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법률가회 국제국장 이병주 변호사가 '명성교회의 교회적 파탄과 평신도 신앙의 함정'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보내왔습니다. 세 차례 나눠서 싣습니다. - 편집자 주

개교회주의를 벗어날 주체는 누구?

한국교회 전체가 개교회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은 객관적인 현실입니다. 일개 교회에 불과한 명성교회가 교단의 노회, 총회를 넘어 교계를 무시하는 방자함으로 한국교회 전체를 욕보이기에 이른 이번 사건은 개교회주의가 단순히 한국교회의 '현상'을 넘어 한국교회가 빠진 '함정'이 되어 버린 것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기본 세포의 존재 없이는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듯이, '개별 교회의 존재'는 기독교 신앙의 유지와 활동에 기본적인 필수 요소입니다. 그러나 '개교회주의'는 '교인들 눈에 개별 교회만 보이고,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는 보편 교회(universal church)로서의 한국교회는 보이지 않는 것', '교인들의 마음과 몸이 개별 교회에만 충성을 하고, 공교회로서의 한국교회에는 충성도 하지 않고 충성을 할 필요도 알지 못하는 것', 천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듯이 개별 교회가 전체 교회의 영광을 가리우는, 개별 교회에 대한 집착과 우상적 숭배를 의미합니다.

이 개교회주의의 함정에는 한국교회 신자들,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모두 빠져 있습니다. 명성교회 사태로 가속화한 한국교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 목회자도, 평신도도 함께 개교회주의의 함정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현재 한국교회 시스템에서 한국교회 목회자는 대부분 이 개교회주의의 함정으로부터 '객관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회자의 '목회'와 '생존' 모두가 개별 교회의 성패에 그대로 연결되어 있는 객관적 상황 때문입니다. 명성교회 같은 큰 교회 목회자들이 개교회의 성공과 풍요에 취해 있다면, 목회자 수급 조절의 실패로 인한 교회 시장의 경쟁 과열과 과부하로 인하여 크지 않은 교회 목회자들은 목회의 지속과 생계의 공급 자체에 목말라하는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개교회의 양끝(강단 위와 강단 밑)을 목회자와 평신도가 차지하고 있다면, 객관적·존재론적으로 목회자들은 개교회주의의 구심력적 요소를, 평신도들은 개교회주의의 원심력적 요소를 담당하고 있는 셈입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목회자들은 대부분 개교회를 벗어나면 살기가 어렵지만, 평신도들은 대부분 개교회를 벗어나도 사는 데 지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명성교회 평신도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한국교회 평신도들, 명성교회 평신도들과 함께 명성교회 세습으로 나타나는 한국교회의 위기에 공범적 책임을 가진 한국교회 평신도들이 앞장서야 한다고 봅니다. 그동안 교회에 지나치게 충성해서 독을 만들어 내고 개별 교회에 대한 과잉 충성으로 전체 교회의 암세포를 키우는 데 기여해 온, 그러나 개교회주의에 대해서 '주관적으로는 묶여 있으나 객관적으로 구속되어 있지 않은' 한국교회 평신도들이 앞장서서 한국교회의 암적 요소인 개교회주의의 함정에서 우선적으로 벗어나는 길을 뚫어 내야 합니다. 이를 통해 개교회주의에 대해서 '주관적으로는 비판적이나 객관적으로 구속되어 있는' 목회자들도 개교회주의의 함정에서 따라 나올 수 있도록 돕는 길을 만들어 낼 것을 제안합니다.

개별 교회에서 '30%만큼 정 떼기' 운동

아이로니컬하게도 한국교회가 사회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본격적인 퇴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평양 대부흥 운동 100주년 기념 운동을 벌이던 2007년부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2017년까지의 10년간입니다. 제2의 한국교회 부흥을 기도하던 2007년의 기도들은 아무 응답도 없이 그냥 지나간 것 같았는데, 이제 돌이켜 보니 교회 부흥과 성장을 구하던 2007년의 기도들 자체가 잘못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한국의 개신교회에 1970년경부터 2000년경까지 한 세대 동안 300만 명에서 900만 명으로, 가까이 3배 정도의 엄청난 부흥과 성장을 '이미'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더 많은' 수적 성장과 부흥을 구하는 한국교회의 기도를 '회개 없는 욕망'에 불과한 것으로 받아들이신 것으로 보입니다["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잠 30:15)"].

