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처참한 자신의 존재를 마주하며 결국 죽음밖에 답이 없음을 깨닫는다. 그 순간에 그는 '아무 의미'가 없는 스스로의 존재 앞에서 비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그는 죽기 직전에 한 번만 더 만나고픈 여자에게 찾아간다. 그에게 그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가운데 한줄기 빛 같은 존재이며, 무언가의 '의미'를 가진 그런 신성한 존재였다. 그는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르는 만남을 향해, 그녀에게 정처 없이 달려간다. 그리고 자기가 저지른 끔찍한 죄들을 고백한다. 자기가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를 낱낱이 고백하는 그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몇 초간의 침묵 뒤, 그녀는 그에게 말한다. "왜 그렇게 스스로를 힘들게 했나요?" 그리고 비참하게 우는 그를 향해 다가가 포근하게 끌어안아 준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경멸스러운 죄를 저지른 그를 스스럼없이 받아주고 위로해 주었다. 예상대로라면 그를 혐오하고 비난을 해 주던가, 슬금슬금 도망가 버렸어야 할 그녀였어야 하는데, 그녀는 그에게 예상치 못한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그 위로가 그에게는 '의미 없는'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준 사건일 수 밖에 없었다. 그 사건은 그에게 자기 삶의 자유를 위해 지탱하고 있었던 모든 합리화들이 스스로를 얼마나 거짓되게 만들었는지, 무의미하게 만들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합리화로 인하여 그는 결국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죽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 밖이었던 그녀의 위로는 그가 우상시했던 그 합리화들을 직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정죄하지 않고 받아 주었다. 그녀는 많이 가진 사람도 아니었고, 권력이나 학벌이 높은 사람도 아니었다. 가난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몸을 파는 신세였다. 외부적으로만 보면 초라한 신분의 그녀가 가진 내적인 힘은 바로 삶을 해석하는 태도였다. 비참할 수 있는 삶의 환경들에 억눌린 가운데에서도 밝게 웃는 그녀를 처음 보며, 그는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 이후로 그는 그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그녀라면 자기의 끔찍한 죄들을 고백해도 될 것 같았다.

그녀 앞에서 벌거벗은 존재가 된 그는, 비난 대신 위로를 받았다. 존재가 부정당하지 않고, 받아지게 된 사건 가운데 그는 무의미를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의 자발적인 의지가 아니라, 거저 받은 위로인 수동적인 사건 앞에서 그는 무의미의 세계관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 앞에서 그는 새로운 의미의 세계관에 참여하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두 주인공 이야기를 다시 펼쳐 보았다. 개인적으로 나의 사랑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장면이다.

한 존재가 더이상 존재함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없어서 생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의 고통을 상상해 본다. 그 고통은 나의 개인적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는 불완전한 이해일 수밖에 없지만, 스러져 가는 그 순간의 고통 앞에서 홀로 외로이 버텨 내는 그장면을 떠올리니, 존재의 비참함에 버거워졌다.

존재함이란, nothing 혹은 non-being이라는 '존재 없음'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비참함이다. 인간은 존재하기 위해서 비참함을 견뎌 내야 하는 것이다. 존재함과 존재 없음의 수동적 위치인 '사이'에서 인간은 몸부림칠 수밖에 없다.

존재함의 반대말은 가능성 없음이다. 존재하지 않는 현재 그 자체에 대한 가능성 없음이 아니다. 아직 있지 않은 존재의 미래적 가능성 때문에 '존재 없음'은 발생한다. 가능성 없음은 희망 없음과 동의어이다. 즉, 존재 없음이란 존재에 대한 희망이 없음인 것이다. 희망 없는 존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원래부터 그랬던 게 아니라, 존재 없음이라는 의미가 생성되면서 발생한다. 존재함 가운데에 끊임없이 밀려오는 존재 없음 때문에, 존재는 결국 존재하지 않음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존재하지 않음은 의미의 죽음이고, 희망의 죽음이다. 존재하지 않음의 상태는 현실적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존재의 가능성에 대한 죽음인 것이다.

아퀴나스는 육체와 영혼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인간을 hylomorphic being이라고 정의했다. 복합체인 인간은 현실태라는 완전한 형태를 가질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존재이다. 인간은 한계와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복합체라는 의미이다. 이 한계 때문에 인간은 존재 없음으로 향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이 한계성 때문에 인간은 가능태라는 것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아퀴나스의 복합체 인간론은 존재론적 설명으로 귀결된다. 인간의 한계성 자체가 인간에게 개별적 고유성(individuality)을 주고, 이 개별적 고유성은 인간 개개인을 다양하고 특별하게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하지만 이 개별적 고유성은 인간에게 한계를 주며 존재 없음으로 향하게도 만든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존재 없음 때문에 인간 개개인들은 고유의 방식으로 존재함으로 향하게 할 가능성도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복합체인 인간이 한계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함으로 향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아퀴나스의 Creation이론을 통해서 마련된다. Creation 이론은 인간의 능동적 가능성과 수동적 가능성을 종합하는 학문적 기반이되며 존재함을 향한 기초 토대가 된다.

