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탁!" 하는 죽비 소리와 함께 일렬로 길을 걷던 이들이 나란히 절을 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전날 눈이 내린 까닭에 바닥 곳곳에는 녹다 만 얼음이 널부러져 있었다. 언 땅에 온몸을 깔았다가 일어나는 KTX 해고 승무원들의 표정은 비장했다. 올해에만 벌써 두 번째. 영하 3도의 날씨, 바람까지 더해져 체감온도는 더욱 내려갔지만 오체투지 참가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12월 19일 서울역에서 'KTX 해고 승무원 문제 해결을 위한 종교인 오체투지'가 출발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KTX 해고 승무원의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종교인 오체투지가 12월 19일 서울역에서 출발했다. KTX 해고 승무원 4명과 개신교·불교·가톨릭·노동계 대표 등 16명이 참석했다. 개신교에서는 대한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민김종훈 신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국 박영락 목사가 해고 승무원들과 함께 오체투지에 임했다.

오후 1시 30분, 서울역 광장에 오체투지 참가자들이 모였다. 철도노조, 전국금속노조, 종교인, 타 직장에서 해고된 노동자 등 그동안 KTX 해고 승무원들과 연대한 이들이었다.

김승하 지부장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체투지에 참여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김승하 지부장(KTX열차승무지부)은 오체투지 시작 전 "그 오랜 시간 우리가 외쳐 왔던 게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오체투지에 참여한 많은 사람의 마음 하나하나가 모여 KTX의 안전을 담당하는 승무원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더불어 우리나라의 뒤틀리고 비상식적인 것들을 모두 바로잡는 시금석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체투지는 다섯 발자국 걷고 그 자리에 서서 절을 하는 것이다. 절을 하면서 몸 전체를 땅바닥에 댄다. 일어나서 다시 다섯 걸음을 걷고 절한다. 서울역 광장에서 시작된 오체투지는 숭례문 앞, 시청 앞,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을 지나 청와대 앞까지 이어졌다. 약 3.8km 구간을 통과하며 참가자들의 표정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서울역에서 숭례문으로 넘어가는 길에는 횡당보도가 없다. 오체투지에 참여한 이들은 차들이 달리는 도로 한쪽에서 오체투지를 계속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KTX 해고 승무원 동료들은 피켓을 들고 옆자리를 지켰다. 'KTX 비싼 운임에 안전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돈 때문에 승객 안전 내팽개친 철도공사'등이 적혀 있었다. 2015년 개정된 철도안전법은 열차 승무원의 안전 업무를 의무화하고 있지만, 코레일은 아직까지도 승무원의 역할에 안전 업무를 넣지 않고 있다.

일반 시민들은 KTX 승무원이 안전 업무를 담당한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해고 승무원들이 한쪽에서 오체투지할 때 한쪽에서는 시민들을 향해 피켓을 든 것도 이를 알리기 위해서다. 한 해고 승무원은 "이명박근혜 정부 10년 동안 싸웠는데 새 정부 들어서고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세상이 쉽게 변하는 건 아니겠지만, 승무원의 역할과 코레일의 비정규직 문제는 여전하고 우리가 아직도 싸우고 있다는 것만 시민들이 기억해 주면 좋겠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전날 내린 눈 때문에 길에는 눈과 얼음이 쌓여 있었다. 절하고 일어난 민김종훈 신부의 머리와 몸 곳곳에 눈이 뭍어 났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해고 승무원들은 끝이 안 보이는, 기약 없는 싸움을 이어 가고 있다. 벌써 4,312일. 대학 졸업과 동시에 '지상의 스튜어디스'를 꿈꾸며 KTX 열차 승무원으로 취업했던 이들은 어느새 30대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됐다. 2년 반 일하고 12년을 싸우는 중이다.

법원의 이해할 수 없는 판결 앞에 사회적 약자인 해고 승무원들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2008년 1·2심에서 승소한 해고 승무원들은 4년간 고용을 인정받아 밀린 임금 8,640만 원을 받았다. 하지만 2015년 대법원은 돌연 한국철도공사의 손을 들어 줬다. 기나긴 소송 끝에 남은 건 임금으로 받은 8,640만 원과 그에 붙은 이자를 토해 내는 것이다.

해고 승무원 4명이 오체투지에 참여하는 동안, 다른 동료들은 시민들을 향해 피켓을 들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KTX 해고 승무원들의 기대감은 높아졌다. 승무원들이 바라는 건 큰 게 아니다. 한국철도공사가 잘못을 인정하고 해고 승무원들을 완전 복직해 주는 일과 승무원들의 비정규직 채용을 청산하는 것이다. 출범부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천명한 문재인 정부에 건 기대는 그만큼 컸다. 게다가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KTX 승무원 문제를 전향적으로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한국철도공사 사장 자리는 여전히 공석이다. 현재 신임 사장 공모 절차가 진행 중이다. 누가 새로운 사장으로 오든 KTX 해고 승무원들은 이 긴 싸움을 끝내고 싶다. 한 겨울에 오체투지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쓰는 건, 어떻게든 문제를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오체투지 행렬을 관심 있게 지켜 보는 시민도 있었고, 시선조차 두지 않고 지나치는 이도 있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연대'가 가장 큰 힘이다. 또 다른 해고 승무원은 "우리가 그동안 법과 정치에도 기대 봤지만 결국 연대하는 사람들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판결이 번복되면서 천국과 지옥을 오간 KTX 해고 승무원들. 두려움 보다는 막막함이 있지만, 연대하는 이들과 함께여서 싸움을 지속할 수 있다.

연대를 기다리는 KTX 해고 승무원과 함께 하고 싶은 이들은 서울역을 찾으면 된다. 12월 20일 저녁 7시 30분, 'KTX 해고 승무원의 온전한 복직을 위한 거리 기도회'가 서울역 3층에서 열린다. 성탄절 당일 오전 11시에는 서울역 광장에서 KTX 해고 승무원과 함께하는 성탄절 감사 성찬례가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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