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두절미하고 이 책은 지금까지 나온 어떤 마가복음 주석보다 종합적이고 탁월하다. 학자마다 주석하는 방법도 다르고 쓰는 의미도 다를 것이다. 그러나 주석은 목회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주석을 써야 할 이유는 상당히 빈약해진다.

필자 견해가 타당성이 있다면, 주석을 쓸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대상은 성경을 밝히 알고자 하는 설교자와 성경 독자들이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하나는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용적이라는 말은 모호하다. 하지만 주석은 먼저 설교나 강해에 필요해야 하고, 성경 독자들에게 성경이 갖는 원의(原意)를 해석해 주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비평적 내용보다는 성경 구절들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정확하게 해석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주석은 성경 자체를 알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최고의 주석이다.

저자 박윤만 목사의 이력은 약간 특이하다. 그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영국으로 건너가 로햄튼대학교에서 신약성경 헬라어 문법학자이자 신약학자인 스탠리 포터(Stanley E. Porter)에게 지도를 받는다. 스탠리 포터 교수는 그리스 문법 전문가이다. 포인트로마대학교(Point Loma College)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994년부터 로햄튼대학교 신학교수로서 신학 및 종교학과를 이끌었다.

현재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온타리오주 해밀턴 소재의 맥마스터디비니티대학교(McMaster Divinity College)에서 신약학장으로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현재 <Greco-Roman Christianity and Judaism> 저널의 수석편집자이기도 하다. 그는 헬라-로마 문화에 전문가이며, 특히 헬라어 문법 분야에서 탁월한 학자이다.

그의 장점은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된 성경 주해에 적합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스탠리 교수에게서 수학했다는 점은 성경 주석자로서 좋은 자질을 갖춘 것이다. 이것으로 본서에서 스탠리 교수의 언어학 측면이 도드라진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의 박사 학위논문도 스탠리 교수 지도하에 현대인지학 이론인 틀 의미론(Frame Sematics)으로 마가복음 2:1-3:6을 연구한 것이다. 이런 독특한 이력을 통해 저자가 성경을 주해할 때 성경 원문을 조금 더 깊고 치밀하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마가복음 - 길 위의 예수, 그가 전한 복음> / 박윤만 지음 / 킹덤북스 펴냄 / 1,239쪽 / 4만 5,000원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서론은 '개관'에 담았고, '본문 주석'에서는 마가복음 전체 주해를 담았다. 그 뒤로 '참고 문헌'이 실려 있다. 우리는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개관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곳에서 저자의 '마가복음 독법(讀法)'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개관에 언급된 저자 주장을 몇 가지만 챙겨 보자. 먼저 저자는 전통 관점을 따른다. 즉 그는 바울과 동행한 마가다.

"따라서 우리는 마가복음의 저자로 알려진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관이며, 또 바나바의 조카(골 4:10)일 뿐 아니라, 베드로와 바울의 동행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 (25쪽)

수신자의 경우, 리처드 보컴 주장처럼 '불특정 다수'가 아닌 전통적 관점인 '특정 지역'으로 보는 것이 옳다. 투너나 헹겔의 주장처럼 "언어적 수고가 뒤따르는 헬라 개념의 라틴어 음역"(27쪽)이 빈번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것을 "라틴어를 모국어로 한 이탈리아 청자를 위한 배려"(Taylor, 27쪽)로 본다.

또한 유대식 시간이 아닌 로마식 시간을 사용한 점만 보아도, 독자는 로마라는 특정 지역에 있는 이들이 분명하다. 저자의 문제가 관점의 문제라면, 특정 수신자는 특정한 목적을 가진 특수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다. 초대교회 문서 대부분이 회람 서신이고, 회람하기는 했지만 원독자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것은 다른 독자에게 편지가 읽힐 경우가 '번역'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한다.

저작 시기도 유의할 부분이다. 저자는 마가복음 기록 시기를 네로의 기독교 박해 시기와 맞댄다. 네로의 박해는 로마에 한정된 박해이지 로마제국 전반에서 이루어진 박해가 아니다. 반세기 이후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제국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어쩌면 네로의 핍박에는 급성장한 기독교에 대한 이교도 황제들의 두려움과 통제를 위한 저의(底意)가 있었을 것이다.