개별 교회의 내용과 목회 운영에 실망해서 아예 교회를 떠난 평신도 교인을 '가나안 성도'라고 합니다. 그래도 개별 교회에 내용을 채우고 운영을 합리화해서 교인들이 다시 정을 붙이고 다닐 수 있게 하자는 취지의 교회 개혁 운동이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작은 교회 운동, 선교적 교회 운동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나안 성도 현상이 기성의 개별 교회 및 목회자와의 절연을 선언하는 평신도들의 방황이라면, 교회 개혁 운동은 교회를 수리해서 잘해 보자는 목회자들의 평신도들에 대한 구애입니다.

더 많은 한국교회 목회자와 평신도가 '개별 교회를 중심으로, 우리는 열심히 잘해 보자'고 선의로 노력했지만, 명성교회 세습 사태가 그런 개별 교회 중심 신앙의 허무한 결말과 신앙적 독성을 증명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오늘의 한국교회에서는 평신도들과 목회자들 사이에 애증의 긴장이 500년 전 유럽의 종교개혁 시대처럼 점점 폭발할 지경에 가까워져 간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평신도들의 목회자와 개별 교회에 대한 지나친 의존성과 맹목성이 그 한계 지점에 이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신도들의 목회자와 개별 교회 일반에 대한 실망과 불만과 부담이 증대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은 '진지하게 고민하면 신앙적으로 방황하게 되고,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신앙적으로 태만해지는' 양극단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의 방황은 답답하고, 더 이상의 태만은 무책임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평신도들이 개별 교회를 떠나 가나안 성도가 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는 않고, 그 반대로 모든 평신도가 현재에 있는 개별 교회를 고치고 바꾸어 또 비슷한 충성을 하는 것으로 개교회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난다는 보장은 없어 보입니다. 가나안 성도 현상에는 '교회' 자체가 아예 사라져 버리는 신앙의 무중력상태로 빠질 위험이 있고, 목회자 중심의 교회 개혁 운동에는 여전히 '개별 교회의 중력'이 강한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제안하는 방안은 '평신도들이 개별 교회에서 30% 정을 떼서',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한 '본격적인 평신도 운동'을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별 교회의 과잉으로 전체 교회가 암적 병증상을 보이고 있는 현실, 목회자들의 개별 교회에 대한 불가피한 집착과 평신도들의 개별 교회에 대한 맹목적 충성이 교회의 독을 만들어 내고 있는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과잉의 해소'와 '결핍의 보강'입니다. 개별 교회에 대한 충성과 노력의 30% 정도를 줄여서 이것을 개별 교회 바깥의 보편 교회, 전체 한국교회에 대한 노력과 충성으로 재배치하자는 제안입니다.

개별 교회에 70%의 신앙 열심을 남겨 놓자는 것은 교회의 기초 단위로서 개별 교회의 존재와 기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전체 교회로 30%의 열심을 돌리자는 것은 전체 교회의 고등 생물적 기능 없이 한국교회가 수만 개의 단세포동물 아메바처럼 퇴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이 제안은 성경적·논리적으로 타당합니다(엡 3:3-6). 우리가 매주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듯이, 우리는 개별 'OO교회'의 신자이기에 앞서 보편 교회(universal church)인 한국교회 신자로서 권리와 의무와 충성을 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개별 교회에 대한 충성을 1/3 정도 줄이면 개별 교회도 불필요한 비만과 객관적·주관적 과잉의 거품을 빼고 겸손함으로 건강해질 것이고, 우리가 전체 교회에 대한 충성을 1/3 정도 새롭게 만들어 내면 개별 교회에 모든 에너지와 힘을 뺏기고 고사枯死해 가던 전체 교회는 새로운 피를 얻고 숨을 쉬는 신진대사의 생명 활동을 재개할 수 있습니다.

