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설교(Preaching: Communicating Faith in an Age of Skepticism)>(두란노)는 독자들이 일반적으로 설교라는 주제를 다룬 책에 대해 기대하는 것과 약간 다른 내용을 담은 책입니다. 두 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첫 번째로, 이 책은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책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설교 테크닉에 관한 내용이 말미에 20쪽 정도 나오기는 합니다만, 켈러 자신은 이 책이 설교의 '어떻게'보다는 설교의 '왜'와 '무엇을'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을 책 전체를 통해 더욱 강조합니다. 따라서 그런 부분을 기대하고 읽는 신학생이나 목회자는 약간 실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켈러가 이 책에서 다루는 부분들은 설교자의 설교를 더욱 풍성하게, 더욱 근본적으로 설교라는 직무를 어떻게 바라볼지 신학적 근거를 제공할 뿐 아니라, 틈틈이 켈러 자신이 뉴욕 맨해튼이라는 목회적 상황에서 어떤 문제와 질문에 부딪혔고, 질문에 어떻게 답하고자 했는지 보여 주기 때문에 노하우에 관해서도 만족스러운 답을 여러 면에서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이 책이 설교에 관한 책뿐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책 첫 부분에서 다루듯이, 그리스도인의 "말씀 사역"(ministry of the Word)의 세 가지 측면을 다루면서, 교회에서 예배 때 이뤄지는 공식 설교를 훨씬 넘어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신앙을 소통하는 데 꼭 알아야 할 것들을 다룹니다.

켈러는 성경에서 말하는 말씀 사역의 세 가지 차원을 level 1, 2, 3로 나눕니다. 여기에는 설교(level 3: 근거 -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바울과 베드로의 공적 설교들)를 포함해,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공적 신앙의 소통과 가르침(level 2: 근거 - 베드로 전서 4:10-11),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사람들과 신앙을 소통하고 교류하는 것(level 1: 근거 - 골로새서 3:16)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의 말씀 사역을 풍성하게 다룹니다.

설교의 독특한 중요성도 절대 놓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설교가 오늘날 교회에서 중요하고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만큼이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설교를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세상과의 관계에서 신앙을 소통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책은 단순히 기독교 사역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뿐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관심이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게 된 그리스도인은 저절로 그런 관심이 생기리라는 게 이 책의 전제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책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각설하고, 켈러는 좋은 설교는 항상 두 가지 책임을 수반한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로 성경 본문에 대한 책임이며, 두 번째로 특정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을 향한 책임입니다. 첫 번째 책임과 두 번째 책임은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 하나로 귀결됩니다. 성경에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현대를 살아가는 삶에 나타나시는 그리스도로 선포하는 것, 그것이 설교자의 임무입니다.

켈러는 이런 작업을 위해 세 가지 직무를 말합니다. 첫 번째는 복음을 아는 것이며, 두 번째는 특정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과 그들이 어떻게 하면 변화하는지를 아는 것이며, 세 번째는 설교자 자신의 깊은 내적 동기와 영적 성장을 성령의 도움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서평에서는 세 가지 직무를 켈러가 어떻게 다루는지를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팀 켈러의 설교> / 팀 켈러 지음 / 채경락 옮김 / 두란노 펴냄 / 380쪽 / 2만 원

첫 번째 직무
: 복음을 아는 것

켈러는 복음을 설명할 때, 타력 구원으로서 복음을 정반대 개념인 자기 구원(self-salvation)과 대치해서 설명합니다. 켈러에 따르면, 공동체 중심의 전통 사회에서도, 개인 중심의 현대 서구 사회에서도, 자기 구원의 방식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이는 각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과 자기 가치를 세우는 방식과 관련돼 있습니다.

전통 사회는 개인이 속한 공동체에서 요구하는 기대치와 역할을 얼마나 충실하게 달성하느냐가 각 개인의 정체성과 가치를 결정짓는 잣대가 됩니다. 현대 서구 사회에서는 공동체에서 무엇을 요구하느냐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고유한 개성과 욕구를 얼마나 잘 표현하느냐가 각 개인의 정체성과 가치를 결정짓는 잣대가 됩니다.

