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

1년 이전 기사를 검색하기 원하시면 + 버튼을 눌러 주세요.
나 역시 남자가 아니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성(性)과 젠더에 대한 성찰
  • 박일준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7.10.30 18:59

10월 24일 '신학과 페미니즘의 대화'라는 주제로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강좌가 열렸다. 이 강좌는 한·미 연합 국제 컨퍼런스의 일환이며, 박지은·최순양·이은경·신익상·박일준 교수와 드류대학교(Drew Univ.) 캐서린 켈러(Catherine E. Keller) 교수가 진행한 공동 연구의 후속 프로그램이다. 이 자리에서 캐서린 켈러 교수와 최순양(이화여대)·박일준(감신대) 교수가 강의했고, 이창호 교수(장신대)가 논평했다.

<뉴스앤조이>는 이날 강연들 전문을 4차례에 걸쳐 게재하고자 한다. 아래는 박일준 교수의 발표문이다. 박일준 교수는 'I’m Not a Man Either : reflecting on Sex and Gender in the posthuman age'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 편집자 주


우선 필자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만일 페미니스트가 여자들만을 위한 용어라면 말이다. 적어도 여성의 권리를 위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나는 페미니스트적 주체가 아니며,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소위 '남성-페미니스트'인 척하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내가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무한 경쟁과 승자 독식의 세계 속에서 '남자'란 곧 '가부장'(patriarch)의 자리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어느 집단이든 조직이든 가부장 혹은 수장(the head)은 1명이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은 그를 위해 존재한다. 위계적 조직의 본질이다.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인 사회조직이란 바로 이런 구조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수직적으로 상하의 위계질서로 오밀조밀하게 짜여진 구조 속에서 99%에 속하는 생물학적 남성들은 사회적 남성이 되도록 요구받는다. 비록 그들 각자는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래도 넌 남자잖아"라는 말이 이러한 조직 구조 속에서 와닿지 않는다. 누가 더 고통을 많이 당하느냐가 우리 문제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좌절당하고 상실당한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부둥켜안고 살아가려면, 자신이 여전히 남성의 자리에 있음을 확인하는 도착적 행위들이 발동하기 시작한다. 가부장으로서 좌절당하고 차단당한 자존심이 자신보다 약한 자들, 특별히 가정의 여성들을 향해서 도착적으로 과시되기 시작하는 때, 이 문제는 단지 의식 없고 부도덕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을 필자는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물론 무엇보다도 여성들을 위한 운동이다. 하지만 필자는 남성들에게도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를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모든 우리의 언어가 화이트헤드가 말한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를 벗어나지 못함을 인식해야 한다.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란 구체적인 것을 추상으로 오해하고, 추상을 실재로 혼동하는 오류를 가리킨다. 즉 '남성'이라는 말은 추상으로서, 생물학적인 남성의 남성다움을 구체적으로 가리킨다기보다는 우리 사회와 구조가 남성이라는 말로 가리키며 지시하는 어떤 추상적 질서를 나타낸다. 우리는 이 추상적 단어 '남성'이 무한 경쟁과 승자 독식의 세계 속에서 어떤 기능과 함의를 지니고 있는지 성찰하지 않은 채, 그저 넌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무의식을 주입받는다. 남자란 어떤 존재인가? 이 물음을 삶의 구체성 속에서 답을 찾으려면, 우리는 '남자란 누구인가' 혹은 '남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 속에서 찾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언어는 이미 구조화되어 있어서, 우리의 말은 이미 언급되지 않은 (찰스 테일러가 말하는) '사회적 상상'(social imagery) 속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쟁 위주의 구조 속에서 남자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좌절당한 남성이 자신의 남성다움을 확인하고 과시하는 상대방, 즉 여성이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래서 어느 영화의 제목처럼, "여자는 남자의 미래이다." 역설적으로 이 가부장적인 소비 질서의 환상 속에서 우리는 '여성'을 만나지 못한다. 자본주의적 승자 독식의 구조가 여성을 남성들의 환상 속에서 끊임없이 치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존재로서 여성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여성은 "모두가-아닌"(not-All) 혹은 "전체가 아닌"(not-whole) 존재로 표기되고, 그래서 여성이라는 이름 위에 삭제 표시가 표기된다: 여성. 이 삭제된 여성(여성)은 여성의 존재성이 취소되었다는 것 혹은 여성-됨의 상태가 지워졌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 '삭제 표시'는 여기서 특별한 기능을 갖고 있는데, 바로 여성은 무존재(non-existent)가 아니라 '존재함으로 간주되지 않음'(in-existent)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생생하게 존재한다. 문제는 그렇게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 의식구조 속에서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이 간주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비존재로서 존재하는 여성은 오로지 남성화된 여성—이는 여성이 남성처럼 된다는 말이 아니다—으로서, 보다 정확히 말해서, 남성들의 투사된 이미지 혹은 환상 속에서 존재의 자리를 갖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디우식의 표현을 차용하자면, 여성은 일자로 셈하여지지 않는다. 체제는 언제나 모든 존재를 일자의 존재로 셈한다. 그렇게 셈하여지는 존재만이 존재로 간주되고, 셈하여지지 않는 존재는 그저 다수(the multiple)로 간주된다. 이 일자의 셈법으로 구성되는 체제 속에서 다수란 명석판명한 존재로 간주될 수 없는 애매하고 위험한 존재를 의미한다. 바로 이렇게 '셈하여지지 않는' 존재의 자리가 바로 '모두가-아닌' 것으로서의 여성의 존재의 자리이다. '모두가-아니'라는 것은 우선 '모두'(All)라는 것이 기존의 셈하기 구조로부터 일어나는 추상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게 기존 체제의 셈법이 구현하는 추상의 세계 속에 여성이 존재로서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비존재의 자리는 지구촌 자본주의의 체제 구조 속에서 지구 인구의 99%의 자리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1대 99의 구조가 지금 지구촌 모든 사회경제정치의 구조를 특징짓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을 읽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가 혐오 사회, 증오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 "1대 99"의 구조가 문명적으로 엄청난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는 증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자는 바로 이 비존재(in-existent)의 자리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것이 바로 '여성'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소위 '남자'는 여성을 혹은 페미니즘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비존재로 취급받는 여성들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신 스스로가 비존재의 자리로 내몰리면서도, 여전히 자기는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남자라는 허위의 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스스로에 대한 진정한 성찰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 시대는 남성이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할 것을 요청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들뢰즈는 '여성-되기'(becoming-woman)을 '동물-되기'와 '기계-되기'와 평행하여 놓았다. 또한 해러웨이는 여성과 동물과 사이보그를 동일한 존재의 반열에 놓고, 이들 간의 연대를 주장하였다.

