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흉기, 검술은 살인술! 아무리 멋진 미사여구나 대의명분으로 치장해도 그게 진실이지. 아가씨가 하는 말은 한 번도 자기 손을 더럽혀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말하는 꿈같은 소리에 불과해…. 하지만 난 그런 진실보다도 아가씨가 말하는 꿈같은 소리가 더 맘에 드는군. 내 소원은, 앞으로는 그 꿈같은 소리가 진실인 세상이 되는 거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만화 <바람의 검심>(서울문화사)에 나오는 주인공 켄신의 명대사입니다. 하지만 오늘 글에서 다룰 작품은 <바람의 검심>이 아닙니다. 켄신이 꿈꿨던 그런 이상이 아니라 말 그대로 검이라는 흉기로 살인술을 갈고닦으며 끝없이 '죽고 죽이는 나선'을 오르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면 바로 일본의 전설적인 무사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 1584~1645)의 일대기를 그린 <배가본드>(학산문화사)일 것입니다.

<배가본드>는 <슬램덩크>(대원씨아이)로 유명한 이노우에 타케히코(井上雄彦, 1967~) 선생님의 작품입니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적은 없고, 현재 37권까지 나왔는데 요즘 연재가 뜸한 듯합니다. 작가님의 건강 문제라고 언뜻 들었습니다. 스토리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다케조라는 한 시골 소년이 일본 최고의 검객이 되기를 꿈꾸며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강력한 적들을 만나고, 좋은 동료와 경쟁자를 만나고, 당시의 내로라하는 무인들을 스승으로 만나면서 다케조는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검술가로 성장해 나갑니다.

가장 최근 출간된 <배가본드> 37권 표지.

그가 처음에 추구했던 것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강한 무사, 천하무적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귀신같은 분노와 힘으로 상대를 압도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함으로 그는 점점 유명한 검술가가 되어 갑니다. 이 만화의 좋은 점은 미야모토 무사시가 단순히 검을 사용하는 기술을 습득해 가는 과정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이 성장하는 모습 또한 굉장히 자세히 그려 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12권 도입부에서 무사시는 갑자기 깎아지른 절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합니다. 틈틈이 불상을 조각하기도 하고, 암벽등반도 해야 하고, 최근 연재된 부분에서는 산에서 농사만 짓고 있으니 검술의 길은 참 험난하군요. 당대의 천하무적이라 불리는 야규 세키슈사이(柳生宗厳, 1529~1606)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오르지 못한 경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무사시는 자신이 추구하는 강함이 무엇인지, 천하무적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산을 향해 "꼭대기가 안 보이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군", "꼭대기를 봐 주마 이놈"이라고 말하며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갑니다. 고생 끝에 정상에 오른 그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세상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검술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다고 자만했을까요. 아닙니다. 무사시가 산 정상에서 본 것은 또 다른 수많은 산이었습니다.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비추자 자기가 지금 오른 산보다 훨씬 높은 산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끝없이 펼쳐진 산봉우리들을 보며 그는 약간 당황하지만 이내 웃음을 터트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좋다. 지금 나는 이 정도다!"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보면서 자신의 현재 상태를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이 산이 끝도 아니고, 가장 높은 산도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올라야 할 곳이 있고, 다른 산에 오르면 또 다른 경치가 보일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커다란 산맥 속에서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신학을 전공하고 15년 남짓 목회자로 살면서, 대단한 공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끊임없이 공부하고, 목회 현장에서 경험을 쌓으며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신학적 발견이나 깨달음, 삶 속에서 체험하는 신앙의 사건들을 통해 때때로 지금까지 오르지 못했던 산을 정복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믿으면 믿을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무지함이라는 저의 한계입니다.