Creation이란, 순수 현실태 그 자체인 신으로부터 비롯된 out of nothing라는 의미를 생산해 내는 구조이다. 아퀴나스는 인간이 Creation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을 유추(analogy)라고 설명하는데, 불완전한 인간은 완전한 신을 절대로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유추의 방식을 통해 신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신을 지성으로 이해하는 아퀴나스의 관점은, 신은 이해하는 것(know)과 의지하는 것(will)을 통해 스스로 드러냄을 보여 준다. 그리고 존재의 원인 되는 신의 지성을 본받아, 인간 역시 이해하고 의지하는 존재의 가능성이라는 의미 생산을 할 수 있다는 유추가 가능해진다. 지성이신 신은 결국 피조물들에게 이해되는 방식으로 스스로 존재함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유추는 수동적 이성으로부터 가능하다고 보았는데, 수동적이라는 의미는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을 지성으로 이해하는 아퀴나스의 관점은 인간에게 '능동적 이성'과 '수동적 이성'의 만남이라는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

즉, 존재에게 아무것도 아님이 아니라 혹은 무존재가 아니라, 존재함을 가져다주는 것이 신이 우리를 창조함의 의미라는 것이다. 아퀴나스의 창조론은 인간 내부가 아닌 순수 현실태인 신으로부터만 존재함의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아퀴나스의 인간론과 창조 이론은 단순히 지성적인 '봄'으로써 존재의 의미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에 '참여'함으로써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존재 없음은 존재함이라는 신으로부터 주어진 의미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해야만 방향을 전환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인식 단계처럼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변혁적인 전환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 없음에게 존재함이란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변화이다.

아퀴나스의 창조 이론이 존재 없음으로부터 존재하도록 구원한다는 기반이라면, 아퀴나스의 신을 인식함이란, 존재 없음에게 존재의 가능성이라는 의미를 생성하게끔 돕는 지성적 기반이 된다. 신이 존재 없음을 존재하게 만들어 주고자 하는 '의지적 사랑' 때문에 인간은 가능성으로 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신으로부터 흘러넘친 사랑으로 인해 존재 없음은 존재함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고, 그 의미는 단순한 인식적 차원이 아닌 삶의 참여로 획기적으로 전환될 때 비로소 존재론적 가능성이 마련된다. 사랑이란 인간에 대한 가능성을 의미하게 만들고, 인간에 대한 희망을 향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퀴나스의 이론은 존재함과 이성에 대한 존재론적 가능성을 사랑으로 연결하는 통찰을 제공해 주었다. 비이성적인 사랑이나 그저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다. 신이 의미를 부여해 주는 지적인 사랑을 통해서 존재함의 의미는 존재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아퀴나스의 인식론적 통찰이 더 새로운 이유는, 인간의 몸과 물질성을 한계이자 가능성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현실적 물질성을 무시하는 관념론적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고, 존재론적 가능성을 수동적 이성인 '사랑'을 통해서 유물론의 경계 확장 가능성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물론, 아퀴나스가 현대적 의미의 유물론이나 관념론과 같은 맥락으로 대안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퀴나스의 영혼과 육체를 모두 가진 인간론(hylomorphic being)은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에게 '변증법적 존재함의 가능성'을 함의한다.

다시 소설 <죄와 벌>의 두 주인공으로 돌아가 존재와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대단할 것 없어 보이는 그들의 '사랑'은 왜 비참함으로부터 찬란함으로의 삶의 변화를 가져왔을까. 연약한 한계일 수밖에 없는 인간들 가운데에, 서로를 향할 수 있도록 오는 신으로부터의 사랑은, 비참함 가운데에 있는 수많은 존재 없음들에게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사랑'은 하나의 이론도 아니고, 일시적인 감정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존재 없음으로부터 존재함으로 다가가기 위한 '사랑'은 비참한 우리에게 살라고 주는 가능성이고 희망이다.

존재하게 만드는 사랑을 향하여, 존재를 살리는 사랑을 향하여, 오늘 나는 그 사랑에 삶을 온전히 참여하고 있는가 스스로를 돌아본다.

*이 글은 웹진 <제3시대>에도 실렸습니다.
웹진 <제3시대> 바로 가기: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

강선구 / 현재 '목회적 삶'과 '목회자의 삶'의 경계에서 고민 중에 있으며, 친구들에게는 네 살 선구라 불리우고 있다. 미국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종교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목사수련생 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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