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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십자가와 나의 십자가
[서평] 박철수 <두 개의 십자가>(대장간)
  • 신광은 (calebkshin@daum.net)
  • 승인 2017.12.17 16:05

"저는 500주년 종교개혁을 앞두고 교회의 교인들에게 바른 복음을 전도하고 싶었습니다."

박철수 목사가 이번에 출간한 <두 개의 십자가>(대장간) 프롤로그에서 밝힌 저술 목적이다. 저자가 밝힌 대로 본서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종교개혁 정신을 새롭게 이해해, 식어 버린 종교개혁의 동력을 제고하려는 의도로 집필한 것이다. 그 의도 때문에 이 책은 구원론이라는 조직신학 주제에 천착했다. 500년 전, 마틴 루터와 여러 종교개혁가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종교개혁가들의 주된 신학적 관심은 구원론이었다. 이것은 종교개혁가들의 가장 큰 신학적 공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약성경을 보면, 특히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와 같은 바울서신들은 구원론적 주제로 충만해 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교회 역사에서 구원론은 정당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 구원론은 대부분 도외시되거나 기껏해야 부차적인 주제에 머물렀다.

예컨대 2세기, 신학이 서서히 태동하던 시기에 가장 먼저 조명받았던 신학 주제는 '기독론'이었다. 그 뒤를 '삼위일체론'이었다. 중세에는 교회론과 성례전론, 보편논쟁 같은 철학 주제가 많은 관심을 받았다. 물론 5세기 펠라기우스 논쟁과 11세기 안셀름의 속죄론 덕분에 잠깐 구원론이 신학 주제로 떠오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중심 주제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16세기 루터의 칭의론은 구원론을 신학 중심 주제로 전면에 내세웠다. 더불어 신약성경의 구원론적 언어들이 재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구원의 문제가 신구약 전체를 통틀어 무엇보다 중요한 주제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이때 구성된 구원론의 기초 위에 지난 개신교회 500년이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개의 십자가>는 이 신학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래서 구원론이 이 책 중심 주제다.

<두 개의 십자가> / 박철수 지음 / 대장간 펴냄 / 224쪽 / 1만 원

구원론이 이 책 중심 주제라는 사실은 목차만 대충 살펴봐도 금세 알 수 있다. 1장, '죄'라는 주제부터 시작해, '율법',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를 거쳐 마지막 장인 5장 '나의 십자가'로 끝난다. 이것은 정확히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가들이 천착했던 신학 주제들이며,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전개했던 복음의 내용이기도 하다. 복음, 이 가슴 설레는 말이 바로 본서의 주제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서가 종교개혁 500주년에 출판된 것은 퍽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본서는 중요한 문제를 풀어야 했다. 영원히 가슴 뛰게 하는 '복음' 그리고 '구원론'이라는 신학 주제는 어찌 보면 식상한 주제다. 간단히 살핀 목차만 해도 시선을 끌 만한 섹시한 단어는 보이지 않는다. 500년 동안 수많은 개신교 신학자가 나름의 방식과 언어로 구성해 온 구원론이라는 주제와 지금도 주일이면 수많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 설교와 별반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모르기는 해도,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이 문제에 대해 적지 않은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본서의 차별성과 독특성을 읽어 내는 것이 읽는 맛이기도 하다. 저자는 복음 설교가 넘치는 시대에 '바른 복음'을 전도하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다고 했다. 본서가 기존의 복음 설교와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의도를 내비친 것이다. 저자는 지속적으로 기존의 구원론, 복음 설교와 거리 두기를 시도하고 있다.

왜 '두 개의 십자가'인가

나는 주저 없이 본서의 가장 큰 특징 하나로 신학 언어의 참신성을 들고 싶다. 현대 개신교회의 가장 큰 곤경 중 하나는 신학적·신앙적 언어가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신학적·신앙적 언어가 진부하고 지나치게 종교적이고 관습적이어서 듣는 이에게 별 감흥과 상상력을 제공하지 못한다.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비아)에서 새롭고 참신한 언어로 기독교 신앙을 다시 말하고자 시도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저자 역시 본서에서 그 작업을 하고 있다.

본서는 언어·표현·문제가 생동감 있다. 이 책 1장의 첫 번째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생각해 보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것만큼 신기한 사실이 또 있을까요?"(23쪽) 구원론을 열면서, 저자는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내가 여기 있다'는 이 엄연하고 지당한 사실로부터 복음 설교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확실히 저자의 글은 '실존론적'이다. 에덴동산이나 선악과, 불순종, 죄…. 이런 주제는 별로 새로운 주제가 아니다. 본서는 다소 진부하고 식상한 주제들을 교의적이기보다는 실존론적으로 다룬다. 그래서인지 저자의 언어는 피부에 생생하게 접촉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저자의 실존론적 언어는 '죄'와 함께 '죽음' 문제를 심도 있고 예리하게 분석하는 대목에서도 빛을 발한다. 독자를 죄와 함께 죽음 앞에 세우면서 실존적 불안을 건드린다. 구원의 필요성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현대인을 흔들어 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저자의 논지에서 독자는 구원이 죽어서 천당이라는 낙원으로 가는 것이라기보다 무엇보다도 죽음 문제를 해결받는 놀라운 약속임을 각인받는다.