이 두 가지 방식의 공통점은 정체성과 가치를 모두 개인의 노력과 열심으로 얻을 수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 이 두 가지 방식의 공통점입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이런 식으로 자기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 즉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자력으로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반드시 다른 사람, 특히 자신보다 이런 노력을 덜하는 사람을 깔보거나, 이런 일에 더욱 뛰어난 사람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노력한 만큼 하나님께 대가를 요구하려고 하며, 충분히 일하지 못했다고 느낄 경우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라보시는 가치가 위축될 것이라고 느끼며, 자신이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 노력했다고 느낄 경우 자신의 가치가 더욱 인정받아야 한다고 하나님 앞에서 주장합니다. 즉 행위(performance)에서 정체성(identity)을 찾을 경우 끊임없이 개인의 행위(performance)에 따라 정체성(identity)이 달라지며, 그것은 끊임없는 비교와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반면 하나님의 복음은 각 개인의 정체성을 각자의 행위에 두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인정에 두라고 촉구합니다. 그리고 그를 통한 정체성과 우리의 가치에서 시작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소중하며 독특한 존재인지 우리의 깊은 마음 밭이 보게 되면 될수록 우리 삶은 더욱 더 선하고 독특한 열매들을 많이 내게 될 것이라고 복음은 말합니다.

이와 아울러, 자력 구원적 접근이 지닌 맹점에 대해 켈러가 경계하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도덕주의적 이해입니다. 즉 기독교가 착하고 정의롭게 살라고 말하는 종교이고, 그게 기독교의 전부라고 말하는 접근에 대해 켈러는 매우 경계합니다.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 저절로 '복음=도덕'이라는 등식을 세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켈러에게 이 등식을 깨는 것은 급선무가 됩니다.

이 등식을 깨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복음을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대로 들을 방법은 없으며, 교회에 다니는 신자에게서도 '복음=도덕'이라는 전제가 은연중에 발견되기에, 켈러는 모든 설교는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어야 하며, 복음은 도덕이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도덕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선한 행위로 자신의 가치를 얻으려는 인간의 노력이라고 본다면, 도덕주의가 왜 자력 구원의 일환인지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추가적으로, 켈러는 이러한 도덕주의와 자력 구원이 문화 간 차이를 뛰어넘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 학자들 간에(특별히 인류학자들에게서) 논쟁의 여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관련 자료 및 연구가 저에게는 없에, 나중에 관련 연구를 보게 되면 추가적으로 생각을 나누는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두 번째 직무
: 특정 문화권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변화 역동을 이해하는 것

이 두 번째 직무에 대해, 켈러는 첫 번째 직무를 설명할 때보다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합니다. 그만큼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이 처한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고 신앙을 소통하는 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켈러의 이 책은 이 부분(4~6장)만으로도 충분히 책을 사서 읽어 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켈러가 생각하는 신앙이 문화와 소통하는 방식에 대한 큰 그림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켈러가 이해하는 설교를 통한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신학적 인간학에 대한 큰 그림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4장에서 켈러는 특정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과 신앙에 관한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그들과의 공감대를 찾는 것도, 무조건 그들을 향해서 반박하는 것도 아닌, 반박하고 도전하기 위해서 공감대를 찾으라고(adapting in order to confront) 말합니다. 이런 소통 방식에는 단순히 상대방과의 대화를 이끌어 나가기 위한 전략적 차원을 넘어서는 켈러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깔려 있습니다.

