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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경찰 "5·18 광주시민은 혼란 속에서도 돕고 배려"
TF 조사 결과 공식 발표, <전두환 회고록> 정면 반박
  • 이용필 기자 (feel2@newsnjoy.or.kr)
  • 승인 2017.10.16 16:47

전두환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전남경찰국장의 중대한 과실 때문에 광주사태가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남경찰청은 "안병하 국장은 상부의 강경 진압을 거부하는 등 최선을 다해 수습했다"고 반박했다. 사진 제공 안호재

"광주사태 초기 경찰력이 무력화되고 그로 인해 계엄군이 시위 진압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전남경찰국장의 중대한 과실 때문이었다. 경찰국장이 자리를 지키지 않고 행방이 묘연해지면서 부하들은 안 국장이 홀로 피신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계엄군이 출동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경에 남아 있던 사람들(경찰)은 모두 피신해 버렸다. 그래서 파출소가 습격당하고 무기까지 탈취당했다."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올해 4월 출간한 <전두환 회고록>(자작나무숲) 494쪽에 나오는 내용 중 일부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경찰이 무력화되면서 계엄군이 시위를 진압할 수밖에 없었으며, 특히 당시 경찰국장 안병하 경무관이 '피신'하면서 파출소가 습격당했다는 주장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주장을 전남지방경찰청(강성복 청장)이 정면 반박했다. 전남경찰청은 10월 11일, '5·18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 수집 및 활동 조사 TF' 결과를 발표했다. 경찰청은 "확인 결과 안 국장은 5·18 당시 단 한 번의 근무지 이탈 없이 최선을 다해 수습을 위해 노력했다. 상부의 강경 진압을 거부하고, 시민 안전을 강조하는 소신을 유지했다"고 했다.

안병하 경무관은 1979년 2월 전남 경찰국장으로 발령됐다. 5·18 당시 학생과 시민의 안전을 챙기는 데 주력했다. 안 경무관은 부하 직원들에게 "분산되는 자 너무 추격하지 말고, 부상자 발생치 않도록 할 것", "연행 과정에서 학생의 피해가 없도록 유의할 것", "화학탄 사용은 가능한 한 억제하고, 학생들에게 가혹한 행위 하지 말고 교문으로 밀어 넣을 것" 등을 지시했다.

안 경무관의 아들 안호재 씨는 올해 5월 <뉴스앤조이>와의 인터뷰에서 "신군부는 당시 경찰국장이던 아버지에게, 발포 명령을 내리고 군인보다 경찰이 앞장서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며 지시를 거부했다"고 말했다.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안 경무관은 직위 해제됐다. 그는 1980년 5월 26일경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돼 고문을 당했고, 이후 강제로 사직됐다.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던 안 경무관은 1988년 숨을 거뒀다. 그는 생을 마감하기 전 '광주 비망록'을 작성했다.

비망록에는 "(5월) 17일 자정 이후 계엄 확대와 더불어 공수부대가 투입되고 무차별 진압이 시작되자 이에 자극 받은 시민들이 총기를 탈취하고 건물에 불을 지르는 등 사태가 급속히 악화됐다. 광주항쟁의 원인은 ①과격한 진압으로 빚어진 유혈 사태 ②악성 유언비어의 난무 ③김대중 씨의 구속이다"고 적혀 있다.

안병하 경무관은 사후 공적을 인정받았다. 올해 '경찰 영웅'으로 선정됐다. 경찰은 안 경무관 흉상 제막을 준비 중이다. 안호재 씨는 10월 16일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멀리 돌아오긴 왔지만, 37년 만에 아버지와 당시 광주 경찰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북한군 활동은 불가능한 상식 밖 주장"
소강석·김정명 목사 "공수부대 먼저 발포,
시민들 대응 차원에서 무기고 탈취"

전남경찰청은 북한 특수군 개입설과 폭동설에 대해 신빙성이 낮다고 발표했다. 5·18을 직접 체험한 목사들은 공수부대가 먼저 시민들에게 총을 겨눴다고 했다. 사진 출처 5·18기념재단

지만원 씨를 비롯한 일부 극우 인사들은 "5·18은 북한 특수군이 주동해 왔다"거나 "폭동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남경찰청은 조사 결과 신빙성이 아주 낮은 주장이라고 했다.

"당시 경찰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집회 시위 관리였다. 시위대의 인원, 거성 성향, 주장, 시위 용품 등을 세밀히 분석해 대응 방향을 정했다. 광주에는 약 130여 명의 정보·보안 형사가 활동했고, 시내 주요 지점 23개소에 정보 센터를 촘촘하게 운영했다. 형사들의 눈을 피해 광주라는 한정된 지역에서 수백 명의 북한군이 활동했다는 건 불가능한 상식 밖의 주장이라는 한결 같은 증언이다. (중략)

5·18과 관련해 광주시민들이 자부심과 긍지로 삼는 것은, 무정부 상태하의 공포와 생필품 부족 속에서도 서로 돕고 배려하는 공동체 정신을 보여 줬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큰 혼란 없이 질서를 유지했다.

특히 5월 21일 15시경부터 (안병하) 전남경찰국장의 지시에 의해 아무런 보호·안전 대책 없이 개인별로 무작정 대피했던 2,000여 명이 넘는 도청 경비 경찰관들은 광주시민들의 헌신적인 도움과 보호로 단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무사히 복귀했다. 지금도 경찰관들은 시민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지 못하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1980년 5월의 광주를 직접 경험한 목사들도 같은 목소리를 낸 바 있다. 소강석 목사는 5월 <뉴스앤조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군이 내려와서 (광주) 사람들을 선동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우리처럼 기도, 전도밖에 안 했던 사람들도 의분이 생길 정도로 (군인들은) 폭력적이었다. 몇 시간 안 되지만, 나도 시위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북한군 선동으로 시위에 나섰다는 말인가. 계엄군이 먼저 총을 쐈으니까, 시민군이 맞서기 위해 무기고를 탈취한 것 아닌가.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김정명 목사도 8월 <뉴스앤조이>와의 인터뷰에서, '북한군 개입'과 '폭동'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경험한 바로는 북한군이 개입했다거나 시민이 폭동을 일으킨 게 아니다. 처음 공수부대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을 때 공포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실탄이었다.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낸 것이다. 평소 예비군 훈련을 받았으니까 무기고 위치도 잘 알고 있었다. 폭동이었다면 경찰도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경찰은 시위대에 온건했다. 절대 폭력을 안 썼다." (관련 기사)

5·18민주화운동 당시 경찰 활동에 대한 자체 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전남경찰청은 TF팀을 꾸려 올해 4월부터 5개월간 조사를 실시했다. 생존자 137명으로부터 증언을 확보했고,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치안본부의 전남 사태 관계 기록' 등을 발굴했다.

강성복 경찰청장은 "국가기관 경찰이 스스로 직접 작성했다는 점에서 이번 5·18 보고서는 의미가 있다. 5·18과 관련한 진실을 알리도록 계속 자료를 찾아내고 증언 등을 확보해 미흡한 점을 보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전남경찰청은, 공수부대가 초기에 과격 진압을 했고, 시민들도 거세게 저항했다고 했다. 사진 출처 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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