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약한 이들 사이 예수 나셨네. 그 낮고 천한 곳 구유에 누웠네. 그를 맞이한 건 거룩한 자 아닌 동방의 이교도였다네. 가난한 이들 사이 예수 나셨네. 빈방조차 없어 마구간에 있네. 그를 맞이한 건 권세자가 아닌 천한 목동과 양들이네." - 노래 '예수 나셨네'(작사·작곡 이지음) 중 일부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가 탄생한 성탄절. 교회 예배당이 아닌 부당 해고 노동자들 곁에서도 성탄 예배가 열렸다. 10년 넘게 싸움을 지속하고 있는 KTX 해고 승무원들, 회사가 해외 자본에 팔린 뒤 하루아침에 공장이 폐쇄돼 쫓겨난 하이디스 노동자들을 위해 작은 성탄 예배가 열렸다.

서울역에서 성탄 성찬례
성공회 신자 등 250여 명 참석
"KTX 해고 승무원은 생명 지킴이"

서울역은 한국 철도 역사에서 상징적인 곳이다. 2004년 KTX 첫 운행도 당연히 서울역에서 출발했다. 서울역 3층, 시민이 오가는 이곳에서 'KTX 해고 승무원의 온전한 복직을 위한 성탄 연합 감사 성찬례'가 열렸다. 대한성공회에서 사회 선교를 주로 담당하는 나눔의집협의회, 정의평화사제단 등이 주관했다.

서울역 3층 상설 무대에서 'KTX 해고 승무원의 온전한 복직을 위한 성탄 연합 감사 성찬례'가 열렸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성탄 성찬례에는 250여 명이 참석했다.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와 사람들은 찬바닥에 깔개를 깔고 예배에 함께했다. 성찬례는 성공회 전통 전례대로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순서지에 나온,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를 번갈아 가며 읽었다. 순서지에는 KTX 해고 승무원들을 위한 기도도 있었다.

"12년입니다. 그 길고 긴 시간 정의로운 승리를 위해 포기하지 않고 싸운 사람들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성공하면 모두가 성공하고, 실패하면 우리만 실패할 것'이라고 말하는 KTX 해고 승무원들이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억울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작고 연약한 사람들의 편으로 오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시다. 지금도 빛나지만 온전한 복직으로 더욱 반짝거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빛날 사람들과 성탄을 맞이합니다."

송경용 신부(걷는교회)는 KTX 해고 승무원들은 자본주의사회에 저항하고 있는 이들이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설교를 맡은 송경용 신부(걷는교회)는 해고 승무원들이야말로 자본주의사회의 어두운 이면에 저항하고 있는 이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본주의사회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 흘리는 이들의 헌신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노동을 기계 부속품으로 취급한다. KTX 해고 승무원들은 이런 사회에 저항하는 분들"이라고 말했다. 송 신부는 "KTX 승무원들은 승객의 안전을 담당하고 생명을 살리는 생명 지킴이이다. 우리 모두의 안전을 위해 이들과 연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탄절이라서 그런지 지나가는 사람들도 관심을 보였다. 대부분의 열차가 출발하는 2층에서도 감사 성찬례에서 나오는 발언을 듣고 3층에 시선을 고정하는 사람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성탄절 기도회에 참여하기 위해 잠깐 발걸음을 멈춘 외국인도 있었다.

해고 승무원 3명이 분병위원으로 성찬례에 참여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KTX 해고 승무원 3명이 분잔위원으로 함께했다. 김승하 지부장은 "우리가 12년이라는 긴 시간 고통에 내몰렸지만, 우리를 지지해 주시는 여러분이 계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동안 우리가 맛본 고통·좌절·분노가 우리에게 또 다른 기쁨과 행복을 안겨 주는 날이 머지 않아 돌아올 것이라 생각한다. 12년 동안 함께 기도하고 지지해 주신 여러분이 있었기에, 앞으로 좋은 소식이 들려오지 않을까 기대된다. 그때까지 관심과 지지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성탄 연합 감사 성찬례 참석자 중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현장을 찾은 가족들이 눈에 띄었다. 용산나눔의집에서 신앙생활하는 필리핀 여성들도 왔다. 아밀 씨는 "다행히 공장이 휴일이라 올 수 있었다. 휴일이 아닌 사람이 많아 친구랑 둘만 왔다. 교회 안에서만 성탄 예배를 드렸었는데, 이렇게 밖으로 나와 해고 승무원들과 함께하는 것도 의미 있는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KTX 해고 승무원들도 성탄 연합 감사 성찬례에 참여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성탄절이 투쟁 1,000일
하이디스 부당 해고 노동자들
법원 승소에도 기약 없는 싸움

성탄절 당일에 투쟁 1,000일을 맞은 현장도 있다. 하이디스 부당 해고 노동자들은 현재 청와대로 가는 길목에서 노숙 투쟁을 하고 있다.