즉, 어떤 문화든지 간에 복음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없는 문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부분이 어떤 문화에나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들과 신앙을 소통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이 속한 문화 안에 있는 복음과의 접점, 즉 복음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찾는 것입니다. 이런 작업은 그 자체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들을 이해하려 하고 소통하려 하는 노력 없이, 단순히 신앙을 소통하는 것을 기술적 차원으로만 이해하기 시작하면 사랑이 없어지게 되고, 사랑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게 되기에 그렇습니다.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기독교=복음'이라는 공식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켈러는 책 전체를 통해 복음의 완벽한 타자성을 말합니다. 복음은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절대 완벽하게 이해하고 소유했다고 말할 수가 없기에, 어떤 경우도 복음을 소통하려 하는 내가 복음과 동일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혹은 기독교가 복음과 동일하다고 생각하고 신앙을 소통하기 시작할 경우, 우리는 대화하는 대상을 향해 은연중에 우월감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복음이 말하는 우리의 죄인 됨에 정면으로 대치되며, 우리의 우리 된 것이 은혜를 통해서라는 바울의 고백에도 반대되는 마음가짐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계속해서 유지한다는 전제하에, 켈러는 특별히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그들이 신뢰할 만한 자료를 인용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신앙이 다루는 각각의 주제에 대해 자신이 인용했던 학자들 저작을 언급하는데, 세속 문화의 흐름을 이해할 뿐 아니라 그를 통해서 사람들이 가진 생각의 흐름을 읽어 내고자 하는 설교자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가이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래 간단히 켈러가 각 주제에 대해 제시하는 학자들을 언급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참고로, 여기 언급한 학자들은 모두 기독교 신자가 아니며, 때때로 무신론자들도 있습니다.

우상: 소설가이자 문학가이며, 퍼모나칼리지 교수였던 월래스(David Foster Wallace)는 스스로 신자가 아닌데도 모든 사람이 무언가를 섬기고 예배한다고 말했습니다. 기독교의 예배 개념과 접점을 찾을 만한 얘기를 한 것이지요. 아울러 그는 우상을 섬기는 것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사탄: 컬럼비아대학의 델반코(Andrew Delbanco)는 자신의 책 <The Death of Satan>에서 악과 사탄이 단지 사회구조적이고 심리적 요소로만 환원되는 현대인의 문화적 관점이 악의 총체적 차원을 놓치게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특이한 주장이지만, 델반코가 기독교 신앙이 없는데도 이런 주장을 한다는 것에서 충분히 신앙이 없는 사람들과의 접점을 세우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원죄: 영국의 무신론자 지식인이었지만, 이후에 신앙을 갖게 된 조아드(C.E.M. Joad)는 원죄에 대한 거부로 좌파 지식인들이 합리적이지 못할 때 실망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원죄 교리가 사람들의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부분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리서치를 해 본다면 아마 많은 경우 신자가 아닌 학자나 지식인이 복음이 말하는 통찰에 공감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고 켈러는 말합니다. 남은 것은 설교자들이 계속해서 문화와의 대화를 통해 공감대를 찾아가는 것이며, 사람들이 신뢰할 만한 근거 제시를 통해 복음을 신뢰할 만한 것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처한 문화에 대한 이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사람은 복음을 듣고 어떻게 변화하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켈러는 6장 진정으로의 설교(Preaching to the Heart)에서 이 부분을 아주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켈러의 신학적 인간학의 핵심을 볼 수 있는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바로 마음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논리적 생각을 관장하는 이성도 아닙니다. 마음은 오히려 우리의 감정과 이성, 그리고 의지를 모두 관장하는, 우리의 모든 행동과 말의 중심이 되는 동기 구조(motivational structure)를 말합니다.

같은 차원에서, 켈러는 이 장에서 우리 마음은 우리가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들의 질서 구조라는 말을 또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고 신뢰하든지 간에, 그것을 우리 이성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우리의 감정은 그것을 가치있다고 느끼며, 우리의 의지는 그것을 할 만한 일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이 제대로 선포될 때 나타나는 현상은, 첫 번째로 우리의 동기 구조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사랑하고 믿고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러한 드러남을 통해 복음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믿고 사랑하고 따르는 것보다 그리스도께서 더 우월하심을 설득하며 선포하며 보여 줍니다. 이런 작업에서 복음에 대한 선포로서 설교는 분명하고 논리적이어야 하며 동시에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실제적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는 그 순간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현존하시고 계심을 그들의 마음이 알 수 있도록, 즉 그들의 동기 구조에 균열이 갈 수 있도록 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사람들 마음이 알 수 있도록, 그들의 동기 구조에 균열이 생길 수 있도록 전하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켈러는 자신과 대화했던 한 소녀의 예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이 된다는 말에 대해 예를 들어 줍니다. 그 소녀는 자신이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에 굉장히 상심하고 있었고, 켈러는 그 소녀를 위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소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도 알고 있고,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천국에 갈 거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학교에서 나를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한 명도 없는데 그 모든 게 무슨 소용이죠?"

