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소개할 애니메이션은 2011년에 방영한 '마법 소녀 마도카☆마기카'(魔法少女まどか☆マギカ)입니다. 줄여서 '마마마'라고 부릅니다. 주위 여러 사람이 추천했는데, 일단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작화가 아니고, 40대 중년으로서 마법 소녀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이 선뜻 내키지 않아 감상을 미루었던 작품입니다. 하지만 감상해 보니 굉장히 공들인 작품이었고, 내용도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TV 시리즈로 12화, 그리고 극장판으로 3편이 나와 있고, 후속작이 나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극장판 1·2편은 TV 시리즈를 압축한 내용이고, 3편은 그 이후 이야기입니다.

'마법 소녀 마도카☆마기카'는 마법 소녀와 마녀들이 싸우는 이야기다. '마법 소녀 마도카☆마기카' 극장판 스틸컷

카나메 마도카는 중학교 2학년 평범한 학생입니다. 어느 날 마도카는 큐베라는 고양이 비슷하게 생긴 동물이 같은 반 전학생 아케미 호무라에게 공격당하는 모습을 보고, 친구인 미키 사야카와 함께 구해 줍니다. 그리고 위기에 처한 그들 앞에 마법 소녀 토모에 마미가 나타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호무라와 마미 모두 마법 소녀였으며, 큐베는 마법 소녀가 될 만한 소질이 있는 소녀들을 찾아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것을 대가로 계약을 맺는 일종의 스카우터였습니다. "나와 계약해서 마법 소녀가 되어 줘!"라는 유명한 대사를 남기지요.

마법 소녀들은 소원을 이루고 마법 소녀가 되는 대신 '마녀'와 계속 싸워야 하는 운명에 처합니다. 큐베는 마도카의 재능을 발견하고는 마도카에게 마법 소녀가 되라고 제안하지만 마도카는 선뜻 대답하지 못합니다. 마녀와의 전투가 반복되면서 마녀의 정체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마법 소녀 영혼이 담긴 '소울 젬'이 절망으로 오염되면 마녀로 타락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큐베는 그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 마법 소녀의 소울 젬이 마녀의 '그리프 시드'로 바뀌는 순간 발생하는 막대한 에너지를 회수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말합니다.

복잡한 스토리를 다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튼 마도카는 모든 마법 소녀는 결국 마녀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마법 소녀가 된다면, 끝내는 역사상 존재한 적 없는 강력한 마녀가 될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마도카는 호무라를 구하기 위해 큐베와 계약을 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소원을 외칩니다.

"나, 모든 마녀를 태어나기 전에 없애고 싶어. 우주 천지, 과거와 미래의 모든 마녀를 이 손으로… 신이든 뭐든 좋아. 오늘까지 마녀와 싸운 모두를, 희망을 믿은 마법 소녀를 울리고 싶지 않아. 마지막까지 미소 지었으면 해. 그걸 방해하는 룰은 파괴해 버리겠어, 바꿔 버리겠어. 이게 나의 소원, 나의 소망. 자, 이루어 줘, 인큐베이터!"

마법 소녀가 된 마도카는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마법 소녀의 절망의 순간에 나타나 그들의 소울 젬을 정화하고 소멸시킵니다. 모든 마법 소녀가 절망이 아닌 희망 속에서 눈을 감는 장면들은 정말 기억에 남는 뭉클한 장면입니다. 그러나 마도카 자신은 완전히 사라져 버립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태어난 적도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그녀는 마법 소녀가 마녀가 되는 것을 막는 하나의 우주적 개념 같은 존재가 됩니다.

솔직히 초반의 충격적인 몇 장면을 제외하고 중반이 지나도록 이 애니메이션이 왜 그렇게 명작이라는 말을 듣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결말부를 보면서, 제 개인적으로는 '공각기동대'(攻殻機動隊, 1995) 이후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마도카의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십자가 대속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큐베(위)와 아케미 호무라(아래). '마법 소녀 마도카☆마기카' 극장판 스틸컷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성서 이야기를 '창조 – 타락과 원죄 – 십자가 대속과 구원'이라는 구조로 설명합니다. 하느님은 선하게 세상을 창조했으나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죄를 지었으며, 그 후손인 모든 인류는 원죄를 물려받았고, 죄의 지배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죄 없는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대가를 치러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했다는 것이 기본 구조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늘 궁금했던 점이 있었는데, 기독교인이 아닌 유대인은 성서를 어떻게 해석할까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구속사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는 유대인은 '죄'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성서를 읽어 보면 알겠지만, 성서에는 '원죄'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죄와 죄를 사하는 것에 관한 문제는 주로 레위기에 나오는데, 레위기 역시 '원죄'를 다루지 않습니다. 거기서 말하는 죄는 종교적 '부정결'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악한 행위들입니다. 부정결은 제사 의식을 통해 정결하게 만들 수 있고, 악한 행위들은 율법에 따라 벌을 준다고 적혀 있습니다. '원죄' 개념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배철현 교수가 쓴 <신의 위대한 질문>(21세기북스)에는 성서를 기록한 고대인이 생각했던 죄 개념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는 하느님께서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4장 7절의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의 히브리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타 팀슬 보(atta timshol bo)' 이 문장을 영어로 직역하면 'As for you, you may rule over it'이며, 한글로 번역하면 '다른 사람이 아닌 네 자신이 그것(네 욕망)을 다스릴지도 모른다'입니다." (77쪽)