우리 시대 가부장적 체제는 바로 우리, 즉 생물학적으로 남성으로 태어난 이들에게 '남자답게 살고, 남자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말을 주입한다. 하지만 라캉의 성차 도식이 우리들에게 드러내는 진실은 모든 남자는 이미 거세되었다(castrated)는 진실이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 한 명의 자리에 이를 수 있는 남자는 없다. 모든 사람이, 부유하든 가난하든 간에, 모두 각자의 상처를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속절없는 '패배자'(loser)라는 사실이 은폐된다. 우리 모두가 거세되었다는 말은 생물학적 남성의 의미가 삭제되었다는 말과 같다. 이것이 바로 라캉의 여성, 즉 '전체가 아닌' 것으로서의 여성이라는 기호가 진정으로 가리켜 주는 의미의 지평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여성은 가부장적 체제 속에서 어떻게 구성되는가?
: 남자들의 이야기

여성은 남자들의 세계 속에서 존재(being)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환상(fantasy)으로서 존재한다. 주로 성적인 환상으로 말이다. 여성에 대한 남자들의 성적 환상은 주로 사춘기 또래 문화 혹은 남자들의 뒷담화 문화 즉 음담패설 문화로부터 유래한다. 뒷담화나 음담패설은 그저 아무 의미가 없는 언설이 아니다. 사실 우리들의 올바르고 정당한 담론보다, 뒷담화나 음담패설이 어쩌면 우리들의 사회적 상상을 구성하는데 더 결정적인지도 모른다. 공적으로 당당하게 배울 수 없는 내용들은 그 뒷담화와 음담패설은 담고 있고, 인류의 진화사에서 사실 이 뒷담화는 스토리-텔링 애니멀(story-telling animal)인 인간에게 생존의 지혜를 제공하는 원천이었다. 하지만 이 뒷담화는 올바른 것 혹은 정당한 것을 알지 못한다. 생존을 돕기 위한 장치인 만큼,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는 것이 아름답거나 강한 것이라는 생각을 주입한다. 사회적 무의식을 통해서 혹은 사회적 상상을 통해서 말이다.

