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 대한 바른 안내서가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한국교회에서 기도란 성경적이라기보다는 무속적이라고 생각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김요한 목사의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은 무척 반가웠다. 건전한 신앙관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가 쓴 <지렁이의 기도>(새물결플러스)는 기도에 관한 우리의 잘못된 관점을 교정해 줄 치료제인가.

기대감으로 받아들고 단숨에 읽은 이 책은 아쉽게도 치료제가 되기에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 이 책에는 치명적이고 위험한 독소가 있었다. 이는 기도에 관한 이론을 성경의 가르침에 세우기보다 자신의 경험에 크게 의존하여 세웠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성경에서 발견한 가르침보다 실제 경험 이야기를 들을 때 더 열광하고 환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기도에 관한 가장 정확한 가르침은 오직 성경뿐(sola scriptura)이다. 성경 외 다른 어떤 계시나 권위적인 주장을 덧붙이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지렁이의 기도 -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실한 여정> / 김요한 지음 / 새물결플러스 펴냄 / 358쪽 / 1만 5,000원

<지렁이의 기도>에는 성경적 교훈에서 비롯한 것도 많다. 예를 들면 "기도 응답의 비결은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성실함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우시고 신실하신 성품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86쪽) 같은 표현들이다. 그뿐 아니라 단순히 개인 욕망을 위해서가 아닌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정신에 따라서 기도해야 한다든가,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든가, 지성을 다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든가, 사회정의와 국가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든가, 총 25개 주제 대부분은 건전한 성경적 주해에 바탕을 둔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준다. 하지만 아래 몇 가지 점은 동의하기 어렵다.

첫째, 김요한 목사는 자신이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고 주장한다. 김요한 목사는 이 책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직통 계시를 받아서 J 집사의 태어날 아기가 딸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또 그 다음에 낳게 될 아기는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한다(97~99쪽). 또한 자신을 찾아온 이 집사에게 남편이 아플 것이며 관악산 주변으로 집을 옮기라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했다고도 한다(114~115쪽). 이외에 김요한 목사는 자신이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따라 사람들의 앞날을 예언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예언이 진실하다는 근거를 몇 가지 언급한다. △참된 예언은 어떤 사건에 대해서 예언은 하지만 구체적인 시기나 장소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반면, 거짓 예언은 구체적인 시간이나 장소까지 예언한다. △참된 예언은 복수의 은사자에게 알려 주시지만, 거짓 예언은 그렇지 않다. 특히 방언 통변자들을 통해 복수로 검증되어야만 참된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160~161쪽).

그의 주장과는 달리 이 근거들은 성경으로 지지되지 않고, 더 나아가 김요한 목사 본인이 했던 예언도 이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김요한 목사는 이번에 태어날 아기가 딸이고 다음번의 아기는 아들이라고 구체적인 예언을 했지 않은가. 서쪽으로 가면 횡재할 것이고, 물을 피해야 한다는 등 대개 토정비결 수준의 예언들이야말로 구체적이지 않고 두루뭉술한 것이다. 대체로 빗나가는 예언들은 구체적으로 예언했기 때문에 빗나가는 것이지만, 두루뭉술하게 예언하면 대부분 자신들 상황에 맞춰 좋게 해석할 수 있으며 다 맞아떨어지는 법이다.

성경에서는 참선지자 미가야 한 사람과 거짓 선지자 다수가 예언을 놓고 대결을 벌이기도 한다. 다수의 선지자가 모두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예언했지만, 그 예언은 거짓이었다(왕상 22:1-35). 예언의 진위는 다수결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안타깝게도 김요한 목사는 기도하는 삶을 통해 성령께서 자신에게 예언해 주시는 것을 듣는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많은 것을 맞췄고, 때로는 치유의 결과가 나타나기도 했고, 그대로 적중한 예들을 언급하면서 기도의 삶에 이러한 예언의 은사가 자동적으로 따를 수 있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는 점이 참 아쉽다. 이런 식으로 무엇인가를 적중하여 맞추는 일은 불교에서도 나타나고 있고, 수많은 무당도 하고 있으며, 심지어 월드컵 문어 파울(Paul)도 하는 일이다. 물론 그 가운데 많은 사람이 빗나간 예언에 대해 침묵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의 은사는 미래 일을 미리 알아맞히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은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더 사모해야 할 예언의 은사(고전 14:1, 14:5)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분별하여 신자들에게 가르치는 은사이다.

둘째, 김요한 목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 제6장에 나열한 설명은 대체로 건전한 것이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스탠리 존스 이야기를 예화로 든 것은 그의 설명을 무색케 만든다. 이는 예수님의 이름을 주술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장려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해 명령하기만 하면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셋째, 김요한 목사는 성령께서 탄식하며 기도하신다는 말씀을 방언 기도와 연결한다. 이렇게 연결하는 것도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인데, 방언 문제에서 김요한 목사는 철저하게 경험 중심적이다. "방언 은사의 진가를 알려면 방언 통변을 받아 봐야 한다"는 주장(124쪽) 등 성경에서 언급하지 않은 내용을 자신 있게 말한다는 점이 아쉽다. 안타깝게도 이 주장들은 한국교회에서 아무 검증 없이 진리처럼 받아들인다.