기독교만 놓고 봐도 유대교로부터 지금까지의 수천 년 역사가 있습니다. 그 기독교 신앙은 결코 독립해 존재해 온 것이 아니라 당시의 역사·문화·철학·경제·과학 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진리를 알기 위해서, 때로는 성경 한 줄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이해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마치 무사시가 산 정상에 오르자 자신이 올라가 보지 못한 더 높은 산이 보이고, 더 많은 봉우리를 보게 된 것과 비슷합니다. 기독교의 역사와 신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에는 정말로 다양한 방식들이 있으며, 우리가 정복했다고 믿는 그 산봉우리도 수많은 산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문제는 내가 오른 산이 기독교 신앙의 제일 높은 산이며, 유일한 산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방식, 내가 속한 교단의 교리와 신학 역시 수많은 단계를 거쳐 형성된 한 가지 방법일 뿐인데, 그것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그 단계들을 살펴볼까요? 구약부터 하면 너무 길어지니까 예수님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커다란 산맥 속에서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먼저 1세기 유대인이었던 예수는 유대인들과 히브리 성서 전통 속에서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본격적인 기독교 운동으로 만든 사도 바울과, 예수의 어록을 수집하여 남긴 Q공동체,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전기의 형식으로 남긴 마가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Q와 마가를 기초로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복음서를 기록했고, 요한은 자신의 독특한 사상(제가 볼 때는 유대 신비주의)을 담아 새로운 언어로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런 초기의 기독교 문서들은 교부들을 통해 헬라 철학의 언어로 해석되었고, 중세 천 년의 신학이 이어졌습니다(천 년의 신학을 한 줄로 쓰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제가 아는 것도 없고 다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16세기가 되어 성서 해석을 교회가 독점하는 것에 반대했던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등장했습니다. 그 이후, 모두 아시다시피 기독교는 정말 다양한 분파로 나뉩니다. 교단이 갈라지고, 신학도 계속해서 세분화되어 발전해 왔습니다. 정통주의 신학, 계몽주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신학, 그에 대한 반성으로 나온 신정통주의 신학, 그 이후 지금까지의 현대신학의 작업들이 복잡한 층위로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학뿐일까요. 위에서 말했듯이 근대가 되면서 엄청난 속도로 발전한 과학·고고학·심리학·종교학·역사학·철학 등의 학문적 성과들이 기독교 역사와 성서를 설명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눈으로 이것을 보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성서를 읽고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는 방식은 어떻게 형성된 것입니까. 우리는 정확하게 예수의 눈으로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1세기의 로마 식민지 아래 팔레스타인에서 살던 유대인 예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우리는 기독교 역사 속의 여러 필터를 통해 기독교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필터'라는 말이 나온 김에 카메라 렌즈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니콘 AFS 24-70 F2.8 렌즈(카메라는 니콘이지요) 사양을 보면 "11군 15매(ED렌즈 3매, 비구면 렌즈 3매, 나노 크리스탈 코트 1면)"이라고 써 있습니다. 이 렌즈로 피사체를 찍을 때 최소 15장의 렌즈를 통해 맺힌 상을 보고 찍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서와 기독교 신앙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렌즈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광각렌즈처럼 넓게 볼 수도 있고, 망원렌즈처럼 한 부분을 크게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에는 예수의 변화산 사건이 나옵니다. 수난을 앞두고 산 위에서 기도하던 예수 옆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고 예수가 영광으로 빛나는 장면을 함께 있던 제자들이 목격합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 영광의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그곳에 머무르고 싶은 욕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곳에 머물지도, 초막을 지어 그 영광의 순간을 기념하지도 않습니다. 거기에서 발견한 한 가지 영광, 한 가지 체험에 머무르는 것은 예수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 서 있는 위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완전히 객관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불가능한 주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생각이, 내가 성서를 보는 시각이 다양한 시각들 중 하나이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서 어떤 방식으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오르고 있는 산이 끝이 아니며, 그 너머에 또 다른 산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내가 어떤 렌즈를 통해 보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 그 렌즈를 하나하나 닦아 가며 그 끝 모를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 신앙의 길이 아닐까요. 이러한 마음가짐은 하느님과 신앙의 무한함 앞에서, 그리고 또 다른 산을 오르고 있는 타인들 앞에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산을 오르는 무사시의 모습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자신의 한계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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