본격적인 평신도 운동의 방법과 방향
– 평신도 신앙 열심 30% 방향 전환

개인적 차원의 평신도 운동 -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의 신앙적 씨름

평신도 운동이 땅에 단단히 붙어서 실질적인 생활력을 확보하고 허공에 뜨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한국교회 모든 평신도 개개인이 각자 '자기 신앙의 주인공'으로 다시 서는 '개인적인 평신도 운동'의 전개와 정착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현재 한국교회 평신도 모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 열심의 내용을 회개하고, 그 신앙적 열심의 내용을 모든 방면에서 1/3만큼씩 방향 전환 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평신도 운동의 기본적인 방향'은, 각자의 개인적 신앙생활에서 '과잉을 해소하고, 결여를 창출하는' 것입니다. 현재 명성교회 사태로 드러난 개인적 평신도 신앙의 문제점들은 △개별 교회의 과잉과 전체 교회적 조망의 부재 △교회 속 신앙의 과잉과 세상 속 신앙의 부재 △목회자 주체성의 과잉과 평신도 주체성의 부재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평신도 운동의 방향은 각 평신도 개인이 △개별 교회에 대한 충성의 1/3을 전체 교회에 대한 충성으로 △교회 속 신앙에만 갇혀 있던 신앙의 열심을 1/3만큼 세상 속의 신앙으로 △목회자만 바라보는 수동적 신앙의 1/3만큼을 자기 인생과 세상에 대한 능동적 신앙으로 돌리는 신앙적 방향 전환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 평신도 운동의 구체적인 전개'에서 새롭게 주목할 점은, 평신도 중에는 구체적으로 '초심자 평신도'와 '경력직 평신도'라는 두 가지 그룹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역사적으로 '초심자 평신도의 수적 양산'에는 성공했으나, '경력직 평신도의 질적 발전'에는 실패했습니다. 이것이 개별 교회의 양적 성장에 성공했던 한국교회가 이제 사회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질적인 파탄에 이르게 된 원인입니다. 이제 막 믿기 시작한 초심자 기독교인에게는 기본교리와 기본적 신앙생활을 가르치는 교회의 전도와 양육과 구제와 봉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초급 단계를 넘어선 경력직 평신도에게는 '어른스럽게' 신앙을 가지고 다시 세상과 인생의 현실에 나가서 우리가 배운 기독교 신앙을 '세상과 인생 속에 성육신(incarnation)'하려고 애쓰는 장성한 믿음의 씨름이 필요합니다(히브리서 5:14).

그러나 개교회주의의 한국교회는 경력직 평신도에게 믿음으로 세상에 나갈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교회에 남아서 초심자 전도, 양육과 교회 봉사에만 전념할 것을 요구하고, 이것을 '평신도의 좋은 신앙'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평신도를 깨워서 교회 일을 시키는 평신도 제자 훈련의 일반적 모델이고, 그 결과가 지금 한국교회에 충만한 '초심자 중심'의 어리고 유약한 신앙입니다. 한국교회에는 어린아이처럼 서로를 어르고 달래고 사랑해 주는 '위로하는 신앙'은 가득하지만, 욥처럼 허리띠를 묶고 하나님과 세상과 인생을 대면하는 장성한 어른의 '씨름하는 신앙'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욥 38:3).

이처럼 명성교회의 교회적 파탄으로 드러난 한국교회의 위기가 그동안 우리 교회에서 누구나가 추구해 온 '초심자 중심의 평신도 신앙'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면, 이제 명성교회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국교회의 평신도 운동은 '경력직 평신도 중심의 평신도 신앙'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경력직 평신도 중심의 평신도 신앙이 무엇인지 목회자들도 잘 모르고 평신도들도 잘 모르고 신학자들도 잘 모릅니다. 이것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넘긴 후 한국교회가 새로 만들어 내서 전 세계에 제시해야 하는 21세기 종교개혁의 발전된 신앙 내용이며, 세계 교회를 향한 한국교회의 적극적 사명이자 책임입니다.