넷째, 기도에서 믿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데, 이때의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김요한 목사의 진지한 묵상과 고민이 묻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이 "자신의 노력이나 성실함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우시고 신실하신 성품에 뿌리를 두고 있다"(86쪽)고 선언했지만, 제9장 '믿음으로 기도하기' 편에서 기도자의 믿음이 "기도 응답의 금고를 여는 마스터키와 같은 것"(150쪽)이라는 이율배반적 주장을 하는 것이다. 결국 김요한 목사는 자신이 "기독교적 사고가 아니라 이교적 사유의 한 모습일 뿐"(87쪽)이라고 비판했던 그 주장을 하는 모순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김요한 목사는 "믿음이 있는 경우 반드시 기적이 일어난다"고 소개한다(149쪽). 이러한 주장은 절반의 진리다. 우선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신 경우는 반드시 믿음이 있는 경우만이 아니었다. 어떤 기적들은 그냥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다. 치유를 입는 자의 믿음과 관계없이 말이다. 회당에 있던 손 마른 사람의 경우(막 3:1-5)나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경우(요 9:1-7) 등이다. 병자의 믿음과는 관계없이 그냥 불쌍해서 고쳐 주신 경우가 적지 않다.

더 나아가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믿음은 무엇인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150쪽)인데, 가나안 여인이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응답을 받은 것(151~152쪽)처럼, 이런 믿음만 있으면 기도가 응답될 수 있을까. 아니다.

김요한 목사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데 실패한 것은 우리에게 요구되는 믿음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점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한 거절이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무시해서도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믿음은 "기도 응답의 금고를 여는 마스터키와 같은 것"(150쪽)이라기보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로 기도 응답이 되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며, 감사할 수 있는 원천이며 또다시 다른 문제로 기도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다.

다섯째, 김요한 목사는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하루에 6~7시간씩 기도하기도 했고, 또 믿음의 위인들이 2~3시간씩 기도했다는 예들을 소개한다. 정말 이렇게 많은 시간 기도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게 성경적 가르침일까. 김요한 목사는 기도를 많이 해야만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고 오해한 이방인들 예를 들면서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 6:7-8)에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바알 선지자들의 요란한 기도에 비해 엘리야의 기도가 간단한 것이었음에는 주목했지만 말이다.

기도는 무조건 많이 하면 좋을 것이라는 선입견은 쉽게 벗겨지지 않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무속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곧잘 잊는다. 이러한 주장은 사람들을 기도의 세계로 초대하기보다는 포기하게 만든다. 이 책을 읽고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는 사람들은 결국 좌절을 맛볼 가능성이 많다. 몸짱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헬스클럽에 등록하기는 하지만 결국 실패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은 소개된 위인들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기도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루터의 사명을 받은 것도 아니고, 목사는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그런 기도 생활은 특별한 소명을 받은 분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기도를 포기하기 쉽다. 이 책은 기도를 하게 만드는 동기를 부여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포기하게 만들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런 부류는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다.

기도는 긴 시간 해야 할 것이라기보다 자주 해야 하는 것이다.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은, 24시간 내내 절대 중단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라기보다는 모든 경우에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즉 힘들 때에도 기도해야 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기도해야 하고, 내가 내 힘으로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어린아이는 매순간 부모를 찾는다. "엄마, 배고파요", "아빠, 이것 보세요", “엄마, 쉬 마려워요", "아빠, 이것 들어 줘요". 우리 아랫집에 사는 아이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 아빠 다리 뒤로 숨는다. 낮선 아저씨인 내가 같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는 것이 두려운 모양이다. 그 아이는 아빠 손을 꼭 잡고 뒤로 숨는다.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자기 전에 "하나님, 편안한 밤이 되게 하시고 잘 자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한다. 일어나서 "하나님, 저 일어났어요" 기도해야 한다. 무서운 일이 있으면 하나님이 함께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길지 않아도 좋다. 30초도 충분하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하나님께 아뢰지 않고 혼자 하지 않아야 한다. 내가 기도한 것이 거절되어도 낙망하지 말고, 다음에는 다른 기도 제목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그게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지, 끝까지 떼쓰면 얻어 낼 수 있다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기도는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하나의 공로가 되어 버렸다. 스님들이 면벽 수도하듯, 긴 시간으로 또는 방언 기도하는 것으로 기도의 수련을 하고 있다. 수련의 깊이가 깊어지고 응답 횟수가 늘어나면 기도의 대가로 인정받는다. 복음은 우리가 우리 종교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음을 전제한다. 지치고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게 우리 모습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눅 18:16). 그렇지 않고 기도를 얼마나 유창하게 오랫동안 하는가 따위로 하나님에게 나아가려고 한다면 복음을 크게 오해한 것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지렁이의 기도>에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익한 내용이 많지만, 많이 아쉽다. 김요한 목사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한 탓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국진 / 전주 예수비전교회 담임목사. 저서로 <사람이 여물어 교회가 꽃피다>, <예수는 있다>, <사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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