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은 언제나 뜨거운 감자다. 교회는 처음부터 종말론적이었고, 시대의 흐름을 따라 강약을 조절하며 종말론의 관심은 지속되었다. 특별히 세기말이나 어지러운 시국에서는 종말론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특이하게도 '종말'은 곧 '이단'이라는 명제가 생길 만큼 황당하게 이끌렸다.

대부분의 이단은 두 가지 성향을 띤다. 하나는 이단이 삼위일체에 대한 오해에서 생긴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종말에 대한 왜곡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종말'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수도 없이 많은 자료가 떠오른다. 필자가 직접 '종말'로 구글링을 시도하니 스티븐 호킹의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종말은 신학 주제로만 남겨져 있지 않고 과학과 인문학, 역사, 영화 등에서도 깊이 연관을 맺는 주제이다. 시대적 조류를 타고 이단들이 '종말론'을 가지고 나와 교회를 흔들어 놓은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왜 교회는 '종말'에 관심이 없을까.

실제로 교회 안에서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극단적인 성향의 목회자가 아닌 이상 설교나 성경 공부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다. 종말은 의외로 민감한 사항이고, 어려운 주제이다. 그렇다고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무시하는 것으로 괜찮을까. 이단에 휩쓸리는 신자들이 '종말'을 물어올 때 목사는 "당신 같은 사람들을 위해 지옥을 준비했다"(어거스틴)고 우기는 것으로 회피하면 될까. 학자적 수준까지 답을 줄 필요는 없겠지만 종말이 무엇이고, 종말론적 삶이 무엇인지는 말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또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종말에 관한 기본적인 책 한 권은 읽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그분들을 위한 한 권을 책을 추천한다. 바로 조지 래드(George E. Ladd)의 <종말론 강의>(이레서원)다.

<조지 래드의 종말론 강의> / 조지 래드 지음 / 이승구 옮김 / 이레서원 펴냄 / 232쪽 / 1만 2,500원

이 책은 본시 2000년에 이레서원에서 <개혁주의 종말론 강의(The Last Things: An Eschatology for Laymen)>로 출간된 것을 개정해 다시 출간한 것이다. 개정에는 이승구 교수의 '종말신학의 프롤레고메나'라는 논문을 실어 종말론에 대한 이해를 더하도록 했다. 이 논문은 원래 논문집 <성경과신학>에 실린 것이다. 본서와 직접적인 상관은 없지만 종말론을 이해하는 작은 지도 역할을 한다. 이승구 교수는 역자 후기에서 이 책에 '종말론'이 붙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마지막에 될 일들'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고 말한다.

조지 래드는 찰스 어드만, D.A. 카슨, 웨인 그루뎀 등과 함께 역사적 전천년주의를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책을 읽어 나갈 필요가 있다. 전천년주의 입장은 환란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일제강점기를 지나온 한국교회는 대부분이 전천년주의를 지향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의 성향이 무천년주의를 더욱 지향하고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종말에 대한 관점은 시대 흐름과 밀착돼 있다. 필자는 먼저 본서의 저자 주장을 개론적으로 요약하고, 이에 대한 비평을 시도할 것이다.

종말에 대한 네 가지 관점과
조지 래드의 관점

종말에 대한 중요한 네 가지 관점은 역사적 전천년주의(Historic Premillennialism),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 무천년주의(Amillennialism), 후천년주의(Postmillennialism)이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네 가지 관점을 가진 이들을 분류해 보자. 먼저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들은 전통적 기독교 사상이며 20세기에 큰 힘을 발휘한 사관이다. 이들은 환난 후 역사적으로 천년왕국이 도래한다고 믿는다. 조지 래드도 여기 속한다. 세대주의 전천년주의는 환난 전에 휴거가 일어난다고 본다. 세대주의는 따로 배워야 할 이단적 성향이 높은 무리가 만든 문자적 성경 해석에 따른 관점이다. 대체로 학자가 아닌 일반 교인이 좋아하며, 부흥과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무천년주의(Amillennialism)는 말 그대로 천년왕국이 역사적으로 임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교부인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 칼뱅과 청교도 다수, 게할더스 보스와 루이스 벌코프, 그리고 그의 제자인 앤서니 후크마가 주장한다. 이들은 역사적 천년왕국은 존재하지 않고 종말과 함께 부활해 의인은 천국으로, 악인은 심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후천년주의(Postmillennialism)는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에서 힌트를 얻어 생긴 주장이다. 중세에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했고, 18세기 역사의 진보와 완성을 주장하는 식민적 전제주의 사상과 밀착돼 있다. 이들은 역사의 종말이 있기 전 교회가 모든 나라를 지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한 다음 천년왕국이 온다고 주장한다. 천년왕국이 끝난 후에 종말이 온다고 믿는다. 아쉽게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후천년주의는 힘을 잃었다.

