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겟 백커스>(학산문화사)입니다. 저는 만화책으로만 읽었는데요, TV판 애니메이션도 방영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작화도 뛰어나고 주인공들을 비롯한 조연들 중에도 매력적인 캐릭터가 많습니다. 사실 예전에 읽을 때는 별로 의식하지 못했는데, 여성을 묘사하는 장면들을 지금 다시 보니 굉장히 선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남성 독자 취향 만화 같지만, 두 주인공인 미도 반과 아마노 긴지 사이에 브로맨스(bromance) 분위기도 있어서 의외로 팬층이 다양하다고 합니다.

<겟 백커스>의 두 주인공 미도 반(위)과 아마노 긴지(아래). 유튜브 영상 갈무리

일본 신주쿠 뒷골목에서 빼앗긴 물건을 되찾아 주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두 주인공(미도 반, 아마노 긴지)은 '겟백커스'(Get Backers)라는 팀을 만들어 영업합니다. 미도 반은 스네이크 바이트라는 초인적인 손아귀 힘과 눈을 마주친 상대에게 1분간 환각을 보여 주는 사안이라는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아마노 긴지는 무한성 출신으로 뇌제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강력한 전기를 사용하는 초능력자입니다. 하지만 둘 다 경제관념이 별로 없고, 운이 지지리도 없어서 매번 고생만 합니다. 두 주인공 외에 레이디 포이즌 히미코, 현의 카즈키, 7인의 미로쿠,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악당 닥터 자칼(아카바네 쿠로우도)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초반에는 소소한 물건을 되찾으며 일어나는 감동적인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서서히 스토리의 배경이자 주 무대가 되는 '무한성'의 비밀을 밝혀 나가게 됩니다. 뒤로 갈수록 이야기가 복잡해지면서 뭔가 해결이 깔끔하지 않다는 평을 듣는데, 그래도 저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중 '무한성'과 관련한 메인 스토리가 아닌 초반(5권)에 나오는 한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습니다(이 뒤에는 해당 에피소드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세요). 어느 날 도난당한 고가의 미술품을 되찾아 달라며 거액의 사례를 제안하는 의뢰가 겟백커스에 들어옵니다. 알고 보니 이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13번째 '해바라기'였습니다. 실제로 고흐는 생전에 12개의 해바라기만 그렸다고 합니다. 존재할 리 없는 작품이 등장한 것입니다.

13번째 해바라기 그림을 괴도 '클레이맨'과 운반대인 레이디 포이즌 히미코가 훔쳐 갔고, 겟백커스는 그림을 찾기 위해 나섭니다. 결론적으로 그림은 위조품이었습니다. 붓놀림이나 채색, 표현 기법 등 모든 게 고흐 작품과 완벽히 동일했는데, 물감이나 캔버스가 최근 것이었습니다. 클레이맨은 반과 긴지에게 이 그림이 고흐가 그린 진품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알고 보니 클레이맨의 어머니는 유명한 영매로,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서 빙의하는 강신술사였습니다. 죽은 고흐의 영혼에 빙의해 13번째 해바라기를 그렸던 것입니다. 고흐의 영혼이 클레이맨 어머니 몸을 빌려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겟 백커스>에는 닥터 자칼이라는 별명을 가진 악당 아카바네 쿠로우도 등 특색 있는 조연이 많다. 유튜브 영상 갈무리

황당한 이야기지요? 저는 이런 식의 영혼이나 귀신 개념을 믿지 않습니다. 사실 성서를 읽어 봐도,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이승을 돌아다니다가 인간 육신에 들락날락하는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위 이야기를 죽은 사람 영혼이 아닌 '신령한 영감' 또는 '하느님의 영', '성령'에 관한 것으로 바꿔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저는 이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하느님의 영이 우리에게 역사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령은 어떻게 우리 삶에 현존할까요.

성서를 보면 고대 사람들은 하느님이 사람과 함께 거하시고 직접 대화하셨다고 믿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나타나 말씀하셨고, 천사와 신비한 현상, 직접적인 음성으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출애굽 사건 이후 하느님은 임재의 상징으로 구름 기둥과 불기둥,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종교적 상징 법궤를 사용하셨습니다. 법궤를 보관한 이동식 성전인 성막으로는 언제나 약속의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다윗 왕조 두 번째 왕 솔로몬은 성전을 세웁니다. 법궤를 그곳에 고정해 두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은 오직 성전에서만 만날 수 있는 분이 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느님은 성전에만 있다고 믿었을 때, 하느님은 자신의 영에 강하게 사로잡힌 사람들, 선지자들을 통해 자신의 뜻을 선포하셨습니다. 어느 순간 예언자들의 전통도 끊어집니다.