등장인물 중 한 명인 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팀쉘, '너는 지배할지도 모른다'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우리에게 길이 열려 있다고 말합니다. 이 단어는 바로 우리 인간에게 돌아옵니다. '너는 ~ 할지도 모른다'라는 단어는 인간을 위대하게 해서 신들과 같은 수준으로 만듭니다. 왜냐하면 그의 약함과 더러움 그리고 그의 동생을 살해하는 데 있어서 그는 선택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고 그것을 위해 투쟁해 승리할 수 있습니다." (79쪽)

유대교의 죄 개념에 대해 로버트 프라이스(Robert M. Price, 1954~)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흥미롭게도 유대교는 원죄를 믿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하나님이 모든 개인 안에 두 라이벌 경향을 주셨다고 믿는다. 이것은 마치 만화에서 어떤 사람이 윤리적 갈등에 빠졌을 때, 한쪽 어깨에는 작은 악마가, 다른 한쪽에는 작은 천사가 앉아서 그 사람을 유혹하는 장면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늘 열려 있는 선택이다. 그 결과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그가 죄를 선택했을 때, 유대교는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실 것을 믿을 수 있다. 그게 전부이다(물론 동물 희생 제사가 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제의적 부정함'을 제거하기 위한 '종교적인 소독'의 일종이며, 우리가 다음에 말하려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로버트 프라이스, <Blaming Jesus for Jehovah>(Tellectual Press)]

다시 말해, 유대인은 인간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으며 설령 죄를 선택하더라도 종교적·법적 절차에 따라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원죄와 대속 개념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인류는 아담과 하와의 행위로 유죄 선고를 받고 태어난다고 하는 원죄론은 어떤 과정을 통해 생겨났을까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경험한 처음 제자들은 예수 죽음의 의미를 생각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로마의 범죄자처럼 처형당했지만 제자들은 예수가 죄인이라는 사실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만일 예수가 죄 없이 죽었고, 그의 죽음이 인간의 역사에서 흔히 일어나는 의미 없는 죽음이 아니라면 그는 누구의 죄를 위해 죽은 것이었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 죽음의 의미를 유대교의 전통적 이야기에서 찾았습니다.

유월절 어린양, 욤 키푸르(대속죄일)의 속죄양, 그리고 제2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받는 종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전 15:3) 그러나 유월절, 욤 키푸르, 고난받는 종은 모두 원죄와 관계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죄'는, 위에서 보았듯이 이미 적절한 의식을 통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무언가 더 깊은 문제, 근본적 질병, 윤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생각해 냈습니다.

처음에 바울은 그것을 창세기 타락 이야기에서 찾았으며(로마서 5장), 바울의 생각을 이어받은 4세기 교부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는 이것을 '원죄'라고 불렀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가 성행위를 통해 모든 인류에게 유전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5장 12절을 라틴어로 읽는 바람에 그 뜻을 오해했던 것입니다. 유명한 일화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와 관련한 자신의 주장을 로마서 5장 12절의 한 전치사구에 기반하고 있는데, '그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in whom all sinned)라는 바울의 말은 아담으로 인해 모든 인류에게 죽음이 닥치게 되었다는 의미라고 그는 주장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오독하고 오역한 이 구절을 다른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in that all sinned 또는 because all sinned)라고 읽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줄기차게 자신의 잘못된 해석을 고집했는데, 그의 해석이 자신의 경험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레인 페이걸스, <아담, 이브, 뱀>(아우라)]

그리고 인간의 행위를 통제하고 싶어 했던 로마제국, 고통과 악의 원인에 대한 외부 원인을 찾고 싶었던 기독교 대중에 의해 원죄 교리는 다른 경쟁적 설명을 제치고 기독교 중심 교리가 되었습니다.

정리하면 '원죄' 교리는 예수의 죽음을 설명하기 위한 바울의 창조 이야기에 대한 해석(유대인 전통과 다른)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성에 대한 부정적 관념, 창조 이야기의 문자적 해석, 고대인의 비과학적 세계관(그들은 에덴동산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믿었고, 죄가 생물학적으로 유전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등이 어우러져서 생겨난 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대속은 이 원죄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대속론 자체도 그리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진보 신학자는 '원죄-대속'으로 이어지는 구조 자체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전통적 대속론 자체에도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대표적 대속론을 세 가지만 들면, 배상설·만족설·도덕감화설입니다.