조지 래드의 번역서를 소개하면 이렇다. 가장 최근인 2016년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설명한 <조지 래드 하나님의 나라>가 CH북스에서 출간되었다. 원제는 'The Presence of the Future: Jesus and the Kingdom'이다. 제목에 역사적 전천년주의적 관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001년 서로사랑에서 번역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도 있는데, 원제는 'Scriptural Studies in the Kingdom of God'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래드의 관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재림과 휴거>라는 제목으로 영문에서 1993년에 출간되었지만 오래전 절판된 책이라 구할 수 없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원제는 'The Blessed Hope: A Biblical Study of the Second Advent and the Rapture'으로 1990년 Eerdmans에서 출판된 책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세대주의가 주장하는 '환난 전' 휴거를 비판하며, '환난 후' 휴거가 더 성경적이라고 반박한다. 역사적 전천년주의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이다. 이상으로 종말에 관한 네 가지 관점과 조지 래드가 주장하는 역사적 전천년설에 관한 책을 살펴봤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성경 해석의 기초

먼저 주의할 것은 조지 래드의 성경 해석 관점이다. 조지 래드는 처음 "세대주의자"(13쪽)였다. 세대주의자는 역사적 전천년주의와 유대인 회복을 뺀 나머지는 거의 일치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의 성경 해석의 성향을 알 수 있다. 그는 1장과 2장에서 성경의 해석의 틀과 종말의 이스라엘을 성경 속에서 정의한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구약의 이스라엘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와 '인자'는 같지 않다. 구약의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됐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미 교회와 세우신 새 언약을 통해 이루신다."(42쪽) 세대주의가 이스라엘의 육적 회복을 지지하다면 조지 래드는 교회로 흡수된다고 보았다. 육적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온 것은 '하나님의 경륜'일 수 있으나 "신약은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빛도 비춰 주지 않는다."(43쪽) 이것은 이스라엘을 육적으로 회복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은 표적"(43쪽)으로 봐야 한다. 즉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는데, 이스라엘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옳은 해석이다.

종말에 일어날 일들

3장부터 8장까지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본론이다. 마지막 9장 '하나님의 나라'는 결론에 해당한다. 우리는 본론을 살피면서 저자가 생각하는 역사적 전천년주의의 일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3장 '중간 상태'는 구약과 신약을 오가며 중간 상태로 보이는 구절을 찾아 해석한다. 결론은 "신약성경은 중간 상태에 관해 별로 말해 주지 않는다"(61쪽)이다. 즉, 중간 상태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4장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다룬다. 4장은 저자의 종말을 이해하는 핵심 주장이 담겨 있다. 래드는 그리스도의 재림은 두 단계로 본다. 초림은 성육신 사건으로 '결정적인 날(D-Day)'이고, 재림은 마지막 날로 '승리의 날(V-Day)'이 된다(75쪽). 그러나 "승리의 날까지는 아직도 많은 전투가 남아" 있다(75쪽).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현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용어로 재해석"된다(77쪽). 저자는 여기서 재림을 완성의 날이며, "그의 나라를 그 성도들에게 가져다주"는 날이며, "메시아적인 왕으로 그의 나라를 다스리실 것"(77쪽)이라고 단정한다. 이것으로 재림 직전에 역사적으로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성경적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5장에서는 "재림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용어"들을 다룬다. 파루시아, 아포칼립시스, 에피파네아와 같은 단어다. 이 단어들은 두 사건이 "한 사건"(91쪽)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이 단일하며 나뉠 수 없"(92쪽)다고 말한다. 6장은 교회는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환난 전에 휴거하여 고난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당한다." 교회는 핍박을 당할 것이며, 박해 속에서 '순교'를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순교는 영원한 축복과 영광의 길이 되는 것이다."(114쪽)

7장에서 부활과 휴거를 다룬다. 필자가 보기에 저자의 논리를 피력하기에 중요한 부분인데 저자는 '부활'에 과하게 집중한다. 성도의 부활은 육체적 부활이고,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한다. 그 "부활의 몸이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은 것"이고, "성도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재림(파루시아) 때 일어날 것"(131쪽)이다.