마가복음에 베드로의 관점이 깊이 스며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베드로전·후서와 마가복음을 교차해서 읽어야 한다는 점도 말한다. 박해로 공동체가 와해하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회의(懷疑)하는 독자들에게 마가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제자도를 강조한다. 마가복음의 기록 목적은 "실패한 제자들을 다시 세워 나가시는 예수님의 주도권"(40쪽)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특별히 주목할 부분은 '주해 방법'이다. 저자의 강점이 가장 도드라지는 부분이며, 본 주석서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포괄적 개념으로 성경으로서 마가복음은 "구원과 삶의 유일한 기준"(44쪽)을 전제한다. 협소하며 직접적 주해는 '언어적, 문법적' 방법을 사용한다. 언어는 문맥을 통해 분명해진다. <키텔 사전>식 어원 연구도 문맥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왜곡될 여지가 많다. 저자는 "하나님의 계시는 언어와 문법적 장치를 통해 주어졌기 때문에 주석이 현대언어학의 중요한 연구 결실과 대화를 가질 필요가 있"(45쪽)다고 말한다.

성경 시대의 언어는 먼저 문맥적으로 해석되어야 하고, 다시 문화적-역사적 관점에서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포터 지도하에 석·박사를 마친 저자의 강점은 문맥의 적실성(的實性)이다. 한 예로 "내러티브에서 과거 시제는 배경 시제로 사용된다"(45쪽)는 포터의 관점을 끌고 온다. 또한 1세기 의사소통이 시각 독법이 아닌 청각 독법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마가복음은 읽는 것이 아닌 '듣는 것'이었다. 이러한 "구술-청각적 의사소통(oral-aural communication)"(47쪽)은 개인 묵상이 아닌 요즘의 낭독과 같은 단체적 듣기였음을 알아야 한다. 필자는 저자의 이러한 해석상 전제들을 살피기 위해 본론 속에서 주해한 몇 본문을 살펴볼 것이다.

1장 복음의 기초: 이사야의 예언

저자는 이 본문, 1-13절을 대단락 하나의 일부로 본다. 1-13절은 앞으로 예수님에 의해 선포될 "복음의 기초"(54절) 역할을 감당한다. 또한 14절부터 전개될 마가복음의 '드라마의 무대장치 역할', 즉 배경이다. 저자는 한 구절 한 구절을 헬라어로 읽고 운율과 문법에 맞추어 해석한다. 제목과 이사야의 예언으로 이루어진 첫 단락은 복음(유앙겔리온)의 시작(아르케)을 알리는 동시에 광야의 소리와 길을 통해 예수께서 걸어가실 길을 보여 준다.

저자는 복음(유앙겔리온)에서 '좋은 소식'이 로마인들에게 시저가 다스렸다는 역사적 상황에서 유대인들에게 전한 "하나님이 다스린다"(60쪽)는 소식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이것은 다시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로 이어진다. 그는 더 나아가 복음의 개념을 출 23:20과 말 3:1, 사 40:3과 연관한다. 세 구절은 모두 길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보라 내가 내 전령을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너를 길에서 인도할 것이다." (출 23:20)

"보라 내 전령을 파송하노니 그가 내 앞에 길을 주목할 것이다." (말 3:1)

"한 소리가 광야에서 외친다. '그대는 주의 길을 준비하십시오. 지체 없이 그의 길을 곧게 하십시오.'" (사 40:3)

그럼 다시 마가복음 1:2-3로 가 보자.

"보라 내 전령을 네 앞에 보내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할 것이다. 한 소리가 광야에서 외친다. 그대는 주의 길을 준비하십시오."

이러한 비교를 통해 마가복음이 첫 단락은 "이사야 40:3의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 생활에서 자유케 하실 것이고 해방되는 백성 위에서 왕 노릇하실 것"(63~64쪽)을 예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즉 복음은 새로운 출애굽을 말하며, 종말론적 관점에서 읽혀야 한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독자들 상황은 오래전 시나이광야를 걸었던 이스라엘 상황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길이 없는 광야를 걸어야 한다.

그러나 여호와는 그들에게 전령을 보낼 것이고, 그들에게 '길 없음'의 상황에서 '길'이 되어 주신다. 여호와의 길은 곧 주의 길이며, 주의 길은 다시 주 예수의 길이 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걸어야 할 길은 어디일까. 예수님께서 걸었던 바로 그 길, 십자가의 길이다. 저자의 통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길을 걷는 것이 통치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길을 걷는 분"(66쪽)이 되시며, 길을 걷는 것은 다시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67쪽)으로 확장한다.

마가복음을 읽는 독자라면, 서두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먼저는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잘못이거나 오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구약이 예언했던 길이다. 또한 그 길은 여호와의 길이며 예수의 길이니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이다. 고난은 길이 막힌 것이다. 어떤 대안이나 방법을 찾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위급하고 간교하다. 그러나 마가는 분명히 말한다. 광야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은 고난을 겪는 그들을 인도할 것이다. 비록 걸어야 하는 길이 "길이 없는 광야"(68쪽)라 할지라도 말이다.

