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다룰 작품은 지난번 글 서두에서 잠시 언급했던 '바람의 검심'입니다. 메이지유신을 배경으로 하고, 켄신(검심)이라는 무사가 주인공인 만화입니다. TV판·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도 나왔고, 일본 만화를 영화화한 작품 중 상당히 드물게 실사영화도 괜찮게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아마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거의 다 한번쯤은 들어 보셨을 작품이고요, 개인적으로 <슬램덩크>, <배가본드>와 함께 설교에 인용할 내용이 가장 많은 만화라고 생각합니다. 꼭 읽어 보기를 강력 추천합니다.

막부 말, 혼란스러운 정국에 '칼잡이 발도제'라고 불리는 유신지사 측 검객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천어검류'라는 일자 전승의 최강 검술 계승자로서, 새로운 시대를 위해 검술을 사용해 가차 없이 막부 측 인사들을 암살하는 자객으로, 나중에는 싸움의 전면에 나서 막부 측 무사들과 싸우는 무사로 활약했습니다. 메이지유신이 성공한 뒤 그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고, 역날검을 차고 불살의 떠돌이 검객이 되어 약자들을 도와주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어떤 마을에서 사람을 살리는 검술을 가르치는 '카미야 활심류' 도장을 운영하는 카오루를 만나 정착하게 되고, 싸움꾼 사노스케, 몰락한 무사 집안의 소년 야히코 등을 만나면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켄신과 시시오. '바람의 검심' 애니메이션 공식 사이트 갈무리

사소한 에피소드가 계속되다, 1부 하이라이트인 시시오와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막부 말에 켄신과 같이 활약하던 시시오라는 무사가 부하들을 규합해 또다시 큰 동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켄신은 그것을 막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싸움을 계속하던 중 시시오의 부하 중 하나인 세타 소지로에게 발도술에서 밀리고 검도 부러집니다. 현 상태로는 시시오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켄신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비천어검류 최강의 발도술인 '천상용섬'을 배우기 위해 스승인 히코 세이쥬로를 찾아가, 우여곡절 끝에 비기를 터득합니다.

'천상용섬'의 비밀은 목숨을 걸고 칼을 맞대는 그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러나 죽음보다 더 강한 생존 열망을 갖고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었습니다. 스승의 말에 따르면, 켄신은 남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려는 마음이 너무 강해 그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고 합니다. 반대로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목숨을 너무나 소중히 여겨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한 걸음을 내딛을 때 비기를 터득하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생사의 경계선에서 한 걸음을 내딛는 용기, 저는 이것이 신앙에, 특히 신학을 하는 데 꼭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때로 우리는 무언가를 계속 쌓아 가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미 믿고 있는 것을 확실하게 해 나가는 과정을 신학이라고 생각하고는 합니다. 물론 경험과 지식, 표현할 수 없는 신앙의 깊은 체험들을 쌓아 가는 일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그 과정에서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설적 표현 같지만, 진리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자기를 비워 가는 것이 신앙의 길 아닐까요.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서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교리나 제도, 가치관, 중요한 신학 개념 등이 있을 것입니다. 아마 교파에 따라 다르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도 조금씩 다르겠지요. 또한 그러한 것이 이루어 놓은 신앙의 경계선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경계선을 넘어가면 신앙이 흔들릴까 봐, 교회가 무너질까 봐, 천국에 가지 못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성서의 위대한 인물들은 그 경계를 넘어선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던 땅의 경계를 넘어 미지의 땅을 향해 떠났습니다. 모세는 "광야를 지나 뒤편으로"(출 3:1, 배철현, <신의 위대한 질문>) 건너갔을 때, 하느님의 소명을 받습니다. 예수는 '성전 종교'라는 당시의 종교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하느님의 영과 그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율법과 혈통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보편적 사랑을 전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당시 세상의 전부였던 로마 가톨릭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그 너머에서 죽음과 절망이 아닌 새로운 길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저는 신학 공부를 좋아합니다. 자유주의신학 배경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지금도 (한국 개신교 기준) 급진적 학자들의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공부하다 보면, 새로운 논쟁거리가 계속 떠오릅니다. 과연 빅뱅과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도 하느님의 창조를 믿을 수 있을까. 성서의 무오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성서를 권위 있는 책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예수의 탄생과 기적과 부활에 대한 다른 견해를 받아들이고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일 수 있을까. 성소수자들을 교회에 받아들이면서도 교회일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해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사도 바울이 직면했던 질문들 같습니다. 유대인 아닌 사람도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 할례나 정결법 같은 율법을 포기하더라도 여전히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

이렇게 하나씩 버려 나가는 과정은 어쩌면 우리를 신앙의 본질로 인도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쌓아 놓은 것들을 하나씩 비워 나가도 결국 남는 그 무언가, 끝까지 버릴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본질 아닐까요. 모든 것을 당장 버리고 부수라는 말은 아닙니다. 신앙에는 이렇게 경계를 허물고, 무너질까 두렵지만 그 두려운 한 걸음을 내딛는 일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켄신 이야기를 잠깐 다시 해 보겠습니다. 시시오와의 싸움이 끝나고 켄신은 과거 일로 또다시 싸움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그만 사랑하는 카오루가 살해당합니다. 큰 충격에 빠진 켄신은 검을 봉인한 채 걸인들과 함께 폐인처럼 살아갑니다. 카오루의 복수를 하자는 동료들의 외침도 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이 살아왔던 불살의 길에 대한 믿음도, 소박한 사람들이 평화를 누리고 사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소망도 끊어졌습니다.

그런 켄신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야히코가 죽게 되었으니 도와 달라고 외치는 츠바메의 눈물이었습니다. 켄신에게 모든 것을 다 포기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도움을 구하는 간절한 목소리,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연민, 바로 사랑이었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폐인처럼 살아가던 켄신은 도움을 구하는 간절한 목소리에 응답한다. '바람의 검심' 애니메이션 공식 사이트 갈무리

사도 바울은 신앙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어쩌면 켄신처럼, 때로는 우리도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나라에 대한 소망이 사라져 버리는 절망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놓을 수 없는 것,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면 다른 이들을 향한 사랑 아닐까요. 저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어쨌거나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그 '무채한의 사랑 월드'에 도달하기 위한 경계들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넘어서는 것이 결국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이끌 것이라고 믿습니다.

"탁월한 종교학자 필리스 티클에 따르면, 거의 500년마다 교회는 일종의 거대한 잡동사니 세일을 한다. 교회는 무엇을 내다 팔 것이며 무엇을 간직할 것인지, 어떤 것이 없어도 좋은 것이며 어떤 것은 대체할 수 없는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개신교 종교개혁 이후 5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정확히 그런 시점을 통과하고 있다." [로빈 마이어스, <언더그라운드 교회>(한국기독교연구소)]

마침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년이 지났습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간직해야 할지, 지금 우리가 넘어서야 할 경계는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목숨을 건 한 걸음을 내딛었던 켄신처럼 '천상용섬'의 한 걸음을 내딛을 때 우리는 좀 더 신앙의 본질에 다가서고, 진리 안에서 자유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떠돌이 무사 켄신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경계를 넘어서는 한 걸음을 내딛을 용기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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