사춘기 시절 또래 남자들에게 남자다운 친구란 누구인가? 학교와 가정이 공식적으로 가르쳐 주지 않는 비밀스런 지식을 소유한 친구이다. 즉 여자와의 성적 행위에 대한 경험이 있는 친구 말이다. 혹은 자신이 학업이나 체력이나 리더십 등이 결여되어 있을 때, 이런 비밀스런 경험적 자산이 자신을 또래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지 못하게 하는 구실을 한다. 이 또래문화의 성적 뒷담화 속에서 여자들은 성적으로 대상화되어가고, 지배의 대상이 되어 간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순진하고, 그래서 경험이 없으므로, 이런 경험을 가졌다고 말하는 또래들의 뒷담화를 따라간다.

아울러 이 시기 청소년들은 권력에 대한 복종을 배우는 시기이기도 한다. 이 시기의 권력은 바로 인기 있거나, 성적 경험을 갖고 있는 또래 친구들이다. 또래들 사이의 인기라는 것은 다소 경쟁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서, 남다른 경험이나 가족적 배경 혹은 실력을 보유함으로서, 또래들로부터 뒤처지지 않으려는 심리가 권력적 구조를 강화한다. 이 또래들의 모임은 또래 집단별로 그렇게 권력화되고 구조화된다. 이 시기에 남자들이 남자다움을 배우는 원천을 토니 포터는 "맨 박스"(the Men Box)라고 불렀다. 이 맨 박스를 통해 이 시기 사내아이들은 1) 여성은 남자들의 성적 대상이다 2) 여성은 남성의 소유이거나 전리품이다 3) 여성은 남성보다 하등하다는 사회적 명제를 주입받는다. 이러한 성차별적 담론 명제가 이 시기에 이미 작동하고 있다는 것은 이 시기 문화가 무한 경쟁과 승자 독식 그리고 약육강식의 구조로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물론 이러한 경쟁 체제적 구조는 이 시기 또래 문화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 자본주의의 극치를 구성하고 있는 21세기 지구촌 자본주의 체제 아래 모든 사회적 구조를 특징짓는 핵심을 10대들의 문화가 스스로 내재화하고 체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여성 비하적 담론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바로 이런 경쟁 체제 속에서 '남자란 무엇인가'의 지평이다. 남자들은 그 누군가의 대상이거나 소유이거나 전리품이 아니며, 따라서 하등할 수 없다는 것 말이다. 이를 속된 말로 '수컷 본능'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자본주의의 무한 경쟁과 승자 독식 그리고 약육강식의 구조가 변화되지 않는 한, 또래문화들 속에서 이런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악마화 혹은 비하적 외면(abjection)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공정한 경쟁'(fair competition)이라는 환상이 우리 사회가 차별이 극복되고 정의가 실현된 세상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다수로서 여성

카라 워커(Kara Walker)는 음영의 실루엣을 통해 그림을 만드는 예술가인데, 그녀의 그림들은 주로 남북전쟁 이전 미국의 풍경들을 그려 주고 있다. 그녀는 이 시기의 흑인들의 삶을 낭만화하거나 악마화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그림 속에 담아내기를 원했다. 그녀의 유명한 그림들 중 '톰 아저씨의 최후'라는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 속에는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형상이 담겨 있다. 그것은 바로 '뚱뚱한 흑인 유모'의 형상이다. 제목은 뚱뚱한 유모 한 사람의 형상으로 달려 있지만, 그림을 보면, 전혀 하나가 아니다. 오히려 다수(the multipe)로 구성되어 있고, 이 형상 속에 여성들은 뚱뚱하지도 않다. 그런데 등장하는 형상 속에 여성들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수유를 하고 있다.