47장 세 번째 수난 예고와 제자도

필자는 다시 마가복음에서 중요한 구절인 10:32-45 주해로 넘어왔다. '세 번째 수난 예고와 제자도'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먼저 저자는 원어에 근거한 자신만의 번역을 시도한다. 대괄호 안에 문맥을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한 부가 해설을 삽입한다. 이 본문에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았던 목적지를 밝혀진다. 그들은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곳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곳은 아마 예루살렘일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마가는 독특한 방식으로 기록한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막 10:32)

저자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한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 앞서 가시고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놀랐고 뒤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열둘을 데리고 자신에게 장차 닥칠 일들을 그들에게 말씀하시며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놀랐다'이다. 이 놀람은 1:27에서 보여 준 기이함과 의아함이 가미된 것이다. 더 정확하게 풀자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것에 대해 놀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단어를 "예수님의 행보가 지금까지 보이신 발걸음의 이탈로 비쳤다는 것을 말한다"(701쪽)고 강조한다. 이러한 단어와 문맥의 의미를 통해 숨겨진 예수님의 의도를 파헤치는 것이 저자의 탁월함이라 확신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 중 하나는 '그들이 그와 함께 있도록'(3:14)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그가 통과해야 할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그 일을 반복적으로 말씀하신 데는 그들이 그의 제자들로서 자신이 그 고난을 통과하는 동안 끝까지 함께하도록 미리 준비시키시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추론 역시 가능하다." (703쪽)

그런데 이 본문에서는, 황당하게도 죽음 예고 직후 자리다툼이 벌어진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의 저의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해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다. 같은 길을 걸으나 그들은 주님께서 생각하고 계획하신 것과는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개관에서 언급하는 "실패한 제자들"(39쪽)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주님과 함께하는 길은 배움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은혜의 시간이다. 제자들은 애초부터 성공할 수 없는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선택했고, 함께 '하나님의 길'을 걸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17)고 약속하셨다. '앞서 가신' 예수님은 실패한 제자들을 사도로 세워 가고 계신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실패한 제자들을 다시 세워 나가시는 예수님의 주도권을 담고 있는 마가복음의 제자도"(40쪽)는 현재 고난 속에서 길을 잃고 실패하고 있는 독자들에게서 일어날 것이다. 예수님이 실패한 제자들을 다시 회복하게 해 세상이 변화한 것처럼.

나가면서

이 책에 딱 맞는 사자성어가 있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갈수록 점점 맛이 나고 탁월함을 느낄 수 있는 것, 바로 이 책이다. 고개지가 맛보았던 사탕수수 맛과 비교할 수 없는 맛깔스러움과 충족한 행복이 느껴지는 책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마지막 도착한 곳인 무덤은 '길의 무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실 새 창조의 시작을 알리는 '하나님의 모태(母胎)’ 즉 자궁이었던 것이다.

“죽어서 들어간 곳이 살아 부활한 곳이 된 것이고, 여행의 종착지가 새 창조의 출발지가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길 여행은 무덤이 하나님의 모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복음 선포의 장 그 자체이다.” (11쪽)

출애굽 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광야는 무덤이었다. 출애굽 1세대는 그곳에서 죽어 묻혔다. 불순종의 결과다. 그러나 예수님은 광야를 걸었고, 순종을 통해 길 없음의 공간에서 친히 길이 되셨다. 마가복음의 독자들에게 '길'은 곧 예수님이 분명하다. 길 걸음은 예수님과 함께함이며, 순종을 통한 생명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읽고 나서 필자는 이해할 수 없는 몇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먼저는 어떻게 이런 무지막지한 작업을 할 생각을 했는가이다. 얼마의 시간이 걸렸을까 생각해도 가늠할 수가 없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주야장천 글을 써도 몇 년은 걸릴 작업이다. 특별히 기존 주석과 다르게 학적 깊이만 추구하지 않았다. 목양자의 마음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즉 성경의 깊은 뜻만 살피는 것이 아니라, 한 편의 감동적인 설교를 듣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목회적 해석이 겸비되어 있다.

감히 단언하건대 앞으로 한동안 마가복음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박윤만 박사의 주석을 건너뛸 수 없을 것이다. 헬라어에 능통한 저자이기에 원어적 측면에서도 도움이 되지만, 신학적 통찰력도 뛰어나다. 개인적 묵상을 위한 독자나 마가복음으로 설교하기를 원하는 설교자들에게 최고의 주석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정현욱 /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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