그럼 휴거는 무엇인가. 살전 4:17에서 ‘끌어올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휴거(rapture)이다. 조지 래드는 휴거를 "살아 있는 성도들이 죽음을 거치지 아니하고서 신령한 몸을 입게 되는 변화"(133쪽)이다. 이미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게 된다면 "살아 있는 성도들에겐 휴거가 일어난다"(133쪽)고 말한다. 사실 이 부분은 신학적으로 매우 논쟁이 많은 곳이다.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에 동참한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에녹과 엘리야가 살아 있는 몸으로 승천했기 때문에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또한 저자는 이 장에서 계시록 20장에서 "명백히 두 개의 부활을 예언한다"(134쪽)고 주장한다. 역자인 이승구는 이것을 다음 쪽에서 권호덕의 <천년왕국>(성광문화사)을 참조하라고 조언한다. 역자에게 직접 묻지 않아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도 역자는 둘째 부활을 지지하지 않은 것 같다.

9장 '하나님의 나라'는 저자의 주장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곳이다. 먼저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오는 세상'으로 미룬다(184쪽).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점으로 천년왕국이 시작된다. 이때 첫 번째 부활이 시작된다. 저자는 두 번째 부활을 마지막 종말로 보고, 초림과 재림 사이를 '지금'으로 설정한다. 지금 신자들은 "오순절에서 시작된 새로운 시대"(186쪽)인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말세는 성령을 통해 "오는 세대의 축복을 미리 맛"볼 수 있다(185쪽). 재림과 동시에 천년왕국이 시작되며, 신자들이 부활한다(131쪽). 신자의 부활과 동시에 휴거가 일어난다(133쪽). 그리하여 "그들은 생명에 참여한다"(135쪽). 신자들은 천 년 동안 재림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왕국에서 왕 노릇한다. 그럼 악인들은 무엇을 하는가. 아직 부활에 동참하지 못하고 둘째 부활 시에 '둘째 사망' 즉 백보좌 심판을 받게 된다. 둘째 부활과 둘째 심판은 천년왕국이 끝나는 역사의 종말과 함께 이루어진다.

나가면서

자, 이제 몇 가지만 정리하고 마무리해 보자. 필자는 칼뱅과 청교도들, 그리고 앤서니 후크마가 주장한 무천년설을 지지한다. 먼저 저자는 마이클 호튼이 각주한 것처럼 "아직도 역사적 전천년설에 대한 가장 탁월한 진술"자이다(<재림과 휴거(The Blessed Hope)>를 언급한 것이며, 새물결플러스의 <현대신학 지형도> '종말론' 편의 각주다). 현재 대부분의 보수적 신학자들이 지지하는 견해다. 그렇다면 이 책은 가장 한국적이라 할 만하고, 전통적 해석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필자는 무천년설을 따른다. 그 이유는 후크마 주장처럼 "요한계시록에서도 그렇거니와 신약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후크마, <개혁주의 종말론>, 308쪽). 상식적으로 천년왕국 기간에 기존의 살아 있는 사람들과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함께 지낸다는 것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조지 래드는 휴거하여 "죽음을 거치지 아니하고서 신령한 몸을 입게 된다"(133쪽)고 하지만 참으로 난해한 표현이다.

또 한 가지, 천년왕국이 끝날 때 사단이 놓여 다시 훼방을 놓는다는 요한계시록의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지는 이해할 수 없다. 만약 부활의 몸과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성도들에게 어떤 사단의 훼방이 있다는 말일까. 저자 논리를 따른다면 부활한 성도들이 아직 죄인으로 있는 거듭나지 않는 사람을 '통치'하게 되는데, 이 또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런 무리한 해석은 조지 래드가 문자적 성경 해석에 치우쳐 부활을 두 단계로 구분하여 의인들과 부활과 악인들의 부활을 구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지 래드의 다른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단정 짓기는 어려울 수 있으나 필자의 판단으로 그렇게 보인다. 역자인 이승구 교수도 이 부분에 대해서 앤서니 후크마의 <개혁주의 종말론> 부록에 실린 '종말론의 최근 동향'을 살펴보라고 권한다.

그런데도 이 책은 몇 가지 점에서 탁월하다. 먼저는 이해하기 쉽다. 사실 무천년론과 역사적 전천년설의 의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것들은 마지막 재림 후에 일어나는 종말에 관한 것이기에 현재의 삶과 그리 연관되지 않는다. 다만 지금 우리의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성경적 관점은 중요하다. 이 책은 바로 그 점에서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는 환난 전 휴거를 거부한다. 이것은 고난 속에서 기꺼이 인내하거나 순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게 된다.

또 하나는 역자가 주의를 준대로 3장 '중간 상태'에 대한 분명한 성격적 관점을 제시한다. 필자는 1장과 2장의 해석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모호하지 않고 명징하게 성경적 해석의 토대를 마련했다. 세대주의가 가진 모순들을 폭로해 바른 성경적 종말론을 갖게 해 준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정현욱 /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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