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 주제 사라마구 지음 / 정영목 옮김 / 해냄 펴냄 / 472쪽 / 1만 4,500원

소설 속 주된 상황은 전염병처럼 갑자기 번져 가는 백색 실명이다. 운전하던 한 남자가 교차로에서 갑자기 눈이 안 보여 차를 움직일 수 없게 되자, 거리는 경적 소리와 욕으로 아수라장이 된다. 이어 그의 아내와 택시운전사, 안과의사 등 모두가 점차적으로 시력을 잃게 된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특정 인물의 이름이나 도시, 나라, 연도 등 구체적인 것을 명시하지 않는다. 특정한 누구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포함한 인간의 보편성을 말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리듬 있는 짧은 운율의 대화나 밝고 가벼운 여백들도 없다. 안개처럼 뿌연 백색 실명, 누구의 말인지도 서로 잘 모르는 상태,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눈먼 자들의 답답한 상황을 독자들에게도 적용시킨다.

저자인 주제 사라마구는 1922년 포르투갈 출생으로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다. 용접공 등 여러 일을 하며 사회의 실상을 알아갔다. 20년 가까이 긴 시간 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1982년 이후에야 여러 작품을 쓰기 시작했으며, 199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정부와 관리의 부패와 무능,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글을 주로 썼다. 권력자가 얼마나 불합리하고 악한지, 정치가의 문제 해결 방식이 얼마나 자기 위주의 통제와 억압뿐인지 강조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조지 오웰의 <1984>와도 맥락이 닿아 있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와도 기저가 비슷하다. 미국 대공황기에 고향을 떠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 내야 했던 일가족의 이야기. 모래바람, 흉작, 빚, 떠돌이 부랑자로 전락하는 비참함, 자본주의의 횡포 아래서 겪은 사기와 절망, 망연자실함. 그래도 나빠 보이는 사람들의 착한 본성을 알아봐 주는 조드 부인과, 죽어 가는 노인에게 자기 아기 먹일 마지막 마른 젖을 물려 주는 며느리. 약한 자들이 보여 주는 이런 사랑, 나를 넘어 우리를 인식하고 나누며 연대할 때 극한 상황 속에서도 구원이 시작된다는 것. 이런 점이 이 책 <눈먼 자들의 도시>(해냄)를 읽으면서 동시에 <분노의 포도>를 떠올리게 되는 이유다. 난파당해 섬에 갇혀 야만의 세계에 빠져든 소년들 이야기를 다룬 <파리 대왕>도 마찬가지다. 저자 윌리엄 골딩은 인간본성의 결함으로 사회의 결함을 설명한다. 이 책의 원제 <Lord of the Flies>는 성경에서 온 표현으로 곤충의 왕 즉 악마, 마귀라는 뜻이다.

다시 이 책으로 돌아와 보자. 모두 실명한 상태에서 의사의 아내 혼자만 눈이 정상이었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못 볼 것을 너무 많이 보고, 그 비참한 지옥 상황을 그대로 목격해야 했기 때문이다. 시설로 격리되는 남편을 위해 자신도 눈이 멀었다고 말하고 함께 들어간 수용소. 그곳은 위생적으로 동물 축사처럼 변해 갔다. 남의 시선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온갖 무례와 약탈, 강간이 일상화됐다. 공간은 약육강식 같은 동물의 세계로 변해 간다. 동물들의 세계에는 나름의 질서와 체계가 있다. 이곳은 시각의 상실과 함께 모든 이성이 마비된 듯 아비규환의 지옥이 된다. 이해나 기다림, 질서는 없다. 부당한 권력과 폭압, 심지어는 윤간과 살상이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공간이 되고 만다.

인간은 얼마나 이성적인 품위와 인격적인 자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이성에 의한 평화적 공존과 진보를 믿었지만, 2차 대전이라는 광기와 폭력 아래 수십만 명이 죽어 갔다. 지금의 현대사회는 좀 나아졌을까. 익명성 속에서 벌어지는 분노와 광기, 묻지 마 살인, 경제적 약탈, 부패한 정치권력…. <눈먼 자들의 도시>는 다른 나라의 어떤 곳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을 가리킨다. 볼 수 있으나 보지 않는 권력자들, 본다고 생각하지만 심한 근시안의 한계 속에서 미래를 닫아 둔 채 선별적으로만 보는 정치인들, 남을 밟고 약탈하더라도 내가 먹고사는 게 우선이라는 많은 사람….

수용소 안에서는 무기를 이용한 폭압으로 배급품과 음식을 독점하는 불량 집단이 생겨났다. 사람들이 굶주리면서 부당한 권력 앞에 무너져 갔을 때, 심지어는 그들의 동물적 욕구 충족을 위해 여자들이 강간을 당하며 죽어 갈 때, 두려움에 떨던 의사의 아내가 (여자들과 힘을 합쳐) 악한 권력의 두목을 살해한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남편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였어.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저놈들은 이제 우리를 다시 학대하려 할 때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알고 있을 거야. 그들이 처음 요구했을 때 당연히 저항했어야 하는 건데. 우린 두려웠고 두려움이 늘 지혜로운 조언자 노릇을 하는 건 아니었어."

부조리한 상황에서 희망은 정당방위와 용기 있는 연대에 있었다. 희망은 인간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아비규환의 상황에서도, 안대 낀 노인을 끌어안고 닦아 주는 색안경 낀 여자의 조건 없는 사랑에 있었다. 작가는 전체주의의 횡포에 굴하지 말고, 자신의 내적 두려움에도 굴복해 버리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이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희망을 제거하지 않는 따뜻한 이유라고.

인간은 재앙, 배신, 불합리 등의 상황에서 그것을 주도하거나 바꾸기보다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일 때가 많다. 황폐한 거리와 인간 사체를 뜯어먹는 개와 까마귀에 대한 묘사 등이 너무 적나라하고, 어두운 표현들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많이 암울하고 불편했다. 그러나 무력하게 이 세상에 던져진 피투성이 존재인 인간의 실존에도, 역사와 사회를 바꿔 가는 것이 인간이다.

수용소를 탈출해 서로를 의지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통해 다시 희망을 볼 수 있었다. 서로 의지하고 세워 주는 그 사랑과 배려를 통해 하나둘 다시 눈을 뜨고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디스토피아를 예견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동시에 말하고 있는 작가의 이름값이 아깝지 않은 책이었다. <눈뜬 자들의 도시>,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수도원의 비망록>, <예수의 제2복음> 등 그의 다른 책들도 궁금하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옥은숙 / 포항을사랑하는교회 목사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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