본서의 더 큰 차별성은 책 제목에서 읽을 수 있다. 책 제목은 <두 개의 십자가>다. '두 개의 십자가'라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지신 십자가 말고 무슨 십자가가 또 있다는 말인가. 목차를 따라 읽다 보면 두 개의 십자가가 품은 의미를 금세 알 수 있다. 하나는 3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십자가'이고, 다른 하나는 5장에 나오는 '나의 십자가'이다. 이 책 주제는 한마디로 "십자가는 두 개라야 한다"는 것이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붙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이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올지 모르겠다. 확실히 기존의 구원론과 복음 설교는 '예수님의 십자가'만 과도하게 강조하고 '나의 십자가'는 제대로 강조하지 못했다. 두 개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5)

결국 이 책은 두 개의 십자가에 대한 강조의 균형이 무너진 기존 상황을 한탄하고 균형추를 되돌려 놓으려는 의도로 썼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십자가'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만을 생각하고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바로 이어 말씀하십니다." (168쪽)

물론 저자가 두 개의 십자가를 균형 있게 강조하면서 구원의 효력이 두 십자가에서 똑같이 발생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구원의 효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발생한다. 그러나 저자는 자기 십자가도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나의 십자가는 질 수도 있고, 지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성도라면 누구나 져야 할 십자가"라고 못 박는다. 저자가 생각하는 바른 복음이란, 믿음만 강조하고 실천은 강조하지 않는 싸구려 복음이 아니다. 믿음과 실천의 균형이 잡힌 구원론에 기초한 복음이다.

은총과 행위의 조화

이러한 저자의 관심은 4장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4장 주제는 '용서'다. 용서라는 주제가 3장 '예수님의 십자가' 뒤에 위치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 죄가 용서받는다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구원론의 중추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용서' 장에서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납하시는 사랑을 극단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용서는 무조건적이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를 인용해 무조건적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초로 발견하신 유일무이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용서가 무조건적이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끈다. 니켈마인즈 아미시(Amish) 마을에서 있었던 총기 난사 사건은 이런 점에서 이중적으로 충격이다. 하나는 그들이 자신들의 자식을 쏴죽이고 스스로 자살한 총기 난사범의 가족들을 찾아가 위로하며 조문하고 용서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용서가 충격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미시의 용서가 우리 용서의 표본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점이 충격적이다.

저자는 '용서'라는 주제에서도 다시금 균형점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존의 구원론과 복음 설교가 과도하게 하나님의 용서만 강조하고 우리의 용서를 약화해서 전달한다는 문제 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와 우리의 용서는 불가분 관계에 있다. 하나님의 용서만큼 우리의 용서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주기도의 내용이다. 아미시 사람들은, 자신들의 용서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를 묵상하는 것으로 가능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러한 저자의 문제의식은 전통적 속죄론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는 지점으로 이어진다. 전통적 개신교 구원론에서 속죄론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속죄론 중에서는 대속설 교리가 압도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일부 극단적인 경우, 대속설만 정통이고 다른 속죄론은 이단인 양 치부한다.

대속설이란, 간단히 요약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죗값, 곧 형벌을 받으시는 것으로 우리 죄를 속하신다는 교리다. 대속 개념은 구약의 제사 규례에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또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고 말한 이사야 53장에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속죄 원리다. 대속설은 분명 중요한 속죄론이며, 구원론에서 중요한 내용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사실은 대속설이 속죄론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구스타프 아울렌이 잘 지적했듯이 속죄론은 매우 다양해서 크게 보더라도 최소한 3가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승리설이라는 극적 속죄론이다. 여기에는 총괄갱신설과 속전설 같은 것이 있다. 다른 하나는 객관적 속죄론인데, 안셀름의 만족설이나 아우구스티누스의 형벌대속설 등이 속한다. 다른 하나는 주관적 속죄론이다. 여기에는 피터 아벨라르드의 모범설 등이 속한다. 다양한 속죄론 중에서 기존의 구원론은 과도하게 대속설, 즉 속죄의 객관적 차원만 강조한 측면이 있다.