구약성서의 가장 독특한 문서 중 하나인 에스더서를 보면, 또 다른 방식의 하느님의 역사가 나옵니다. 에스더서에는 단 한 번도 하느님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칼뱅은 에스더서를 주제로 한 번도 설교한 적이 없으며, 루터는 에스더서를 외경 정도로 취급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역사도, 예언자의 전통도 끊어진 시대에 에스더서는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 의를 위해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사람을 통해 지금도 하느님은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신약시대에도 역시 하느님은 성전에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안티오코스 4세가 더럽힌 성전을 마카비 혁명으로 회복한 것을 기념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누카(Hanukkah)라는 절기를 지킵니다. 하느님의 빛이 성전에 회복된 것을 기념하는 의미라고 합니다. 성전이 파괴된 이후의 유대인들은 율법주의를 강화합니다. 이제 하느님은 율법을 통해 그들과 함께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그 성전이 아닌 자신의 몸이 하느님이 내주하는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변화산에서 빛나는 모습으로 변모한 사건은 이에 대한 상징입니다.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파괴 이후, 바울과 복음서를 기록한 공동체들은 모두 무너진 성전이 아닌 예수가 하느님의 영이 임한 곳이라고 믿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 하느님의 영이 임했다고 말합니다. 마가는 예수가 세례를 받던 때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다고 말합니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가 하느님의 영으로 잉태했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요한은 예수가 태초부터 하느님과 함께 있었으며 그 말씀(빛)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온 분이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에게 임했던 그 영, 예수가 약속한 영이 모든 믿는 사람에게 임했다고 말합니다.

조금 길게 설명했는데,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느님의 영을 가둘 수 있을까요. 이곳에는 있지만 저곳에는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태초에 그 혼돈의 수면을 품었던 영에게 한계나 경계가 있을까요. 끊임없이 사람들의 생각과 한계를 넘어 활동했던 하느님의 영이 오늘 교회 안에만 머문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 영을 특정 개인이나 장소, 특정 종교, 특정 교파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을까요. 저는 지금도 그 영이 현존하고 있으며,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면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에서 발견할 수 있고, 만물은 모두 그 영 안에 거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바울은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행 17:28)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 1942~)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비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세계에 개입하시는 게 아니라 '현존'하시며, 만물을 통해, '상호 작용'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 이러한 이해 방식은 하느님을 세계와 분리된 존재로 이해하는 방식보다 훨씬 정통적이다. 신학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의 근간을 이루는 목소리들은 '하느님'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실재가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하느님 이해 방식을 19세기 초에 등장한 용어로 '범재신론'(panentheism)이라고 한다. 이 말의 헬라어 어원을 풀이하면 '만물이 하느님 안에 있다'라는 뜻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이라는 말에 담긴 정통적인 의미, 그리고 진정한 의미다."

그러나 현대의 기독교는 또다시 하느님을 가두어 놓았습니다. 하느님은 오직 기독교에서만, 우리 교파에서 말하는 신학과 예배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서"를 외쳤을 때, 그것은 성서를 신앙의 출발점으로 삼자는 이야기였지, 성서가 모든 것의 답이며 그 안에서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많은 교회는 '특별 계시'라는 이름으로 정경 66권 안에 하느님과 그 영을 가두어 놓는 것 같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이 성전과 법궤, 율법 안에 가두어 놓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하느님의 영을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고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서와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문학과 예술, 모든 삶의 영역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칼럼을 쓰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짧은 애니메이션 한 편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영과 그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의 경험과 지식, 신앙 속에 갇혀 있는 성령이 아니라, 만물 안에 존재하고 만물을 품으시는 성령을 만나는 사람들의 삶에는 더 풍성한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겟 백커스>에서 한 예술가의 영혼이 시공간을 초월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던 것처럼, 하느님의 영은 오늘도 수많은 사람의 삶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런 성령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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