이 소녀의 마음에 대한 켈러의 분석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소녀를 향한 사랑은 이 소녀에게 있어서 실제적이지 않습니다. 이 소녀의 자기 정체성과 가치를 결정하는 데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남학생이 자신을 알아주고 좋아해 주느냐입니다.

따라서 복음이 제대로 선포되면 이 소녀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사랑해 주시고 계시며, 그 사랑의 크시고 위대하심이 대단하기에 그 소녀가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이 적어도 지금만큼 크게 마음을 어렵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설교는 바로 이런 변화를 이끌어 내는 작업입니다.

즉, 복음이 선포될 때 이 소녀가 실제로 마음에 두고 있는 신뢰 구조, 동기 구조가 바뀐다는 말을 켈러는 하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예들은 켈러가 수많은 설교를 통해 보여 주었으니, 그의 설교 한 편을 유튜브나 아이튠즈를 통해 들어 보시는 게 이 글에서 예를 드는 것보다 더 빠를 것 같아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직무로 넘어갑니다.

세 번째 직무
: 성령의 도움으로 설교자 자신의 내적 동기와 영적 성장을 아는 것

마지막으로 켈러가 하고자 하는 말은, 설교는 복음을 알아야 하는 작업이며, 또 사람들과 문화를 알아야 하는 작업인 것만큼이나 설교자 자신에 대해서 깊이 통찰해야 하는 작업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앞에서 얘기한 첫 번째와 두 번째 직무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없이 자신의 재능만으로도 설교를 충분히 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재능만으로 이런 일을 해내는 사람은 어쩌면 가장 저주받은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정작 자신은 복음에 의해 도전받거나 변화받지 못하게 되는, 따라서 성령께서 설교자에게 주시는 통찰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능력입니다. 켈러는 이 얘기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설교를 위해 말씀을 읽고 묵상하기보다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 보니 설교가 나오게 되는 것이 건강하다고 말입니다. 그만큼 계속적으로 말씀을 읽고 자주 규칙적으로 묵상하는 것이 설교자의 삶에 필수적이라는 얘기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켈러가 주목하는 것은, 그가 서브 텍스트(subtext)라고 부르는, 한국말로 번역하자면 '언외의 뜻' 정도로 볼 수 있는 말입니다. 켈러는 설교자의 입에서 나오는 내용과는 상관없이, 각각의 설교자가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바가 있음을 간파합니다. 어떤 경우에 그러한 의도는 설교자 자신이 얼마나 설교를 화려하게 잘하는지일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설교자가 속한 교단이나 교파, 혹은 특정 공동체가 얼마나 하나님 뜻에 합당한지에 대한 긍정일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 선포되는 진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에 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마지막의 경우, 켈러가 특별히 조심하고자 하는 것은 진리 자체에 대한 높임이 그 자체로는 별문제가 없어 보일 수 있지만, 그러한 선포가 많은 경우 신앙적 배경이 없는 비신자들에게는 무례함이 되거나 의도치 않은 배제로 연결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목적이 바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예수께로 이끌려고 하는 것임을 고려할 때, 이러한 '언외의 뜻'이 얼마나 복음의 원래 의도에서 벗어나 있는지 금방 알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켈러가 가장 이상적으로 보는 설교의 '언외의 뜻'은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무시당하는 자와 약자, 가난한 자들의 구세주이시기에, 그리스도를 높이는 설교는 필연적으로 내부자와 외인을 나눌 수가 없습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과 초신자를 구분하지도 않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앞에서 죄인이라고 선포함을 받으며, 또 동시에 모두가 의인이라고 선포함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개인의 행위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더욱 인정을 받고 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게 되는 설교만이 원래의 복음 선포라는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설교가 됩니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김상일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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