집단적인 차원의 평신도 운동

'평신도의 신앙적 주체성'이라는 주제는 본래 루터가 종교개혁 당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독일 귀족에게 고함> 등 주 논문을 통해 만인제사장주의로 선언한 개신교의 기본 원칙입니다. 그러나 루터 당시의 시대적 제약과 정치적 한계 등으로 평신도의 만인제사장 역할은 일반 평신도가 아닌 제후 평신도로 제한됐습니다. 로마교회의 사제 특권을 배척하며 등장한 개신교회도 교회의 제도적 조직과 운영 과정에서 목회자 직책의 계층적 분리가 불가피해졌습니다. 종교개혁 500년이 지난 오늘 한국 개신교회에서 '평신도의 신앙적 주체성'이라는 말은 사실상 사문화하거나 형해화하고, 500년 전 로마교회의 교회중심주의와 사제주의가 오히려 개교회주의와 결합해 더 나쁜 모습으로 재현되는 형국입니다.

그럼에도 '평신도의 신앙적 주체성'과 만인제사장주의는 개신교회의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신앙적 원칙이므로, 그동안 한국교회에서도 수십 년간 평신도들의 신앙적 주체성을 반영하고 실현하기 위하여, 다양한 평신도 단체들의 노력이 전개되어 왔습니다. 역사적으로 흐름을 따라 그 목적과 활동을 중심으로 분류해 보면, 1970년대 이후 대학생 중심으로 시작했던 선교 운동 단체들, 1980년대 후반 이후에 나온 복음주의 교회 개혁 운동 단체들, 2000년대 이후 몇몇 직종에서 활발해진 직종별 평신도 대중 단체들입니다.

한국교회 부흥 기간(1970~2000년) 중 함께 활발했던 대학생 중심의 선교 운동 단체는 해외 선교사 배출에는 큰 성과를 냈으나 국내 한국교회 자체의 퇴락과 퇴행을 막는 데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대학생 선교 단체의 목적 및 프로그램이 국외에서 불신자를 전도하여 양육하는 '초심자 중심' 선교 활동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선교사로 결단한 일부 멤버를 제외한 다수 회원에 대해서는 선교사 후원 활동을 넘어서 '경력직 평신도로서의 주체적 신앙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본격적인 방향성과 실질적인 프로그램을 창출해 내지 못한 한계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 곳곳에 포진한 선교 단체 출신의 훈련된 평신도들은, 한국교회의 경력직 평신도들이 본격적으로 평신도 운동을 전개하는 데 아주 귀중한 인적 자원의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다음으로, 1987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창립된 이후 약 30년간 한국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교회 내 야당 역할을 해 왔던 복음주의 교회 개혁 운동 단체들이 있습니다. 이 단체들은, 한국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교회의 양심적 목소리로 참여했습니다. 한국교회의 퇴행과 타락을 비판하는 예언자적 역할도 담당해 왔으며, 직간접적으로 평신도 운동의 필요성을 선구적으로 주장하고 모색해 온 주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국교회 퇴락의 엄청난 가속도에 대한 교회 개혁 운동 단체들의 현실적 저지력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결과적 실효성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동안 교회 개혁 운동 단체들이 '교회 개혁'을 위하여 교회와 목회자들을 비판해 왔지만, 교회도 더 나빠지고 목회자들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교회 개혁 운동 단체들도 한국교회의 숨어 있는 주인공, 평신도들을 비판하고 평신도들이 바뀌도록 돕는 '평신도 개혁'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약 20년 전부터 시작되어 지금은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좋은교사운동, 한국누가회, 기독법률가회 등 직종별 평신도 대중 단체들이 있습니다. 이 단체들은 평신도 대중의 생활적 기반에 기초하고 있고 신앙의 사회적 맥락을 한 분야씩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력직 평신도 운동의 적극적인 기반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이 평신도 대중 단체들도 첫째는 개교회주의와 흡사하게 전체 한국교회에 대한 책임감에는 소극적인 채 개별 직종, 개별 단체의 활동에만 집중하는 타성에 빠질 위험이 있고, 둘째는 아직 교육·의료·법률 등 일부 직종에 국한되어 있어서 더 다양한 직종과 직군으로 평신도 대중 단체들을 양적·질적으로 확산할 필요성이 있습니다.(계속)

이병주 / 변호사, 기독법률가회 국제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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