하이디스의 사연은 조금 복잡하다. 1989년 현대전자 LCD 사업부로 시작했는데, 2002년 중국 회사 BOE에 LCD 사업부만 분리·매각했다. 2006년 BOE가 하이디스 기술 자료 4,331건을 유출한 사실이 드러나 부도 처리된 뒤, 2007년 대만 회사 EINK(이잉크)가 하이디스를 사들였다. 대만 회사 이잉크는 매출이 증가하는데도 적자가 늘고 있다며 2015년 1월 이천 공장을 폐쇄하기로 결정했고, 4월에는 희망퇴직을 거부한 노동자 79명을 해고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는 청와대로 가는 길목에서 '하이디스 승리를 위한 성탄 기도회'를 열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그때부터 하이디스 노동자들의 투쟁이 시작됐다. 이들 또한 온갖 방법을 동원해 투쟁에 임했다. 광화문에서 2년간, 국회 앞에서 5개월간 노숙했다. 올해 6월, 수원지방법원은 하이디스의 정리 해고가 무효라며 노동자들 손을 들어 주었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잉크는 아무 반응이 없었고 노동자들과 대화조차 하려 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대만 한국 대표부 문을 두드려야 했다.

이들이 청와대 앞에 자리를 잡은 건 2년 전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의 약속 때문이다. 그는 2015년 4월 하이디스 노동자들과 만나 "당 차원에서 하이디스 문제에 관심을 두고 관련 상임위를 중심으로 문제 해결책을 찾겠다. 법적 문제를 면밀히 검토해 위법 사항을 짚어 내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서명이 들어간 서류도 남아 있다. 하이디스 노동자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청와대 가는 길목에서 노숙 투쟁을 시작하게 된 이유다.

부당 해고 노동자들의 이름이 적힌 초를 강단에 올렸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투쟁 1,000일째 되는 2017년 12월 25일 성탄절, 영등포산업선교회(진방주 총무)가 하이디스 승리를 위한 성탄 기도회를 열었다. 영등포산업선교회는 하이디스 해고 노동자들이 대만을 방문할 때 지원하고, 기자회견을 같이 여는 등 그동안 이들과 연대해 왔다.

기도회가 시작된 오후 5시, 해가 떨어져 체감온도는 계속 내려갔다. 추운 날씨에도 예상보다 많은 80여 명이 현장을 찾았다. 참가자들은 좁은 길 위에 세 명씩 길게 줄 지어 앉았다. "지금 예수님이 오신다면 어디로 가실까요?"라고 묻는 홍윤경 부장(영등포산업선교회 노동선교부) 말에 누군가 "여기요!"라고 답했다.

김종익 목사(염산교회)는 우리 각자가 성탄 나무가 되자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설교는 영등포산업선교회 비정규노동선교센터 이사를 겸임하고 있는 김종익 목사(염산교회)가 맡았다. 김종익 목사는 성탄의 참된 의미를 잘 생각해 보자고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면서 전하시는 메시지가 있다. '나랑 평화하고 서로 평화하자. 내가 이 아이를 내어 주는 것처럼 너희도 서로 내어 주면서 평화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익 목사는 성탄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새 희망을 품자고 했다. 김 목사는 "별을 보고 예수를 찾은 목자들은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수가 태어난 것을 보고 그곳에 희망이 있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스스로 희망이 되고자 했다. 우리 역시 한 사람 한 사람이 성탄 나무가 되어야 한다. 평화를 이루고 새 희망을 보자"고 말했다.

참석자들이 하이디스 해고 노동자들을 둘러싸고 기도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여러 사람의 농성장 방문에 노동자들이 힘을 얻는 건 사실이다. 김홍일 사무장(금속노조 경기지부 하이디스지회)은 "연말연시에 더 힘든데 이럴 때 힘이 된다. 종교 단체에서 심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다른 단체와 연결해 주는 등 여러 방법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기도회를 마친 뒤에는 밥차로 현장과 연대하는 '밥통'에서 준비한 식사를 나눴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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