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4일 '신학과 페미니즘의 대화'라는 주제로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강좌가 열렸다. 이 강좌는 한·미 연합 국제 컨퍼런스의 일환이며, 박지은·최순양·이은경·신익상·박일준 교수와 드류대학교(Drew Univ.) 캐서린 켈러(Catherine E. Keller) 교수가 진행한 공동 연구의 후속 프로그램이다. 이 자리에서 캐서린 켈러 교수와 최순양(이화여대)·박일준(감신대) 교수가 강의했고, 이창호 교수(장신대)가 논평했다.

<뉴스앤조이>는 이날 강연들 전문을 4차례에 걸쳐 게재하고자 한다. 아래는 이창호 교수의 논평문 '켈러 교수의 촘촘히 얽힌 희망: 트랜스페미니스트 신학적 불/가능성에 대한 응답' 전문이다. - 편집자 주

켈러 교수님의 강의를 통해 귀한 배움의 기회를 얻게 된 것에 감사드리며, 교수님의 강의에 논평자로 섬기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한다. 이 시간 교수님의 강의에서 배운 바에 근거하여 우리의 신학적 논의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는 몇 가지 지점들을 제시함으로 논평자의 응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크게 세 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첫째, 트랜스페미니스트 인간론의 빛에서 극단적인 개인주의 및 집단주의적 자아 개념을 성찰하고 유효한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언급하신 대로, 켈러 교수는 그의 책 <끊어진 그물망>에서 '격리된 자아'와 '경계선을 상실한 자아'를 반박하면서, '연결적 자아' 개념을 제안한다. 앞의 두 자아에 대한 논의를 들을 때에, 갤스턴(William Galston)이 제기하는 두 종류의 극단적 자아에 관한 교리가 떠올랐다. 한쪽 극단을 점하는 초개인주의는 다른 개인들이나 정치사회 공동체의 본성과 가능성에 미치는 영향들을 고려함이 없이, 개인들이 자신의 것으로 요구할 수 있는 주장들이나 '권리들'에 집중하면서 그 개인들의 분리성(혹은 독자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1) 반대쪽 극단은 갤스턴이 초유기체주의라 칭하는 것으로, [초유기체주의에 따르면] 공동체는 단일화된 존재로 실체화하면서 개인의 주체성과 독자성의 가치를 축소한다.2) 양극단이 적절히 극복되어야 한다는 점과 기독교 역사 속에 양극단에 위치시킬 만한 자아 개념이 실제로 있었음을 인정하면서, 유효한 대안을 찾을 수 있는가? 논평자는 이 대안을 트랜스페미니스트 인간론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실존을 거미줄처럼 정교한 관계적 상호 의존의 그물망 안에 인격적으로, 사회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생태 우주적으로 위치시키고 또 '자아의 의미'를 억압의, 투쟁의 그리고 변혁의 장대한 역사들 안에 촘촘히 얽혀 속해 있는 과정의 틀에서 규정하면서, 트랜스페미니스트 인간론은 하나의 유효한 길을 제시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격리된 자아를 하나의 유일한 참된 자아로 정당화하는 것을 경계하고 다양한 형태의 형성적, 변혁적 관계들 안에서 자아의 독특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둘째, '교차 가능성의 작용'으로서의 트랜스페미니즘은 사회의 이슈들에 대해 다차원적이고 복합적인 접근을 강화한다는 의미에서 기독교 사회 윤리의 성숙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차 가능성'이라는 개념의 빛에서, 사회적 불평등의 이슈는 다차원적 방식으로 또 공통분모를 면밀히 살피는 방식으로 검토할 때에 적절하게 논의되고 극복의 방안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켈러 교수께서 미국 흑인 우머니스트 사상가들의 관점으로 진술하신 대로, 피억압자들이 경험하는 억압의 요인들과 내용들은 복합적이고 다면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적 불평등과 억압의 복잡성에 대해 말해야 하고 이슈들과 해답들을 촘촘히 엮어 두어야만 한다. 우리는 정교한 관계들의 전 우주에서 인간으로서 촘촘히 얽혀 있으며, 그 관계들의 모든 불균형과 잠재 가능성들에 책임을 진다는 점을 분명히 인지하면서, 여성으로서의 우리의 문제들이 다른 모든 긴급한 문제들(경제와 생태학, 민족적, 계급적, 종교적 차이, 인종, 전쟁과 평화 등의 문제들) 곧 국면에 따라 비중과 의미가 다를 수 있지만 여전히 서로 얽혀 있는 문제들과의 관계들을 열어 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성에 대해 논할 것인데, 트랜스페미니즘의 범재신론과 몰트만의 범재신론을 간략히 비교하고자 한다.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성을 논하면서, 몰트만은 이 둘 사이의 사귐의 개념을 제안한다. 이 사귐 안에서 피조된 존재들은 하나님의 섭리적 현존과 사역에 동참하도록 허용된다는 의미에서 단순한 피조물 됨을 뛰어넘는다. 한편으로 몰트만은 세계와 하나님 사이의 범신론적 동일시나 세계의 신격화를 거부한다. 다른 한편으로 삼위일체적 창조론을 전개함으로써,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엄격한 구분을 주장하는 분리주의를 극복한다. 만물은 범신론적 의미에서 신적 존재가 아니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범재신론적 의미에서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 이 신적 사랑의 사귐 안에서 인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은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 이 사귐을 강조함으로써, 몰트만은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신플라톤주의적 혼합을 거부하며, 동시에 이분법적 분리도 경계한다. 이와 유사하게, 트랜스페미니즘의 범재신론은 한편으로 세계와 하나님 사이의 범신론적 동일시를 거부하고, 다른 한편으로 과정신학적 창조론을 전개함으로써,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엄격한 구분을 주장하는 분리주의를 극복한다. 그렇다면 트랜스페미니즘과 몰트만 사이에 차이가 있는가? 특별히 범재신론에 관한 신학적 논의를 심화할 수 있는 통찰을 트랜스페미니즘에서 찾을 수 있는가? 트랜스페미니즘의 범재신론이 더 희망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트랜스페미니즘의 범재신론에서 하나님은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사귐의 형성과 향유에 참여하실 뿐 아니라 '위대한 방직자(紡織者)'로서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존재들을 적극적으로 엮어 내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한 트랜스페미니즘의 범재신론에서 내재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초월하도록, 곧 '현 상황을 통과하여 그리고 넘어서서 움직이도록' 부르시고 힘을 불어넣어 주신다.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들을 제공하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또 우리와 협력하심으로써 그 가능성들을 현실화하게 하신다. '하나의 내재적 초월' 안에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것을 수행하고 있는데, 함께, 촘촘히 얽혀, 서로를 엮어 가며 그리한다.

각주

1) William A. Galston, Justice and the Human Goo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0), 3. Cited from Gene Outka, "Universal Love and Impartiality," in Edmund N. Santurri and William Werpehowski, eds., The Love Commandment: Essays in Christian Ethics and Philosophy (Washington, D.C.: Georgetown Univ. Press, 1992), 71-72.
2) William A. Galston, Justice and the Human Good, 2-3. Cited from Gene Outka, "Universal Love and Impartiality,"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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