는 말이 신앙적 벼슬이 아닌 것처럼 평신도라는 말도 신앙적 벼슬이 아닙니다. 목회자들은 앞에 나서서 문제들이 드러나고 욕을 먹고 있다면, 평신도들은 강대 아래 잠잠히 있어서 욕을 먹고 있지 않을 뿐, 이들의 신앙은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신앙만큼 태만하거나 맹목적이거나 무지하거나 위선적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본격적 평신도 운동은 평신도들의 신앙을 당당하게 자랑하는 운동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평신도들의 신앙적 책임을 자각하고 그 신앙 실천의 방향을 돌리는 고백과 회개의 운동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한국 사회의 탄핵이 시민들의 권력자에 대한 탄핵이었던 것과는 달리, 한국교회의 평신도 운동은 교회나 목회자에 대한 탄핵이 아니라 '평신도들 자기 자신에 대한 탄핵'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셋째, 이 모든 평신도 운동의 내용과 방향은, 평신도들의 신앙 열심 중 30%를 전체 한국교회와 평신도 운동에 투자하는 '평신도 신앙의 30% '을 통해 가능합니다. 명성교회의 파탄으로 나타난 한국교회의 위기를 통해서, 개별 교회에 대한 '과잉'의 충성이 개별 교회에 독을 만들어 내고 한국교회를 망친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개별 교회에 대한 충성의 1/3 정도를 덜어 내서 한국교회 전체로 돌리는 것이 개별 교회에도 덕이 되고 한국교회에도 덕이 되며, 평신도들에게도 덕이 되고 목회자들에게도 덕이 됩니다.

평신도 개개인마다 신앙의 열심은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교회 평신도들이 모두 각자 자기가 가진 신앙 열심의 분량에서 1/3만큼씩을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교회 밖에서 자기의 주체적인 신앙으로 탐구하고 실천하는 일에 투여한다면, 한국교회의 본격적 평신도 운동이 그 실체를 형성하고 내용을 축적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넷째, '한국교회의 경력직 평신도들'이 이제 평신도 운동의 본격적인 주체로 나서야 합니다. 경력직 평신도들은 이제 교회 안에서의 맹종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고, 교회 밖에서의 방황이 하나님에 대한 무책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목회자들에게 신앙의 책임을 다 지우지 말고, 세상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경력직 평신도들이 신앙의 주인공으로서, 목회자들과 대등한 신앙적 책임감과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경력직 평신도들은 교회에서 목회자와 초심자 중간에 끼인 '신앙의 보조' 역할에 만족하지 말고, 사회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주도해 가는 '신앙의 주도자'로 거듭나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초심자 평신도들'에게는 여전히 교회의 양육과 지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초심자들 위주로만 하는 신앙 실천은 초심자 평신도들도 경력직 평신도들도 영원히 초심자 수준에 남아 있게 만드는 신앙의 도돌이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한국교회의 경력직 평신도들이 신앙의 주인공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평신도들에 대한 관점을 바꾸고 회개해야 합니다. 목회자들은 경력직 평신도들에 대해서 '교회의 일을 가르치려고만' 하지 말고, 경력직 평신도들에게서 '사회와 삶의 일을 함께 배우려는' 태도를 지녀야 하며, 새로 시작하는 한국교회의 평신도 운동을 '앞에서 지도하려고 하지 말고', '뒤에서 조용히 돕는 입장'으로 적극 협력해야 합니다.

교회 없이 우리 신앙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은 교회에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은 교회에서도 움직이고 세상에서도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내용을 교회에서도 배워야 하고 세상과 현실에서도 배워야 합니다. 교회에서 할 수 있는 일과 교회 밖에서 할 수 있는 일, 교회에서 배울 수 있는 것과 세상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정확히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개별 교회에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는 과도한 기대나 불필요한 실망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는 교회에서 할 믿음의 일을 충실하게 하고, 세상에서는 세상에서 해야 할 믿음의 일을 능동적으로 해 나가는 실질적인 방법과 전망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지금 한국교회를 괴롭히는 교회의 과잉과 세상의 결핍을 해소할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에는 목회자든 평신도든, 모든 기독교인이 교회에서나 세상에서나 신앙의 아마추어를 벗어나 장성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의 주체성을 가지는 일이 관건입니다.

2017년 말의 명성교회 사태는 한국교회의 명성을 치욕에 빠뜨리고, 한국교회를 위한 기독교인의 모든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교회들은 위기에 처하고, 목회자들은 오욕에 빠지고, 평신도들은 회의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실망하고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파탄의 위기는 회생의 반전을 부릅니다.

100여 년 전 해외 선교사들의 도래로 시작했던 한국교회의 '기'가 20세기 중·후반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노력으로 성장이라는 '승'을 이루었다면, 21세기 초반 한국교회 평신도들의 신앙적 회개와 각성과 방향 전환은 한국교회의 '전'을 이루어 내고, 종교개혁 500년의 피로감과 퇴행으로 인하여 21세기 기독교의 사회적 파산과 교회적 파탄에 직면하고 있는 세계 교회에 종교개혁의 창조적 계승과 새로운 전개라는 영광스러운 '결'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끝)

이병주 / 변호사, 기독법률가회 국제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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