가부장적 체제 속에서 여성은 일자(the One)가 아니라 다수(the multiple)임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사춘기는 라캉의 상징계로 진입하는 시기를 말하는데, 이는 곧 아버지의 시대로 진입하는 것을 말한다. 이 상징계적 경험에서 여성은 남성과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고 라캉은 말한다. 즉 남자아이는 엄마를 절대적으로 이상화하면서, 상징계적 질서로 진입하는 반면, 여자 아이는 엄마와 유령 같은 분신을 구성한다. 즉 여자아이에게 엄마는 절대적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으며, 오히려 자기와 다른 타자로 구성되는데, 사춘기 시절 여자아이는 이 타자화된 엄마가 자기 자신의 여성적 정체성과 중첩되고 마는 것이다. 즉 이 시절, 여성과 엄마는 동일한 존재의 다른 말이 아니라, 전혀 다른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다.

얽힘(entanglement)는 아무런 관계없는 것들의 긁어모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해한 관계성—아인슈타인은 이를 'spooky action'이라 이름하였다—이 그 안에 담겨 있지만, 이를 설명하거나 포착하기는 불가능한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relationality가 아니라 entanglement라는 것이다.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의 사고실험은 상대성이론으로 설명되는 세계 속에서 도저히 설명 불가능한 '원거리 작용력'(action at a distance)을 증명한다. 이를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 혹은 '양자 중첩'이라고 이름하였다. 말하자면 일자의 체제로 셈하여지는 구조 속에서 다수의 관계는 '얽힘'(entanglement)로 표기되는 셈이다.

그림으로 되돌아가자. 전체 그림의 제목은 '톰 아저씨의 최후'인데, 그 안에 담겨진 이 '뚱뚱한 흑인 유모'의 형상이 담겨 있다. 이는 혹시 톰 아저씨의 최후는 곧 뚱뚱한 흑인 유모라는 뜻으로 읽힐 수 있을까? 워커가 이를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는 무한 경쟁과 승자 독식의 자본주의적 체제 속에서 남자가 궁극적으로 어떤 삶을 영위하게 되는지를 그려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가부장적 체제의 셈하기 속에서 셈하여지지 않는 다수로서 여성이 차별받고 무시당하고 억압당할 때, 그러한 억압과 차별과 무시는 곧 남자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존재들이 살아갈 현재와 미래의 권력 구조 자체를 가리키는 형상일 수 있다.

포스트페미니즘으로부터 트랜스페미니즘으로

트랜스페미니즘은 버틀러와 같은 포스트페미니즘 사상가들이 시도했던 여성의 중성화에 대한 의식적 반대로 촉발되었다. 여성이라는 일반명사가 오히려 가부장적 체제 속에서 남성의 억압 논리를 다른 인종과 다른 민족의 여성들에게 그대로 반복하기 때문에 여성의 문제라는 추상적 해방의 논리를 획일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곧 여성성(feminine)은 여자(women)이 아니라는 말로 표현되었고, 이런 맥락에서 데리다는 자신도 여성(feminine)이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데리다의 제자인 케서린 말라부(Catherine Malabou)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 가정 폭력으로 억압당하는 사람은 여전히 대부분 여성들이라는 현실 인식을 토대로 데리다식의 포스트페미니즘 담론에 이의를 제기한다.