대속설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계도 만만치 않다. 오늘날 개신교인에게 익숙한 대속설은 만족설과 형벌대속설을 융합해 만든 속죄론이다. 이 교리의 문제점은 속죄 과정의 객관적 차원이 너무 두드러진다는 데 있다. 즉 속죄의 전 과정은 죄인과 무관하게 성부와 성자께서 기획하시고, 전체 과정을 주도하신다. 최종적으로 '속죄'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무상으로 하사하신다. 이 이유로 '은총의 교리'와 대속설은 조화가 잘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죄인의 참여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자칫 '면죄부'처럼 오해의 소지가 있다.

저자는 대속설의 이러한 문제를 누구보다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다. 해서 5장에서 '형벌만족설'을 비판하는 것이다. 죄인의 참여와 실천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데서 오는 대속설의 한계를 짚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다른 주제와 마찬가지로 이 점에서도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비록 그가 대속설에 대해 비판의 칼을 들지만 본서 여러 곳에서 대속설에 기대어 구원론을 서술하고 복음을 해설한다. 대속설을 의존하면서 비판하는 저자의 논리 전개가 언뜻 모순처럼 보일지 모르나, 이는 균형점을 찾고자 하는 신학적 노력의 일환이다.

나아가 저자는 속죄론에서 과도하게 대속설에 의지하기보다 조금 더 다양한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3장에서 제임스 던을 인용하며, 구원은 다이아몬드와 같은 다면체라고 강조한다. 광대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한 측면으로만 해석하기에는 너무 크다. 한정된 인간의 언어로 서술되는 구원론, 특히 속죄론은 스스로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그래서 저자는 최소한 7가지 관점에서 구원을 바라볼 수 있다고 제안한다. 저자의 다중속죄론적 관점은 본서를 차별화하는 또 다른 요인이다.

저자가 다중속죄론을 주장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객관적 속죄론과 주관적 속죄론을 서로 만나게 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속죄는 죄인과 상관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렇기에 속죄는 은총이고 선물이다. 이것이 객관적 속죄론의 대요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사랑은 죄인들에게 감화와 감복을 일으켜 그리스도를 뒤따르도록 도전한다. 이것이 주관적 속죄론의 요지다. 저자는 객관적 속죄론과 주관적 속죄론을 '두 개의 십자가'라는 개념으로 묶어 조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역시 은총과 행위의 조화라는 신학적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이상의 간략한 설명을 통해 금세 알 수 있는 것은 저자가 '바른 복음'을 믿음과 행위, 은총과 순종의 균형이라고 생각하는 점이다. 저자는 그동안 은총과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해 실천과 순종이 도외시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자신의 책 전체에 스며들게 하고 있다. 특히 5장 말미에 제시해 놓은 9가지 윤리적 주제는 주제만으로 참신하며 잔잔한 충격파를 던진다. 이 9가지가 한결같이 전통 교회가 침묵해 온 공공 영역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생태계, 노동, 소비, 미국, 기술, 여자와 남자, 통일, 지성의 문제는 기존 교회에서 구원론과 관련해서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는 주제들이다. 저자는 이러한 공공 이슈들을 적극 거론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구원론의 맥락에서, 곧 복음 설교의 내용에 포함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의 의도는 더욱 분명해진다. 복음과 윤리는 분리되지 않으며, 이 윤리는 개인윤리(소윤리)뿐 아니라 공공 윤리(대윤리)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은 신자의 생각과 삶을 변화시켜, 개인 삶의 영역뿐 아니라 공공 영역에서도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다. 분명 이러한 저자의 도전과 주장은 종교개혁 500주년에 한국교회에서 마땅히 울려 퍼져야 할 바른 복음의 내용이 아닐까 싶다.

글을 마치기 전에 아쉬운 점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균형점 회복이라는 저자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독자들은 저자의 속죄론 관점에서 어쩌면 약간의 혼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때는 다중속죄론을 제안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어느 대목에서는 대속설에 상당히 기대어 논리를 전개하고, 말미에는 갑작스럽게 대속설을 비판하는 것처럼 논리적 일관성이 어긋나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노파심이 든다.

또 하나는, 본서가 비록 기존의 개신교 구원론을 새롭고 참신한 방식으로 재기술하는 측면은 있으나 동시에 개신교 구원론 전통에서 문제를 보고 해결하려 한다는 점에서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필자는 '칭의론이 위태롭다''천국과 지옥의 실종'"구원-'론'(logy)의 종말" 등의 졸고에서 개신교회 신학, 특히 개신교 구원론 몇 가지 딜레마를 지적한 바 있다. 이 지적들 외에 개신교 구원론이 당면한 도전은 매우 크고 복잡하다. 적은 분량이라는 한계를 간과할 수는 없을 테지만, 본서는 지나치게 전통 개신교 구원론 패러다임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종교개혁 500주년이 며칠 남지 않은 이 시점에,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일독하기를 권하고 싶다.

신광은 / 대전 열음터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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