배상설은 죄의 영향으로 악마의 지배 아래에서 살아가는 인간들 몸값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지불했다는 설명입니다. 대표적으로 초대 교부 이레나에우스(Irenaeus, 130~202)와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가 이 이론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이 이론에 따르면, 하느님은 악마를 다스리지 못하는 전능하지 않은 신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하셨으니 악마를 살짝 속인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대안적 설명으로 나온 것이 11세기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가 주장한 만족설입니다. 만족설을 이해하려면, 중세 봉건제도의 명예 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에는 봉건영주의 명예와 가난한 소작농의 명예의 크기가 다르다고 믿었습니다. 똑같이 모욕을 당해도 영주가 받은 명예훼손은 소작농이 당한 명예훼손과 큰 차이가 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인간의 죄로 명예에 큰 손상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하느님이 당한 그 명예를 회복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느님 스스로 인간이 되었고 벌을 받아 하느님을 만족하게 했다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안셀무스 생각처럼, 인간의 행위가 하느님을 상처 입히는 것이 가능할까요. 미국 정치가이자 법률가 로버트 잉거솔(Robert Green Ingersoll, 1833~1899)은 "나는 내 형제나 이웃에 대해 죄를 지을 수 있다. 나는 그들을 상처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상해(손해)를 입힐 수 없다면 죄도 지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유한한 존재는 무한한 죄를 지을 수 없다"(<Blaming Jesus for Jehovah>)라고 말합니다.

배상설과 만족설에는 또 다른 커다란 문제가 있습니다. 둘 다 하느님이 배상, 또는 만족을 위해 아들을 죽게 만드는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분으로 그려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중세를 대표하는 신학자 중 한 명인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élard, 1079~1144)는 도덕감화설을 주장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희생은 인류를 사랑하신 하느님의 자비와 긍휼의 표현이며, 따라서 사람들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도덕적 감화를 받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 2004) 같은 영화의 피투성이 예수를 보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기는 (개인적으로) 매우 어려웠습니다. 평화롭게 사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사람을 보여 주며 "하느님 사랑의 상징"이라고 말하는 모습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마법 소녀 마도카☆마기카'를 통해 십자가 사건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이미 누가 한 생각이겠지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법 소녀들은 자신을 위한 소원을 빌고 마법 소녀가 됩니다. 그러나 희망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한 명씩 절망하며 마녀가 되어 버립니다. 호무라 역시 마도카를 구하기 위해 끝없는 시간을 반복하지만 서서히 절망하게 됩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마도카는 그런 마법 소녀들에게 찾아오는 절망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끝없이 계속되는 악의 고리를 끊기 위한 소원을 빕니다. 그 결과, 모든 마법 소녀는 구원받지만 마도카는 사라집니다. 일종의 대속적 죽음을 맞이한 셈입니다.

주인공 카나메 마도카. '마법 소녀 마도카☆마기카' 극장판 스틸컷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도 마도카의 희생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의 죽음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 '이기적 유전자'를 넘어서는 인간의 자기 초월 의지의 발현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숨결, 하느님의 형상은 우리가 죄를 선택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생존 욕구를 넘어서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원죄와 대속을 생각하면서 신학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습니다. 원죄나 대속의 교리는 모두 성서와 교회의 전통, 인간의 다양한 역사 경험을 거쳐 만들어지고 발전해 왔습니다. 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십자가 사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여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달라지게 만듭니다.

기독교가 위기라고 말합니다. 교회의 위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신학의 위기입니다. 급격한 과학의 발전과 새로운 가치관의 도전, 갈수록 양극화하는 경제 상황에서 기독교 신앙은 어떤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신학은 어떻게 성서와 전통을 재해석하며 또다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줄까요. 그 대답 중 하나는 죄와 대속에 대한 새로운 해석일지 모릅니다.

죄와 용서라는 개인적 차원에 머무는 대속 신앙이 아니라, 분노한 신을 달래기 위해 피의 인신 제사를 지내야 하는 폭력적 대속론이 아니라, 인간성 상실 시대에 새로운 인간성의 발현을 보여 준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해 봅니다.

참사람의 길, 참하느님의 길이 하나라는 것을 보여 준 예수는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우주적 그리스도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은 예수 안에 있던, 신성과 인성이 하나 되는 새로운 인간성이 내 안에서도 움트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 희생과 '마법 소녀 마도카☆마기카' 이야기는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죄의 고리를 끊기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 질문에 그리스도인은 삶으로 대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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