하지만 트랜스페미니즘은 '제2의 물결' 시대의 페미니즘 즉 전적으로 성적인 차이(sexual difference)에 기반한 페미니즘으로 단순히 복귀하려는 운동은 아니다. 크리스핀(Crispin)은 최근 저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페미니즘 선언>(2017)이라는 모순된 제목의 책을 출판했는데, 우리 시대 페미니즘 운동이 본래의 정신, 즉 사회의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목표로 하기보다는 특정의 일탈적 개인을 징벌하는데 전념함으로써, 다시금 가부장제의 구조에 이중 구속되고 있다고 고발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도 생물학적 여성이 대통령이 되었다가 탄핵되었다. 생물학적 여성이 기업의 CEO가 많이 되고, 사회의 지도층을 구성하는 자리에 생물학적 여성이 많이 배치된다고 해서, 페미니즘이 목표로 한 세계, 즉 차별과 억압이 극복된 세계가 도래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그런 양적인 목표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자칭 페미니즘 열풍은 가부장적 구조의 근원적 동력, 즉 무한 경쟁과 승자 독식 그리고 약육강식의 논리를 그대로 반복할 위험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성공한 여성들을 역할 모델로 삼는 페미니즘 운동은 일자의 체제 속에서 셈하여지지 않는 다수를 위한 운동이 되지 못하고, 역으로 가부장적 체제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될 위험성을 갖는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페미니즘 운동의 진정한 아름다움 즉 상호 의존성과 얽힘의 급진성을 희석시킨다는 비판이다. 그러면서 크리스핀은 "여성들이 대면하는 현실적 장애물들과 불평등은 대부분 오로지 가난한 사람들만이 겪어야 하는 장애물들이다—중산층 혹은 그 이상의 계층에 속한 여성들은 (자본주의적 체제 속에서) 권력과 평등에 대한 접근 권리를 구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즉 페미니즘이 극복해야 하는 진정한 적은 남자/여자의 이분법이 만들어내는 추상적 남성이 아니라, 애초에 이러한 이분법을 구조화하고, 사회의 모순을 남성이라는 추상적 명사 속에 투사하도록 만드는 자본주의적 구조라는 것이다.

"If we want to create a better world, we need the foundations to be different, not to be the same foundations patriarchy was built on. But this is the sticky problem that it is going to be hard to circumvent: most women are not fundamentally better than most men." (Crispin, 103)

"We cannot create a safe world by dealing with misogyny on an individual basis. It is our entire culture, that way it runs on money, rewards inhumanity, encourages disconnection and isolation, causes great inequality and suffering, that’s the enemy. That is the only enemy worth fighting." (Crispin, 105)

트랜스페미니즘은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이고 경쟁을 위주로 권력을 쟁취하는 일자의 셈하기 체제 속에서 셈하여지지 않는 다수들(multiplicities)을 종단하며(trans-) 다양한 해방의 연대를 실현하자는 운동이며, '여성'은 그 셈하여지지 않는 다수의 대표적인 이름임을 인식하는 운동이다. 켈러는 이 다수의 형상을 얽힘(entanglement)으로 언어화했고, 이를 들뢰즈의 '접층'(the fold)과 연결시켰다. 영어에서 이 접층의 어원은 "ply"인데 이는 본래 "열심히 일한다"(to work diligently)를 말한다. 이는 성공만을 셈의 지표로 삼아 사람들을 과로 사회로 몰아가는 자본주의적 경쟁 체제 속에서, 진정한 성공은 과정의 성실이지 결코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올바른 일이라고 소명받은 일을 열심히 하는 데에는 실패가 없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성/패가 판단의 기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誠)을 이루는 것은 하늘의 성(聖)이지 결코 남성적 탐욕으로서의 성(性)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제2의 성이 철저히 억압당하고 배제당하는 구조 속에서 제1의 성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생물학적) 남성은 이 억압과 차별의 구조 속에서 이미 거세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구조로부터의 해방은 단순한 남/녀의 이분법만을 가지고서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억압받고 차별받는 다양한 집단들이 서로 소통하고 연대하면서 각자의 접층에서 진정성(authenticity) 혹은 성스러움(divinity)를 이루어 가는 과정(들)을 통해서만 진정한 해방이 가능할 것이다.

뉴스앤조이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http://www.newsnjoy.or.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일준의 다른기사 보기

관련기사

line 캐서린 켈러의 시각으로 한국 여성신학 돌아보기 캐서린 켈러의 시각으로 한국 여성신학 돌아보기
line 얽힌 희망: 트랜스페미니스트 신학의 불/가능성 얽힌 희망: 트랜스페미니스트 신학의 불/가능성
line 포스트휴먼 시대의 도전과 인간의 미래 포스트휴먼 시대의 도전과 인간의 미래

추천기사

line 오정현 목사, 일반 편입? 편목 편입? 공방 계속 오정현 목사, 일반 편입? 편목 편입? 공방 계속
line 성경 공부 안 하는 교회 없는데, 한국교회는 왜 이럴까 성경 공부 안 하는 교회 없는데, 한국교회는 왜 이럴까
line '로고스'가 보우하사 대형 교회 만세 '로고스'가 보우하사 대형 교회 만세
기사 댓글 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